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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성리학을 사상적 토대로 삼은 사림파의 학문적 계보와 연대는 조선왕조의 건 국과 함께 역사적 행보를 시작한다. 鄭夢周, 吉再로부터 江湖 金叔滋와 그 아들 佔畢齋 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조선 유학사와 정치사의 서막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후 星湖 李瀷은 退溪와 함께 단연 南冥 曺植을 영남지역의 학자로 지목하며 문명의 극치를 이룬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두 학자의 활동 지역에 따라 上 道의 퇴계와 下道의 남명은 각각 ‘仁’과 ‘義’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이 드 러난다. 퇴계가 학적 자세로서의 仁을 구현한 예악의 완성에 집중하였다면, 남명 은 ‘敬以直內 義以方外’로 대표되는 克己復禮를 통한 ‘內聖外王’의 목표에 집중한 실천적 측면이 강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남명의 강한 실천성은 후학들 의 전범이 되었다. 來庵 鄭仁弘이 이룩한 학파의 흥성했던 시기는 물론이거니와 戊申亂(1728)을 거쳐 정조의 賜祭文(1796)이 내리기 이전까지의 침체기에도 학 맥을 유지하던 원동력이 되었다. 본고는 18세기 남명학파의 인물로 이해되는 丹溪 지역 안동 권씨 가문의 梧潭 權必稱의 학파적 연원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의 집안은 15세기 중반 丹城縣에 혼인 관계로 정착한 이후 權潗·權濬 형제와 권필칭의 5세조 權濤가 문과에 합격 해 ‘三權’으로 불리면서 지역적 기반을 확고하게 잡았다. 그런데 18세기 무렵부 터 단계 지역 안동 권씨 가문은 문과가 아닌 무과급제자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는 점에서 특색을 지닌다. 그리고 권필칭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렇지만 그는 34세 때 櫟泉 宋明欽을 방문하였으며, 52세 때 渼湖 金元行을 찾아가 문인록에 도 올랐을 정도로 학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권필칭은 51세 때 고향인 三嘉에 梧潭精舍를 마련해 독서와 講學의 터전을 삼아 후학 양 성에 매진하였다. 특히 자신이 관직 생활을 하던 지역에서 유생들을 교육하고 백일장 등을 시행해 유학의 권면에 힘썼다. 그리고 그는 󰡔소학󰡕, 󰡔주역󰡕, 󰡔성리 대전󰡕, 󰡔중용󰡕을 탐독하며 ‘誠’과 ‘敬’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실천 자세를 중시하 는 修身의 생활 태도를 강조하였다. 이는 그의 만년 저작인 「隨思輒錄」에 집중 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남명 조식의 심적 수양과 실천적 면모의 학문 적 흔적이 18세기 단계 지역 안동 권씨 가문에 잔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 었다.
        42.
        2019.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爲己之學이라는 용어는 爲人之學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쓰인다. 위인지학은 출세가 목적인 반면 위기지학은 聖人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남명이 위기지학을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면 이는 출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는 그가 강조했던 엄정한 출처관과도 직결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명이 이처럼 중대한 의미가 있는 위기지학으로 학문의 방향을 전변한 시기가 과연 언제였던가 하는 점을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를 중심으로 논증해 보았다. 그 결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남명이 위기지학으로 학문의 방향을 전환한 것은 처음으로『성리대전』을 읽으면서 허형의 언급을 접하고 크게 자극을 받은 것에 기인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둘째, 다만 이 시기가 25세냐, 26세냐, 31세냐의 문제인데, 이는 요컨대 행장과 연보의 말이 본인의 기록과 어긋날 때 어느 것을 근거로 삼을 것이냐의 문제라는 점에서, 행장을 바탕으로 제기된 25세설과 26세설은 남명이 기록한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의 31세설에 대해 설득력을 잃는다. 셋째,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의 ‘已三十餘矣’라는 말이 科擧에 여러 번 낙방하고 난 뒤라는 곳에만 연결되고, 그 뒤 『성리대전』을 본 것과는 연결시켜 볼 수 없다는 견해는,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라는 글을 남명이 기록으로 남긴 이유와 관련시켜 이해하면, 당연히 그 뒤에 『성리대전』을 가져다 읽었다고 함이 순리라는 점에서 역시 설득력을 잃는다. 이 문제와 관련한 논의를 통해서 원전비평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고, 특히 2차 자료에 근거한 기록이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1차 자료의 기록과 어긋날 경우에는 1차 자료에 따라 마땅히 수정되어야 함을 확인하 였다. 더구나 남명의 위기지학으로의 전변 시기에 대해서 필자의 견해를 참조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중국의 熊禮滙 교수도 필자와 같은 결론을 낸 것에서도 31세설의 정당함이 충분히 드러났다고 할 만하다.
