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의 목적은 D. H. 로렌스가 과거 금기시 하고 수치로 치부해온 성(性) 에 대한 담론을 어떻게 문학을 통하여 공론화하고 이를 통하여 성을 문학적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를 살펴보는데 있다. 당시 음란함과 신성모독이란 온갖 논란의 중심에서 로렌스는 오히려 성을 하나님이 창조 시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원초적이고 성스러운 뿌리로 간주하고, 혈과 육이란 세속적 가치를 종교적 차원의 신앙으로 승화시킨다. 인간의 고귀한 성이 타락과 함께 수치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성 자체의 변질이 아니라 그걸 가려놓고 은밀하게 행하는 위선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잃어버린 성을 되찾으려는 로렌스의 과감한 시도이고 그 시도는 그의 문학을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는다. 이 소설에서 로렌스는 거룩함과 수치라는 성의 양면성을 클리포드와 멜러스라 는 두 인물의 세계를 통하여 대비하면서, 그 두 세계를 왕래하는 채털리 부인으로 하여금 진정한 성의 의미를 머리가 아니라 육체로 깨닫게 한다. 로렌스에게 있어서 이것은 곧 혈과 육이란 종교이고 도덕이고, 그것은 위선을 버린 인간의 참된 모습이란 사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예이츠의 후기극 『큰 시계탑의 왕』과 『삼월의 보름달』을 탄트라 도상학과 철학으로 살펴본다. 두 극에 나타나는 참수와 춤의 이미지는 칼리, 친나마스타 같은 힌두 여신의 도상과 놀라운 유사점을 보이며, 몸을 긍정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탄트라 철학은 상반의 융합의 상징으로서 성적 결합을 찬미하는 예이츠의 존재의 통합 개념과 유사하다. 탄트라는 근본적으로 신과의 합일이라는 목표를 가진 영적인 수행법으로, 탄트라 도상학에서 참수된 머리는 에고 의식의 초월을 상징한다. 참수가 역설적으로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예이츠의 두 극은 존재의 합일이라는 시인의 비전을 표현한다.
『21세기 찬송가』 388장 「비바람이 칠 때에 의 원 가사는 찰스 웨슬리의 「예수, 내 영혼의 사랑 이다. 이 찬송시의 우리말 번역본이 처음 나타난 것은 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발간한『찬양가』(1894)로, 이 찬송가집에는 “主爲避亂所”(41장), “欲避亂往耶穌”(42장)의 두 편의 다른 번역이 실려 있다. 이후 이 번역 찬송가는 「예수내령혼령의 주」(1895)로 통합 번역되어 장로교와 감리교가 가각 발간한 찬송가집 『찬양가』와 『찬미가』에 모두 실렸다. 이 번역 찬송가의 제목은「풍우대작할때와」로 감리교·장로교 통합 찬송가집 『찬송가』(1908)년에서 바뀌고,『통일 찬송가』(1983) 이후「비바람이 칠 때에」 의 제목으로 가사도 수정되어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 본 논문은 찰스 웨슬리의 원 찬송시인 「예수, 내 영혼의 사랑」 의 내용을 분석해 본 후, 세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가사가 수정된 우리말 번역 찬송이 과연 찰스 찬송시 원전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지 찾아보았다. 그런 후 번역 찬송이 이 원 찬송의 곡조에 잘 부합되었는지 곡조의 강세를 중심으로 분석해 본 후 원 곡조와 잘 어울리면서 찰스 원 찬송시의 본문 내용을 적절하게 담고 있는 번역 찬송의 필요성을 논해보았다.
