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1903년에 발행된 「일로청한 명세신도」에 나타난 일본인들의 독도에 대한 인식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먼저 이 지도를 편찬한 ‘제국 육해 측량부’가 육군 측량부와 해군 수로부의 측량과가 임시로 합해진 기구로 보고, 이 지도를 국가기관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상정하였다. 그리고 그 제작의 목적은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전략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또 한 ․일 간 동해안에서의 경계선 획정에서 독도에 해당되는 송도를 한국의 동단(東端)으로, 일본은 오키도를 서단(西端)으로 하여 같은 거리에 경계선을 그으면서, 그 사이에 공해를 설정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사람들이 러일전쟁의 발발 이전에는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로 간주하였다.
본 연구는 일본 제국주의의 1905년 독도 침탈의 직접적 동기가 러·일전쟁 도중 일본 해군이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수뢰 설치와 순양 활동을 탐지하기 위해 해군 望樓(watchtower)를 설치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에 있었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고찰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을 병탄하여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러·일전쟁 도중에 해전에서 ‘함포’만이 아니라 ‘기뢰’ 부설 폭파전이 매우 중요하게 되자, 대함대의 이동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규모 수뢰정(水雷艇)의 기뢰설치 활동 감시가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둘째, 일본 해군이 대한제국 영토인 韓半島 海岸과 중요 섬들에 무려 20개소의 해군 望樓를 설치한 것은 러시아 해군은 전혀 갖지 못하고 일본 해군만 갖춘 것이었다. 이것은 러·일戰爭의 海戰에서 地利를 일본해군만 독점한 것이었고, 만일 러시아 해군이 이 영역 안에서 ‘해전’을 하는 경우 완전히 ‘감시망’ 안에 놓여 기습 섬멸당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일본 해군이 독도 망루 설치 계획을 세우고 군함을 파견하여 부지 조사를 실시하던 시기에, 1904년 9월 일본 어업가 나카이(中井養三郎)가 한국영토인 독도(리앙쿠르 도)의 강치잡이 독점권을 독도 소유권자인 대한제국 정부에 선금을 내고 임대(賃貸)받으려고, 그 교섭 절차를 문의하러 동경(東京)에 상경해서 농상무성 국장을 상면하였다. 이 때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카이(中井)가 여러 차례 확인한 정확한 사실이었다.
넷째, 나카이(中井)는 1903년에 처음으로 독도에 들어가서 며칠간 강치잡이를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카이(中井)가 무주지(無主地)를 선점(先占)한 것이 전혀 아니라, 한국영토인 독도에 나카이가 한국영토임을 인지하면서도 허가 없이 불법으로 들어가서 시험적으로 강치잡이를 해본 것이었다. 나카이는 이때 ‘독도 강치잡이’가 막대한 이익이 있는 좋은 사업임을 확인하였으며, 다른 일본 어부들도 독도에 들어와 不法으로 강치를 남획하는 것을 보고, 독도 소유권자인 한국정부에 사전 임대료를 내고 합법적으로 강치잡이 기한부 독점권(獨占權)을 얻어서 큰 수익을 내려고 계획하여 상경해서 일본 정부 농상무성 관계자와 상담한 것이었다. 다섯째, 일본 정부 농상무성 수산국장 마키 보쿠신(牧朴眞)은 독도가 한국영토이고 시기가 러·일전쟁 중이므로 나카이를 해군성(海軍省) 수로부장 기모츠키 가네유키(肝付兼行, 해군소장)에게 보내어 자문을 구하도록 소개하였다. 기모츠키(肝付)는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섬이며, 한국영토임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 증거는 기모츠키가 거의 일생을 일본 해군성 수로부에서 근무하고 수로부장도 10년을 했는데, 그는 독도(리앙쿠르 도)를 일본 수로부가 수시 간행하는 日本水路誌 서북해안에 단 한 번도 넣지 않고 수시 간행하는 朝鮮水路誌에 반드시 넣은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일본 내무성은 1876년 지적편찬 사업 때 동해 가운데 ‘울릉도와 그 외 1도 독도(우산도)’는 일본과 관계없는 조선영토임을 정밀한 조사 결과와 太政官(총리대신부)의 훈령으로 이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카이(中井)의 영토편입 청원서를 무리하게 접수 실행하면 한국정부가 항의하고 세계 여론이 비등하여 일이 결코 용이하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각하시키려 한 것이다. 일곱째, 나카이(中井)는 자기의 큰 이익이 무산되려 하므로 낙망하여 외무성으로 달려갔다. 외무성 정무국장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郞)는 이미 해군성 수로부장의 공작 연락을 받고, 러·일전쟁 중인 지금 시국이야말로 리앙쿠르 도(獨島) 영토 편입을 긴급 요구하고 있다고 나카이를 선동 격려하였다.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설치하고 해저전선을 부설해서 적 러시아 함정을 감시하는 것이 절대 필요한데,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 청원하는 것은 전쟁 승리의 애국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선동하였다. 또한 야마자(山座)는 일본군이 한국을 점령하고 황제를 지배하고 있으므로 내무성에서 고려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하고, 급히 영토편입 청원서를 일본정부 외무성에 제출하라고 독려하였다.