        43.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林養正(1716-1777)의 문집인 『수분와집』을 텍스트로 하여, 그의 생애와 가학을 계승하고 실천한 양상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守分窩集』은 별도의 목차 없이 그의 지향을 밝힌 문장인 「守分窩 序」와 관련 기록 부분, 시편과 간찰을 모아놓은 부분, 家狀 관련 부분 등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양정은 남명학파의 학자였던 임진부(1586-1658)의 후손으로, 三嘉 지역의 학풍을 이끌어나가는 지역 명문가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부친과 조부를 여의었으나 평생 충과 효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고, 가학 을 잇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받아들였다. 이는 성현이 남긴 文義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으로, 이를 후학에게 자신이 터득한 문의를 정확히 전수 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아울러 가학의 전수는 임진부의『禮略』을 실천하여 誠禮의 정신을 체득하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이를 실질적으로 적용시켜 선조의 가훈을 誠孝와 公正이라는 정신으로 확립시켰다. 임양정의『수분와집』은 남명학파의 한 지파인 임곡 임진부의 후손이 향촌의 명문가로 자리 잡으면서 선조의 가훈을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시켰고 윤리규범으로 작용하였는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44.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恩津林氏 가문은 16세기 葛川 林薰과 瞻慕堂 林芸이 나와 학문과 덕행으로 重望을 얻어 儒林社會에서 家門의 聲價를 높였다. 瞻慕堂의 손자 林谷 林眞怤가 외조부 立齋 盧欽, 蘆坡 李屹 등의 南冥學派 계통의 학문을 계승하여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루었다. 임곡은 三嘉로 옮겨와 활동하였는데, 鄭桐溪, 許眉叟, 趙澗松 등과 교유를 통해 학문의 폭을 넓히고 활동범위도 넓혔다. 특히 허미수와의 교유를 통해서 近畿南人의 학자들의 학문 경향도 접하게 되었다. 임곡은 慶尙右道 학자 가운데서는 문집의 양이 비교적 많은 편이고 많은 제자를 길렀다. 특히 그가 大君師傅에 제수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학문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임곡 이후 이 가문의 학문이 끊어진 것이 아니고 20세기까지 면면히 계속되었다. 임곡의 아들 虛齋 林如松과 反求堂 林如栢도 모두 家學의 전통을 계승하여 학문을 갖춘 인물이었다. 반구당은 龜溪書院 원장에 추대될 정도로 학문과 명망이 있었다. 구계서원 원장으로서 龜巖 李楨 의 弘揚과 龜溪書院 중건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허재와 반구당의 아들들도 학문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허재의 아들 述齋 林東遠, 反求堂의 아들 錦岡 林東茂, 梅軒 任東說, 潤叟 林東迪 등이 학문 활동을 크게 했다. 林谷의 손자 시대가 임곡 후손들의 학문 활동이 가장 왕성하던 시기이고 유림의 推重도 가장 크게 받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집안 외적인 상황으로는 1623년 仁祖反正 이후 慶尙右道 지방의 南冥學派 침체와 西人들의 회유 등으로 경상우도의 학문 전체가 떨치지 못하던 시대가 계속되었고, 집안 내적으로는 가난과 단명 등으로 家運이 번창 하지 못하여 학문 활동이 점차 위축되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도 이 집안은 慶尙右道에서는 오랜 기간 대대로 孝悌를 중심으로 실천 위주의 학문과 저서를 중시해 온 가문으로 江右 地方의 대표적인 學者家門으로 손꼽을 수 있다.
        45.
