마틴 하이데거는 “세계 그림”을 세계 박람회에 의해 악화되는 해로운 기술 효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를 욕망하는 관람객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드러난다. 관람객들, 미 술가들, 그리고 박람회의 조직원들이 제각각 다른 의도를 가지고 세계 박람회라는 국제 무대에 임했듯이 오늘날 전지구적인 비엔날레에서 활동하는 후예들 역시 서로 다른 의도로 이 무대에 오른다. 본 논문은 1851년의 대영박람회와 2005년의 리옹 비엔날레 사례를 통해 박람회의 축 제적 기능에 의해 촉발된 “경험의 미학”을 논한다. 경험의 미학은 대중에게 예술을 개방하고 대 중들이 스스로 예술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당대의 현안에 관한 국제적인 논의를 이끌어내도록 독려했으며, 국제적인 노예 경제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불완전하나마 서구 세계에 아시아의 철 학과 문화, 치유의 과학을 삽입하려는 시도였다.
이 논문은 2002년 개최된 《제4회 광주비엔날레 초청 국제 워크숍–공동체와 미술》에 참여 한 한국 작가들의 경험을 분석함으로써 90년대 말 이후 한국에서 대안적 미술 실천을 진행했던 작가들의 인식의 변화를 추적한다. 이 워크숍은 전지구화된 세계 속에서 미술과 사회의 관계, 미 술제도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하는 대안적 주체들의 상호 교류의 장으로 기획되었으며, 한 국 작가들은 워크숍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의 위치를 재맥락화하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그들 이 경험한 지역은 신자유주의와 국민국가의 개념 속에 복속된 지역이 아니라 혼종성과 이질성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지역이며, 이를 통해 공동체의 의미를 재발명하고, 세계와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비판적 예술실천의 가능성을 재발명하고자 했다.
다나카 고키(1975년생)는 지난 2013년 제 5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일본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준비된 첫 베니스 비엔날레였던 만큼, 그 해 일본관의 화두는 세계인들을 향해 재난에 대응하는 ‘일본’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작가는 3.11 대지진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재앙이라고 할지라도 개개인에 따른 체험의 격차가 상당할 뿐 아니라, 아무리 공동체적 단결을 강조하더라도 과연 타인의 재앙에 공감하고 그 고통을 공유 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본 논문에서는 다나카 고키의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 와 이후의 일련의 프로젝트를 통해 동일본 대지진이 일본 사회에 일으킨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 한 의심과 그 새로운 전망, 그리고 참여형 미술의 사회적 역할 등을 살펴보았다.
이 논문은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설립과 이후의 맥락을 고찰하며 한국관이 한국현대미술 과 세계미술의 공감대 형성과 문화적 코스모폴리타니즘의 확산의 장으로 구축된 과정을 살펴 본다. 한국미술계의 염원과 백남준의 적극적 개입으로 1995년 출범한 한국관이 1990년대 글로 벌 미술계의 변화와 베니스 비엔날레의 탈중심화 기조 속에서 한국미술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 여 광주비엔날레의 설립과 이어진 국내 비엔날레 확산, 글로벌 미술의 포용뿐만 아니라 예술가 의 초국가적 활동과 초문화적 가치 수용으로 이어졌음을 밝힌다. 특히 그동안 한국미술의 주요 논리였던 민족주의와 지역성의 문제를 넘어 타문화와 소통하는 예술적 코스모폴리타니즘의 가 치를 수용하며 보편적인 ‘현대미술’을 지향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1996년에 창설된 타이페이 비엔날레(TB)의 기획 메커니즘은 타이완 출신 큐레이터들의 공동 기획 체제(1996)로부터 일본 출신의 단일 큐레이터 체제(1998), 그리고 해외 큐레이터와 국내 큐레이터가 협업하는 이원 큐레이터 체제(2000-2010)를 거쳐서 다시 단일 큐레이터 체제(2012-2016)으로 회귀하기까지 다양한 과정을 겪었다. 특히 최근 단계에서는 서구 출신의 큐레이터들이 주도권을 장악해 왔다. 본 논문에서는 타이페이 비엔날레의 창립 당시 목표와 후대의 전개 양상 사이의 괴리 현상을 분석한다. 