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한국 근대 시기 한자자전에 [華]로 표기된 한자의 유형과 특징을 분석 하여 [華]로 표기된 한자가 무엇을 의미하고 그 속에 포함된 한자의 원류를 찾아 [華]로 표기된 한자의 속성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한국 근대 시기에 출판된 자전석요(字典釋要)(1909), 한선문신옥편(漢鮮文新玉篇)(1913), 자 전대해(字典大海)(1913), 자림보주(字林補註)(1924) 등의 한자자전을 중심으로 [華] 로 표기된 한자의 데이터를 추출하고, 추출된 한자의 유형과 특징을 살피면서 [華]로 표기된 한자의 전거(典據)를 확보하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華]로 표기된 한자의 원류를 파악하고 이 한자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사용되는지를 살펴서 한국 근대 시기 한자자전에 [華]로 표기된 한자의 속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당시 사용된 한자의 실태와 역사적 변천사의 재구를 실현함으로써 언어 문자학사와 지성사의 연구는 물론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토대 연구가 가능하도록 할 것이다. 아울러 한자문화권의 주요 국가인 중국과 일본 등 같은 성격의 자료 비교를 통해서 당시 사용된 한자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This paper i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modernity of the Cold War, examining and analyzing two works of Korean Chinese novels in the 1960s, “A different kind of feeling in my mind”(bie you yi fan zi wei zai xin tou) and “Yantai Story”(yan tai feng yun). Both of these two works show how Hanwha looked for self-coordinates in the changing times during the Cold War period. ‘What is the modernity’ is the dialectical issue in these novels. How do them reflect the issue from the social reality, transnational movement, utopian imagination? When modernity brings about changes in regional movement, cultural convergence, military technology, and economic activities, how do them imprint on the Korean Chinese? The overseas Chinese education policy that was born in response to the Cold War was not only a means for the regime to recruit overseas Chinese in the form of education subsidies, but also an opportunity for overseas Chinese to move across borders, engage in new trade patterns, and produce unique commodity cultures. On the other hand, when the war broke out, the confrontation between regimes became a fact. Korean Chinese learned the way of imagining China in popular novels and created an ideal utopia by this. Although it exists in the past time and space, it also embodies the helplessness of reality.
The Korean Legation in Washington, D.C., is a proof that Emperor Kojong of Chosun Dynasty tried to establish relationship with the U.S. in 1891, that was before the declaration to establish Korean Empire. In that sense, the building is a historic place. The legation building is a symbolic place attesting to the turbulent history at the time of 1890 to 1910, when Korea had to suffer the forced treaty with Japan in 1905 and the annexation into Japan, and then to the 20th century up to the present time, 2014. The legation building can be turned into a space to host well-planned exhibits to show Korea's history and culture to local residents, foreign visitors to Washington, D.C., and overseas Koreans. The followings are the basic principles for the future use of the legation in line with the basic direction. The building's use should not be limited to museum, but should be flexible to accommodate various different practical usage. It is necessary to make the Korean Legation building that can incorporate the characters and the history through modern interpretation of the historicity of the place, the Korean culture, and historical events. The future usage of the Korean Legation building should enhance the value as a cultural heritage by linking the interpretation of the historical events and real life shown through exhibits, performance and people.
이 논문은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이‘금사자(황금으로 만 든 사자)’를 비유로 삼아 연기사상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설명 했다. 설명하는 방법은『화엄금사자장』을 번역하고 소개함과 동시에 화엄에서 바라보는‘법계연기사상’에 대하여 해설했다. 이 과정에서 『화엄법계관문』의 관계를 설명하며‘사사무애법계관’을 인용하여 연 기사상에 대한 설명을 부연하였다. 더불어 필자는 여러 저술 속에서 바탕으로 한‘법성철학’이라는 신(新)개념을 주장, 논증했다. ‘법성철학’의 신(新)개념체계는『대승기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대승기신론』일심(一心)의 본질, 그중 진여적(眞如的) 속성은‘묘유 (妙有)’하고 진공(眞空)하다. 법성은‘진공이면서도 묘한 방식으로 존 재하는 것’이다. 『화엄금사자장』은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장들은 서로 병렬관계를 가진다. 금의 바탕을 변하지 않는‘진여(참 마음)’라고 보 고, 사자의 형상을‘인’과‘연’이 만나 생기고 사라지는‘생멸’의 상 태로 본다. 이런 수많은‘연’들은 쉼 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연기로 영원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공’을 알아야 하 고, ‘색’을 떠나‘공’이 별도로 실재한다 생각해서도 안 된다. 또한 금사자는 황금만을 노리는 도둑에게는 (사자의 형상은 없이)오로지 금으로만 보이고, 조각가 등 예술가에게는 (순금이 없이)오로지 사자 의 형상에만 쏠린다. 어디에 눈을 파는가에 따라‘드러나고’,‘ 숨고’ 를 하며 중중 무진으로 연기한다. ‘숨고’‘드러나는’본질적구조로인해서,‘ 진여’가움직이면, 그에 수반하여‘무명’도 따라서 움직인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마음의 작 용’속에는‘진(眞)’과‘망(妄)’이 혼융되어 있다. 결국은‘무명’쉬어 야하는데,‘ 무명’쉬게하려는것도역시‘마음의작용’이다. 결국은 ‘무념(無念)’해야 한다는 것이다.
隱 權平鉉은 19세기 끄트머리인 1897년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인 1969년까지 살면서 평생 한문지식인으로 자처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일제 식민지기를 거치고 다시 한국전쟁을 겪는 그야말로 평안한 날이 없는 날들이었다. 또한 그가 학문에 입문할 시기는 한문폐지론이 일었고, 儒學은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문-유학을 자신의 학문으로 선택했고, 栗谷 李珥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특히 율곡의 四七說에 대한 독실한 믿음은 그와 다른 그 어떤 논의도 수용하지 않았다.
화은의 삶과 학문은 주변이나 시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긴 바를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간 그의 강인한 정신의 징표이다. 그는 성현의 도를 지키는 것이 시대 변화를 追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비록 과거의 문자와 학문으로 전락한 한문과 유학이지만 거기에 새로운 미래를 위한 답이 있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예컨대 陰이 가득하면 반드시 陽이 다시 차오르는 이치와 같이 조국의 광복도 그런 이치 속에 이루어질 것이라 그는 믿었다. 그러나 그의 삶과 학문적 태도를 時宜라는 점에서 보면 아쉬움이 없지 않다. 하지만 철저하게 성현의 말씀을 따르고 체현하려 노력했던 20세기 마지막 유학자의 모습은 개인의 이익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이 행동을 바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