        2019.01 KCI 등재후보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적극적·소극적 공손 전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 실현 양상을 살펴보는 것에 목적을 두고 한국어수업에서 교사와 학습자의 발화를 전사한 자료를 통해 살펴보았다. 적극적·소극적 공손 전략은 체면과 공손성 이론에 기반하는데 이론은 Brown & Levinson(1987)에 의해 체면위협행위를 피하는 전략으로 발전하였고 이 연구에서는 적극적·소극적 공손 전략에 초점을 두고 한국어수업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A와 C수업에서는 관심 기울이기 전략이, B수업에서는 제안·요구·약속하기 전략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세 수업 모두에서 적극적 공손 전략이 소극적 공손 전략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세 수업에서 교사와 학습자 간 에 체면을 위협하는 행위가 적었다는 것이고 이로써 수업 분위기가 좋았다는 것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교사와 학습자의 발화를 따로 구분하여 비교하지 않았고, 수준에 따른 차이가 어떠 한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지는 않았다는 한계점이 있다. 이 연구의 의의는 적극적·소극적 공손 전략의 실현 양상을 통해 어떤 전략을 보다 많이 사용하였는지에 따라 수업의 분위기, 학습자와 교사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46.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隱 權平鉉은 19세기 끄트머리인 1897년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인 1969년까지 살면서 평생 한문지식인으로 자처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일제 식민지기를 거치고 다시 한국전쟁을 겪는 그야말로 평안한 날이 없는 날들이었다. 또한 그가 학문에 입문할 시기는 한문폐지론이 일었고, 儒學은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문-유학을 자신의 학문으로 선택했고, 栗谷 李珥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특히 율곡의 四七說에 대한 독실한 믿음은 그와 다른 그 어떤 논의도 수용하지 않았다. 화은의 삶과 학문은 주변이나 시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긴 바를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간 그의 강인한 정신의 징표이다. 그는 성현의 도를 지키는 것이 시대 변화를 追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비록 과거의 문자와 학문으로 전락한 한문과 유학이지만 거기에 새로운 미래를 위한 답이 있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예컨대 陰이 가득하면 반드시 陽이 다시 차오르는 이치와 같이 조국의 광복도 그런 이치 속에 이루어질 것이라 그는 믿었다. 그러나 그의 삶과 학문적 태도를 時宜라는 점에서 보면 아쉬움이 없지 않다. 하지만 철저하게 성현의 말씀을 따르고 체현하려 노력했던 20세기 마지막 유학자의 모습은 개인의 이익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이 행동을 바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47.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慶南 宜寧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간재학파 문인인 新庵 田溶珪(1884~1962)의 학문 활동을 艮齋學 계승의 면모를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전용규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의령의 儒風과 潭陽田氏 가학을 배경으로 그 기초가 형성되고, 20대 이후 간재 문하에 입문한 이후에는 간재의 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된 만큼, 그의 학문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의령의 儒風 및 담양전씨 가학, 그리고 간재학의 중심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유의하여 본고에서는 전용규의 학문 활동을 검토하기에 앞서 그 배경으로서 의령 지역 및 담양전씨 문중의 학문적 특징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문 활동을 간재학 계승과 전개를 중심에 두고 학파를 넘나든 교유 활동, 유교 문화의 계승과 보존에 주목한 강학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추어 검토하였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전용규의 학문 활동은 지역과 문중의 개방적 학풍 및 의리 정신을 바탕으로 암울한 시대 상황 하에서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대신하여 유학의 맥을 보존하기 위해 은거 및 강학을 선택하여 전개됨으로써 유교 문화의 보존과 계승에 주안점이 두어졌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49.
        2018.07 KCI 등재후보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학문 목적 한국어 연구가 어떤 영역을 중심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현황과 실태를 살펴보아 그 연구 결과를 수업에 활용하도록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학문 목적 한국어 교육’의 주 제에 부합하는 논문 477편을 선별한 뒤 유형(학위논문/학술지논문)별, 기능·영역별로 분류하였다. 또한 학문 목적 학습자를 위한 교육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학문 목적 학습자라는 용어를 세분화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학문 목적 학습자라는 용어는 아직까지 그 경계나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실정이라 본고에서는 이를 학습 목적과 선행 학습 정도에 따라 구분하여 정립하였다. 더불어 학위 과정에 재학 중인 유학생들을 위한 학문 목적 한국어 수업의 개설 현황을 부산 지역 대학을 중심으로 대학별로 알아본 후 그에 따라 도출된 학문 목적 한국어 교육의 문제점을 세 가지로 살펴보았으며 그러한 문제점에 대한 방안도 제시하고자 하였다.
        50.