연구자는 이 행사가 타이완의 복합적인 지역 담론과 쟁점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단순히 동시대 국제 비엔날레의 추세를 수용하는데 머 물러 왔으며, 그 배경에 타이페이 비엔날레의 기획 메커니즘 뒤에 작용하고 있는 ‘자기 식민 지화’의 경향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본 논문은 1970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개최된 일본만국박람회(日本万国博覽會)와 전위예 술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본만국박람회를 국가 이미지를 표상하는 문화외교 정책을 위한 장으 로 파악하고 기존의 일본의 전후 미술사에서 잘 다뤄지지 않거나 지엽적으로 서술되는 데 그친 ‘환경(環境)’ 담론 및 테크놀로지를 강조한 환경예술의 예술가 협업 그리고 구타이미술협회의 후 기 활동에 해당하는 일본만국박람회 출품작에 대해 검토하였다. 여기서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전위예술 경향은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측면을 제시하였으며 이는 진보, 미래와 동일시되어 이를 강조하는 정부당국의 방향성과 합치되는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만국박람회에서 전위예술은 일본이 고미술 등의 전통 뿐 아니라 현대미술에 있어서도 문화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리고자 했던 정부당국의 의도를 실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논문은 식민지세대 화가들에게 ‘추상’이란 무엇일까를 묻는 연구의 일환이다. 필자는 이 응노(1904-1989)의 초기 추상작업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전통매체인 지필묵으로 그림을 그리던 그가 서구식 추상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와 목표, 그의 추상 작업을 이끄는 개념 등을 짚고, 그의 추상이 지니는 의미를 탈식민적 과제와 관련하여 진단한다. 이응노는 해방공간~1950년 대에 걸친 탈식민공간에, 민중의 생계현장에서 대상의 힘과 생기를 활달하고 분방한 붓질로 그 려내면서 탈식민적 근대성을 성취했다. 그렇게 탈식민적 과제를 푼 다음 파리에 정착해 추상 세계로 넘어갔다. 그는 다양한 재료와 물질을 접촉하면서 “용구의 혁명”을 실천하면서, 서예 미학을 활용하는 가운데 “구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의 추상을 일구어갔다.
본 논문은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 1930-)의 1953년-1967년 작품을 중심으로 그가 회화를 경험하는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해 회화의 의미를 축적했다는 점을 밝힌다. 물질성과 반 복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미니멀리스트 화가’로 알려진 라이먼이 1950년대부터 작품을 시작해 온 맥락이 최근 연구되었다. 본 글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그가 회화와 상호작용하는 붓질의 행위 를 실험으로 보고, 듀이의 경험론과 접목했다. 그는 경험 과정에서 얻은 해결책을 ‘의식’적으로 이용하여 통제 조건을 설정하고 결과를 산출하고, 또 새로운 재료를 향해 도전한다. 이러한 관점 에서 그의 수평적 붓질에 나타난 반복은 물질적 측면에서 감축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확장되며, 산업용 재료를 사용했음에도 그가 이를 회화를 지속하는 바탕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주장했다.
인터넷 사용 미술은 현대미술에서 개방적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그것 은 네트워크의 개인과 공동체를 공존 가능하게 하는 매체적 특성에 따른 것으로 열린 공동체는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개념으로 고찰될 수 있다. 이는 네트워크를 통한 열린 공동체가 무 위의 공동체와 열린 형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락스 미디어 컬렉티브의 <오퍼스>는 디지털 공 유지를 통해 열린 공동체를 추구한다. <오퍼스>는 참여를 원하는 이들이 가능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온라인 공공 창작 플랫폼으로 이를 위해 자유소프트웨어의 공유와 협업의 방법을 이용한 다. 그러나 <오퍼스>는 미디어 기술지식 등의 문제로 인해 열린 디지털 공유지가 되는데 한계를 가진다. 그럼에도 <오퍼스>는 열린 공동체에의 가능성을 통해 공존, 개방, 포용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