김종삼의 시는 1960-1970년대에 이르는 근대화 속에서 시인으로서의 결 핍으로 인하여 더욱 아름다움에 몰입하고 완전한 예술의 시간을 지향한다. 그 안에 순 수와 이상의 세계로서의 사랑이 존재한다. 예이츠 역시 젊은 시절 집요하게 사랑을 추 구하던 시 정신이 노년기에 자아통일의 과정에서 변화하며 반영된다. 두 시인에게 연 인과 애인이란 문명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자신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한 목적이자 삶 의 방식이었다. 또한 닿을 수 없는 과거에 존재하는 그리움이며, 그 고통을 견뎌내면 서 천상의 행복을 삶에서 구하려했던 시의 시작과 종결이었다.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과거에 유럽은 물론 일본, 미국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유명한 서적이다. 자유스러운 인터넷, 디지털 문학이 주류가 된 오늘 현대에 있어서 음란물 소지 또는 유포 행위를 형사 처벌한다는 것은 헌법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전문학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재조명하여 미국 판례를 분석해 보았다. 미국은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이 책을 강력하게 음란물로 제정했다가 1959년에서야 비로소 뉴욕 법원에서 금지령을 풀어 주었던 역사가 있다. 1928년에 발행된 이후 지난 세월 동안 음란물 유포 행위 관련 범죄를 다루는 시각이 미국에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리고 현재 사용되는 관련 법률, 또한 유죄 판결 통계를 살펴 보았다. 미국 법원에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후로도 음란물 유포 행위는 종종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이 지역적 기준(community standard)으로 볼 때 음란물이어야 한다는 법적 기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기인한다. 예를 들면 2012년에 뉴욕 맨하탄 시민의 기준으로 음란물을 보는 시각은 1950년대 캔자스 지역에서 옥수수 농사를 짓는 배심원들의 시각과는 현저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음란물의 유포 행위를 범죄화 하는 법제 자체가 이제는 지나간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종종 있지만, 아직까지 음란물은 미국에서 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언론의 자유 행사 행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법원의 의견이다.
The starting point of this work is to refute the argument of Peter Brown that the leadership of bishop as “lover of the poor” is not to confine the inspiration to within the Christian church and it would be considered from the social-political structure rather than ecclesiastical-monastic view. Brown insisted that Basileia, which was built for the relief of the poor by Basil, is a striking outcome of the great imperial endowment by which the church was granted its privileges in return for a fully, public commitment to the care of the poor. Even though the leadership of bishop as “the lover of the poor” is in part influenced by the socio-political structure, the religious and spiritual structure of human being is taking precedence over the socio-political structure of human being. Therefore, this work is to present how much as a bishop called “the lover of the poor,” Chrysostom was influenced by the monastic ideas.
John Chrysostom, a deacon and presbyter from 381 to 397 in Antioch and a bishop from 398 to 404 in Constantinople, died in exile in 407. He spoke over eight hundred sermons, two hundred and forty two letters, and fourteen treaties on poverty, the rich and the poor and alms. He is called “the lover of the poor.” His understanding of above issues is greatly influenced by monasticism, because the monastic ideal is ‘the voluntary poverty.’ St. Antony died in Egypt in 365, and Pachomius died only a short time before Chrysostom was born. Therefore, definitely he was influenced by monastic ideal very strongly.
Chysostom basically adopts the monastic ideals as his life model, and uses them as a basis for how he believes Christian ought to live in the city. The early years of the fourth century had already witnessed the popularity of the ascetic forms of Christianity in Palestine and Syria. In the second half of the fourth century, the manner of the lifestyle of the monks, both in Syria and in Antioch, was no longer unfamiliar. For Chrysostom monks are the models of Christian citizenship and monastery is the model for the city. His desire is to bring the monk’s way of life to the city. For Chrysostom, the monastery is the “city of virtue.” He wants to bring that virtue into the city, where the pursuit of glory prevails. In fact, glory is a key motivator for maintaining the city in an ancient society. Chrysostom challenges the vainglory pursued by so many, through his frequent preaching. In late antiquity, the dignity of the city was measured by the greatness of the city, represented by the Orchestra, the Hippodrome, gym and theatre of a city. He argues that the most important factor for maintaining the city is humility.
While Chrysostom takes his ideal for the Christian life and for society from the norms of monasticism, his attempts to implement his ideal in reality represent in almsgiving to overcome the 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He defines wealth itself as neutral. He focused on the function of wealth as utility, consequently he encouraged people to give alms. Therefore, he is called “the lover of the po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