        2018.07 KCI 등재후보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학습자 인식 조사에서 절반 이상의 중국인 한국어 학습자들이 학문 목적 발표로 인해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원인은 한국어 교육을 받은 과정에서 학문 목적 발표 경험 부족과 학문 목적 발표에 대한 교육 부족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중국인 한국어 학습자의 학문 목적 발표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문제점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아 보고 그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학문 목적 발표 능력 향상 방안에 관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중국인 한국어 학습자들이 한국어 교육과정에서 학문 목적 발표 교육을 받고 싶은 요구를 확인하고 학문 목적 발표 교육을 실시하는 시기, 학문 목적 발표 교육에서 다루어야 할 교육 내용 및 교수 방법에 대하여 학습자의 다양한 의견을 수집 하였다. 이러한 학습자의 요구와 의견을 바탕으로 학문 목적 발표 능력 향상을 위해 학문 목적 발표 교육을 실시하는 시기, 교육내용, 교수원리에 대하여 몇 가지 제언을 해 보았다.
        51.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에서는 介庵 姜翼(1523-1567)의 학문 특징을 살펴보고 그의 학문 지향이 문학작품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서술 하였다. 강익은 당대 함양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평생을 수양으로 일관하였고,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하는 등 유학의 사회적 보급에도 힘 을 기울인 인물이다. 이러한 강익의 학문 특징은 그가 남긴 記文에 집약 되어 있다. 강익은 이른 나이에 과거를 포기하고 爲己之學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이는 스승 唐谷 鄭希輔(1486-1547)나 南冥 曺 植(1501-1572)의 영향 외에도 자신의 과단한 실천 성향이 그 기저에 자리했다. 과단한 실천 성향이 위기지학을 확고히 실천하도록 만든 요 인이며, 성현의 본지를 ‘自得’하는 학문 방법을 통해 더욱 정교한 실천 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조식은 강익에 대해 ‘끝을 잘 맺을 것이 분명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하였다. 강익에게서는 문학에 대한 뚜렷한 관점이 감지되지 않는데, 이는 문 학에 대한 고민보다 심신수양에 역점을 두었던 그의 학문 지향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그의 학문 지향이 집약된 작품이 「양 진재기」이다. 강익은 「양진재기」에서 양진재를 건립하게 된 경위와 택지의 이유 및 의도 등을 설명하였다. 이 작품에서 강익은 성정의 참됨[性情之眞] 을 기르고자 외부와 격리된 곳에 택지를 하고, 주변의 자연물과 자신의 공부방이 교감할 수 있도록 안배하였으며, 수양을 돕는 물건들도 주위 에 배치하였다. 즉 「양진재기」는 강익의 자기 수양을 위해 자연물·인공 물을 가려서 배치하고 연출한 의도와 그 속에서 성정의 참됨 기르고자 했던 학문적 지향이 담긴 글이다. ‘양진재’가 본인의 학문 정진을 위해 사적 공간을 의도대로 조직한 건물이라면, ‘남계서원’은 학문의 표본을 제시함으로써 지역사회에 유 학을 널리 장려하고자 설립한 건물인데, 이러한 강익의 학문적 지향이 표출된 글이 「남계서원기」이다. 「남계서원기」에서는 一蠹 鄭汝昌을 제 향해야 하는 도학적 당위와 서원의 교육·교화적 기능을 주로 설명하였 다. 인간만이 도를 사회에 실천할 수 있는데 이는 도를 지닌 사람만이 가능하므로 정여창과 같은 선현을 서원에 제향하여 추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현을 서원에 모시고 제사지내는 의식이 학생들을 고무 시키는 측면이 있으며, 이를 통해 정여창의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유학이 부흥할 거라는 것이다. 강익은 두 편의 記文을 통해 내면으로 학문을 실천하려는 의지와 대외적으로 학문을 장려하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16세기 초반부터 조식·이황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유학자로서의 표상을 정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관되게 유학적 가치를 실천하고 보급한 강익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사림의 자기 정체성이 더욱 뚜렷해졌던 것이다.
        52.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瞻慕堂 林芸은 조선 중기 慶尙右道의 저명한 학자였다. 그는 부친 石泉 林得蕃과 형 葛川 林薰으로부터 家學을 계승한 바탕 위에서 退溪 李滉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더욱 심화시키고, 교유의 범위를 확대했다. 남명을 만나 영향을 받고 학문의 방향을 수정하였으니, 남명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생애의 초반에는 초야에서 학문 연구와 심성 수양을 하고 있다가 學⾏이 알려져 추천을 받아, 1567년 51세 때부터 벼슬 길에 나아갔다. 크게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자 리가 아닌 참봉직에 있으면서 조정에 장래 경륜을 펼칠 기반을 닦고 있었는데, 1572 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고 말아 그가 이룬 학문을 크게 펼쳐 보지 못 했고, 많 은 士友들이 아쉬워하였다. 첨모당 같은 유림에 비중 있는 인물이 나온 이후로, 그 후손들에 의해서 이 집안은 慶尙右道에서 학문이 있고 ⾏誼가 있는 대표적인 가문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유지 하였다. 그 손자 林⾕ 林眞怤에 이르러 학문하는 家門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확실히 하였고, 그 林⾕의 후손들도 학문하는 가문의 위상을 계속 지켜 나갔다. 특히 石泉은 자식 교육에 전념하여 學⾏兼全의 교육을 몸소 실천하여 성공하였 다. 그 두 아들 葛川 林薰과 瞻慕堂 林芸이 나와 학문과 덕행으로 重望을 얻어 家聲을 높였다. 갈천은 退溪 南冥과 도의지교를 맺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고, 첨모당은 퇴계의 친밀한 제자가 되고, 또 남명에게 지도를 받음으로 해서 조선 학계의 양대 宗匠의 영향을 모두 받게 되었다. 퇴계와 남명의 학풍을 아우르는 이런 특징은 瞻慕 堂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瞻慕堂은 51세 때 추천을 받아 출사했지만, 경륜을 펼칠 정도의 승진을 하지 못 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 했다. 그 아들들도 대부분 일찍 세상 을 떠나는 바람에 학문적으로나 관직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 했다. 그 손자 林⾕ 林眞怤가 외조부 ⽴齋 盧欽, 蘆坡 李屹 등의 南冥學派 계통의 학문을 계승하 여,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루었다. 許眉叟 趙澗松 등과 교유를 통 해 학문의 폭을 넓히고 활동범위도 넓혔다. 특히 허미수와의 교유를 통해서 近畿南 人의 학자들의 학문 경향도 접하게 되었다. 瞻慕堂 가문은, 조선 전기 石泉 林得蕃에 의해서 家學이 형성된 이후 葛川 林薰, 瞻慕堂 林芸 형제를 거쳐 전국적인 學問名家의 위상에 올랐다. 그 이후 첨모당의 손자 林⾕ 林眞怤가 큰 학문을 이루었고, 그 아들 손자를 거쳐 조선말기까지 거의 학문이 끊어지지 않았고, 여러 종류의 문집을 남겼다. 특히 이 집안은 오랜 기간 대 대로 孝悌를 중심으로 실천 위주의 학문과 저서를 중시해 온 가문으로 江右地方의 대표적인 學者家門으로 손꼽을 수 있다.
        53.
        201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春睡堂 鄭秀民은 一蠹 鄭汝昌의 증손으로 개평마을 종택에서 태어났다. 정여 창은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했고,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 어 배소에서 사망하고, 갑자사화로 剖棺斬屍되었다. 물론 정여창이 중종반정으 로 복관되었지만 정여창의 증손이란 점은 정수민의 삶을 지배하는 커다란 그림 자였고, 그는 스스로 이 그림자를 덮어쓰기로 한 듯하다. 따라서 그는 出仕를 포기하면서 󰡔文獻公實記󰡕를 편찬하는 등 증조인 정여창의 後事를 도맡았다. 그 러나 정수민은 단지 정여창의 증손이거나 정여창의 後事를 정리한 인물로만 치 부하기에는 업적이 너무 크다. 그 업적의 첫 번째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희 생되어 관련 자료가 민멸된 정여창의 사적을 정리한 󰡔문헌공실기󰡕를 편찬한 일 이다. 이는 집안의 일을 넘어 사라질 수 있는 역사의 인물 사적을 정리한 의미 있는 역사적 일이다. 두 번째는 함양 군지인 󰡔天嶺誌󰡕를 편찬하여 인문지리학 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춘수당집󰡕을 남겨 후학들에게 문인으로서 한 인간의 문학세계와 삶의 면모, 교유 및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곧, 정수민은 󰡔춘추좌전󰡕에서 말한 三不朽, 立德․立功․立言을 이룬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찍이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 덕행을 닦았으니 입덕이요, 집안을 넘어 역사의 한 분인 문헌공 정여창의 실기를 정리하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작 성하였으며, 지역의 문화와 역사, 풍속을 기록하여 지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 였으니 이는 입공이다. 또한 시와 산문을 포함한 문학 작품을 남겼으니 입언도 이루었다.
        54.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조선의 16세기 『朱子大全』 刊行과 그 이후의 學問的 動向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이다. 조선의 한문학은 주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크다. 그러나 『朱子大全』의 간행보급은 16세기에 와서 이루어 진다. 이 책을 바탕으로 16세기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조선 성리학은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朱子大全』 간행이후 조선 선비들의 학풍은 변하였다. 『朱子大 全』의 간행은 성리학을 『性理大全』 중심에서 『朱子大全』 중심으 로 변환하게 하였다. 그리고 『朱子大全』 속의 백록동 서원의 기록은 주세붕에 의해 소수서원을 창건하게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번져나간 교육의 영향은 조선을 크게 변모시켰다. 『朱子大全』 속에 들어있던 주자의 시는 조선 선비들의 경모의 대 상이 되었다. 특히 <武夷櫂歌>의 영향은 조선 선비들로 하여금 <九曲歌>를 짓게 하였고, 조선 산수의 자연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였다. 주희의 詩文은 조선 사림들의 문장의 전범이 되었으며, 조선의 문풍을 변화시켰다. 『朱子大全』 속의 이기철학의 영향은 조선의 철학적 사유의 틀을 바꾸게 하였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이기철학은 조선의 학문을 더욱 깊고 오묘하게 발전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향약에 대한 영향은 조선 의 풍속을 변화시켰으며 조선 사회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밖에도 『朱子大全』의 영향은 여러 방면에서 생활문화와 사상의 기저를 변화시켰다. 위대한 책 한권이 세상을 바꾼다. 『朱子大全』 한권이 조선의 학문을 변화 시켰다. 16세기 『朱子大全』 한 책이 조선 의 선비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55.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俛宇 郭鍾錫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로 대 변혁의 시대를 살았다. 위태로운 나 라를 구하라고 임금이 불러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의병 봉기에는 실효성이 없다며 동참을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임금에게 상소나 독대를 통해 끊임없이 나라의 위기 극복을 꾀하였고, 파리장서 의거를 주도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런 면우의 처신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의 판단대로 흔들림 없이 자기 갈 길을 갔다. 그의 처신이 옳았건 아니건 간에 조선말의 가장 전형적 유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경륜은 우리 근대사에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면우의 진면목은 흥미롭고 연구해 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면우가 그렇게 온 나라의 촉망을 받는 인물이 되기까지 그 玉 成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수신과 학문 자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면우에게 수 신과 학문에 대한 견해를 밝힌 저술이 유난히 많은 것에 주목했다. 면우의 저술 「晦窩三圖」·「言難」·「行難」·「爲勿說」·「染解」·「靜坐說」·「知難」·「讀書說」·「學賊」 등이 그것이다. 본고는 면우의 수신과 학문에 대한 견해가 응집되어 있는 이런 저술들을 통하 여 그의 수신관과 학문에 임하는 자세가 그의 操行과 인간상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저술을 통하여 면우는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이야 말 로 儒者의 기본 바탕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해야 하며, 말은 오직 天命에 순응하여 人事에 달통한 사람만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면우는 또 ‘利慾에 물드는 것’ 등 나쁜 것에 물드는 5가지로 자신 을 경계하고, 고요히 정좌하여 겸허한 자세로 내면의 원기를 기르며, ‘爲己의 학 문’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또, 공부를 해치는[學賊] 5가지를 들어 경계하였 고, 특히 유례가 없는 그의 독서설 4편은 3가지 독서의 형태, 5가지 독서의 요령 등 독특한 기준과 분석 기법을 적용한 논리적 체계였다. 이렇게 면우는 수기치인을 위한 爲己의 학문을 실천하는데 남다른 발상과 방 법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면우의 학문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그 자신의 말 대로 옥의 조탁과정에 비견되는 것이었고, 면우가 한 시대를 풍미한 큰 학자로서 설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6.
        2016.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최근 증가하고 있는 유학생, 특히 중국인 유학생들의 교수-학습 활동 과정 중 학문목적 한국어능력 향상을 위한 연구에 목적이 있다. 한국에 소재한 3개 대학의 중국인 유학생(남 133명, 여 150명)을 대상으로 학업, 학문목적 한국어에 대해 느끼는 어려움, 대학진학 전 한국어 학습 경험 과 한국어능력시험 등급이 대학생활에 미치는 정도와, 학문목적 한국어 교수-학습 활동에 어떤 영향 을 미치는지를 조사하였다. 설문조사는 2015년 3월 21일에서 6월23일까지 3개 월간에 걸쳐 실시되었 다. 대상자의 선발은 각 대학교 유학생회를 통해서 각 대학에 중국유학생을 대상으로 하였다. 수집된 자료는 SPSS WIN 20.0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본 결과연구는 학문목적을 가진 학습자들이 언어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어려움의 해소와 문어능력의 향상, 대학생활 중 학문적 활동 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시사점을 논의하고, 연구 한계점을 제시하였 다.
        57.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을 이루기 위해 외국에 유학갈 수가 없었으며, 자신의 연구업적을 외국 학자들에게 알리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이나 인도의 승려들이 삼국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하였고, 신라의 승려들도 중국이나 인도까지 유학하였다. 고려 때에도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며, 고려 학자들이 북경 만권당에서 원나라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학자들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진암(眞菴) 이병헌(李炳憲, 1870-1940)은 시대가 바뀌면 학문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강유위(康有爲)에게서 공자교(孔子敎)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학문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다섯 차례나 중국을 드나들었다. 조선왕조와 청나라가 모두 망한 20세기초에 주로 활동한 학자이기에 쇄국시대인 조선후기 학자들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교통과 통신이 발전한 20세기초에도 이병헌만큼 열심히 국제화에 앞장선 학자는 많지 않았다. 이병헌의 아들 이재교(李在敎)도 아버지 이병헌의 학문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케임브리지대학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된 한국 고서 가운데 ‘Wade collection 5종’, ‘Aston collection 17종’, ‘선교사들이 기증한 초기(1890-1901) 성경 collection 62종’ 외에 수집 경로가 분명한 책은 이재교가 1959년에 영어 편지와 함께 기증한 『역경금문고통론(易經今文考通論)』 1종 뿐이다. 이 책 안에는 이재교가 도서관에 보내는 편지 이외에, 이재교가 지은 「경고유교연구동지(敬告儒敎硏究同志)」라는 글도 들어 있었다. 이병헌이 「읍고조선십삼도유림동포(泣告朝鮮十三道儒林同胞)」와 「경고역내동포유림(警告域內同胞儒林)」이라는 글을 써서 자신의 학문을 조선 유림들에게 널리 알렸는데, 이재교도 같은 방식으로 외국 학자들에게까지 편지를 보내어 공자금문경학(孔子今文經學)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려고 애썼다.
        58.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眞庵 李炳憲은 조선말기의 개혁적 유학자다. 본래 俛宇 郭鍾錫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의 개혁을 통한 구국에 뜻을 두고 중국 강유위의 제자가 되어 今文經學을 공부하고 孔子敎운동을 전개했다. 西歐文物이 밀려들어오고 日本의 침략 마수를 뻗기 시작하던 19세기 후반기에 태어나 儒敎가 급속도로 망해가고 우리 傳統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도하며 성장하였다. 그래서 유교를 復原할 수 있는 방안으로 유교를 종교화 하여 孔敎라 이름하고, 孔子를 敎祖로 삼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교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今文經學을 공부하였다. 그는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교라고 확신하였는데, 그 유교는 우리 나라에 두루 퍼져 있는 宋學이 아니고 孔子의 가르침을 원래 모습인 孔敎였던 것이다. 유교가 개혁을 통해서만 민족을 이끌 수 있고 전통문화를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孔敎運動은, 培山書堂에 文廟를 지어 孔子를 享祀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아 실제로는 크게 확산되지 못 했다. 시대변화에 무관심한 保守儒林들의 악랄한 반발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 했다. 그런데도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한 평생 孔敎運動에 헌신하였다. 비록 그의 孔敎運動은 성공을 거두지 못 했지만, 그는 韓國儒敎史上 가장 독특한 유학자요 사상가요 종교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저서를 남겨 그의 유학사상을 수록했는데, 이는 韓國思想史에 새로운 경지를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康有爲의 大同思想을 바탕으로 華夷觀을 극복하고 四海同胞主義를 제창하였고, 變法自疆에 의한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민족의 自矜心을 고취하였다. 그는 孔敎運動을 통해 우리 민족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韓國學述史上 본격적인 今文經學者이다. 또 今文學에 바탕하여 儒敎經典을 재해석하여 『易經今文考』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는 韓國經學史上 독특한 업적이다. 朱子學 일변도의 한국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적 유림들의 극렬한 반발 아니라 해도, 급속하게 변하는 시대조류에 孔敎를 통한 儒敎의 復原과 民族의 自尊의 추구가 실효를 거두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무튼 眞庵은 많은 儒學者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창적인 학자고, 금문학을 도입한 특이한 학자고, 서양의 학문도 선구적으로 상당히 이해하였으며 당시 중국 사정이나 학계의 동향을 가장 잘 아는 학자였다. 일본과도 무조건적인 투쟁이 아닌 설득을 통하여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59.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紫雲 李宜翰(1692~1766)의 삶과 학문경향에 대해 조명한 것이다. 18세기 밀양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의한은 평생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향촌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處士型 학자이다.그는 碧珍將軍 李忩言(858~938)으로부터 내려오는 학문과 문학, 그리고 절조와 의리를 중시하는 家學的 전통을 계승하고, 나아가 嶺南學統의 큰 주류인 葛庵-大山의 학통과 寒岡-眉叟 학통을 계승한 近畿南人의 학통을 兼攝하여 자기 나름의 학문세계를 추구하였다. 그 결과 그는 젊은 날에 관심을 가졌던 文章學에서 50세를 전후하여 爲己之學으로 학문의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론 性理學에 치중하기보다 일상적인 삶속에서 자신이 배운 학문을 실천하는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집에는 마음의 수양과 관련한 글이 없지 않지만, ‘當世의 文衡’으로 평가를 받았던 만큼 公的이고 실용적인 문장을 다수 창작하였다. 이는 이의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밀양 지역의 鄕風 振作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지역의 대표적인 학자로서의 소임과 책무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었다.
        60.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竹坡 李而楨(1619∼1679)은 밀양 사람이다. 그의 학맥은 金宗直으로부터 시작하여 寒岡 鄭逑, 그리고 부친의 가학과 處士 鄭寔을 거쳐 장인이면서 스승인 朴壽春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미수가 탐방하여 만난 적도 있다.그의 스승인 박수춘은 『소학』의 규범을 따른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火旺城 전투에 참가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조직하여 청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 같은 스승 박수춘의 행적은 죽파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그의 장형은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서울에 온 동생이 갑자기 죽자 벼슬할 생각을 끊고 낙향한다. 그리고 죽파가 41세 되던 해인 1659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48세인 1666년에 모친상을 겪었다. 밀양에 살고 있던 죽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예림서원 移轉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 전기만 하더라도 점필재는 경상좌도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며 정치가로 중앙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경상우도에서는 남명과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학통이 중앙정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파가 활동하던 시기는 인조반정 이후로 당쟁이 점차 격화되기 시작했고, 예림서원의 이전은 죽파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다만 예림서원 이건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어 차후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당시 밀양에서 김종직은 탄생하였고 禮林書院에서 제향되었다. 죽파는 예림서원 이전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634년(인조12)에는 죽파의 아버지인 泗濱 李繼胤이 여헌 張顯光(1554∼1637)에게 서원이전과 神座配享에 자문하고 죽파는 밀양부사 이유달에게 「예림서원이건정문」을 올려서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새터로 옮기고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점필재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迂拙齋 朴漢柱는 東壁, 松溪 申季誠은 西壁에 배향하면서 간송 조임도가 「이건고유문」을 죽파는 「예림서원이건기��를 짓는다. 1652년(효종3) 예림서원 講堂을 증축할 때 밀양부사 김응조를 대신하여 죽파는 「예림서원강당상량문」을 짓는다. 1669년(현종10)에 예림서원에 賜額이 내려진다. 하지만 1678년(숙종4)에 講堂에 화재가 난다. 그리고 죽파가 운명하고 나서 1680년(숙종6)에 廟宇에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位版이 타버린다. 이에 다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 중건하게 된다. 1658년 미수가 죽파를 만난 것은 부친상을 당하고 여막에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수가 예림서원에 와서 목격한 것은 墓碣과 石床, 華表, 神道碑, 松溪閭表碑이다. 예림서원에 배향된 분은 점필재 김종직, 송계 장현광, 우졸재 박한주인데, 미수는 밀양에 와서 송계의 여표비를 언급하고 있지만 우졸재 박한주의 여표비는 언급하지 않았다. 『죽파집』의 「迂拙子朴先生閭表碑事呈道伯文」를 보면 여표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 있다. 아마 미수가 예림서원을 다녀간 후 우졸재여표비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다만 여표비는 현종 16년에 건립된 것으로 迂拙齋實記의 年譜에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죽파가 道伯에게 올린 글의 관련성은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죽파는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향촌사회에서 기여하는 것이 컸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인명 피해가 나고, 풍속이 무너지자 명나라 丘濬(1420-1495)의 『家禮儀節』과 우리나라 선현의 설을 엮어『家禮節要』를 편찬하고 제사를 勸勉한 일이 있다. 「鄕約立議序」를 써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藍田의 呂氏 향약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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