여덟째, 한국 영토 독도를 침탈하여 일본 영토로 편입시키는 건에 대하여 해군성은 공작 조종하고, 농상무성은 찬성하고, 내무성은 반대하므로, 그 최종 조정과 결정은 영토 담당부서인 총리부(總理大臣府)의 몫이 되었다. 아홉째, 그러나 일본정부의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의 이 결정은 다음과 같은 이유와 내용이 거짓이어서 국제법상 전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열째, 일본 정부는 1905년 7월 28일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잘 알면서도 군사적 목적으로 독도를 침탈하여 일본 영토에 편입하는 결정을 한 다음, 이를 ‘국제고시’하지 못하는 고민에 빠졌다. 당시 국제법은 무주지(無主地)일 경우라도 선점하여 영토 편입할 때에는 반드시 그 무주지의 사방 주위 국가에게 사전 조회하거나 반드시 국제고시하여 다른 의사 또는 反對 의사가 없는가의 여부를 질문해서, 이의(異議)가 없어야 함을 전제와 관행으로 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 정부가 한국 영토 독도(于山島)를 침탈해 놓고 간지(奸智)를 발휘하여 이를 사실상의 ‘비밀(秘密)’로 처리했기 때문에 1905년 1월~2월 당시에 대한제국 정부와 국민은 이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와 국민뿐 아니라 일본제국의 정부 기관과 국민도 극소수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 증거는 당시 일본 최대의 출판사 박문관(博文館)이 러·일해전의 승리에 기뻐서 1905년 6월에 출판한 유명한 日露戰爭實記의 지도에 독도(리앙쿠르 도)를 여전히 한국영토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이 허약한 틈을 노리고 한국영토 독도를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한국정부와 국민 몰래 1946년 침탈했다가 1946년 1월 연합국이 반환한 것을, 오늘날 현대 일본 정부가 자기 영토라 주장하면서 다시 독도를 침탈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구 일본 제국주의를 계승하여 한국을 재침략 시도하는 것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한국정부와 국민은 더욱 단호하게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일본 제국주의의 1905년 독도 침탈의 직접적 동기가 러·일전쟁 도중 일본해군이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수뢰 설치와 순양 활동을 탐지하기 위해 해군 望樓(watchtower)를 설치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에 있었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고찰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을 병탄하여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러·일전쟁 도중에 해전에서 ‘함포’만이 아니라 ‘기뢰’ 부설 폭파전이 매우 중요하게 되자, 대함대의 이동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규모 수뢰정(水雷艇)의 기뢰설치 활동 감시가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둘째, 일본 해군이 대한제국 영토인 韓半島海岸과 중요 섬들에 무려 20개소의 해군 望樓를 설치한 것은 러시아 해군은 전혀 갖지 못하고 일본 해군만 갖춘 것이었다. 이것은 러·일戰爭의 海戰에서 地利를 일본해군만 독점한 것이었고, 만일 러시아 해군이 이 영역 안에서 ‘해전’을 하는 경우 완전히 ‘감시망’ 안에 놓여 기습 섬멸당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일본 해군이 독도 망루 설치 계획을 세우고 군함을 파견하여 부지 조사를 실시하던 시기에, 1904년 9월 일본 어업가 나카이(中井養三郎)가 한국영토인 독도(리앙쿠르 도)의 강치잡이 독점권을 독도 소유권자인 대한제국 정부에 선금을 내고 임대(賃貸)받으려고, 그 교섭 절차를 문의하러 동경(東京)에 상경해서 농상무성 국장을 상면하였다. 이 때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카이(中井)가 여러 차례 확인한 정확한 사실이었다.
넷째, 나카이(中井)는 1903년에 처음으로 독도에 들어가서 며칠간 강치잡이를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카이(中井)가 무주지(無主地)를 선점(先占)한 것이 전혀 아니라, 한국영토인 독도에 나카이가 한국영토임을 인지하면서도 허가 없이 불법으로 들어가서 시험적으로 강치잡이를 해본 것이었다. 나카이는 이때 ‘독도 강치잡이’가 막대한 이익이 있는 좋은 사업임을 확인하였으며, 다른 일본 어부들도 독도에 들어와 不法으로 강치를 남획하는것을 보고, 독도 소유권자인 한국정부에 사전 임대료를 내고 합법적으로 강치잡이 기한부 독점권(獨占權)을 얻어서 큰 수익을 내려고 계획하여 상경해서 일본 정부 농상무성 관계자와 상담한 것이었다. 다섯째, 일본 정부 농상무성 수산국장 마키 보쿠신(牧朴眞)은 독도가 한국영토이고 시기가 러·일전쟁 중이므로 나카이를 해군성(海軍省) 수로부장 기모츠키 가네유키(肝付兼行, 해군소장)에게 보내어 자문을 구하도록 소개하였다. 기모츠키(肝付)는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섬이며, 한국영토임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 증거는 기모츠키가 거의 일생을 일본 해군성 수로부에서 근무하고 수로부장도 10년을 했는데, 그는 독도 (리앙쿠르 도)를 일본 수로부가 수시 간행하는 日本水路誌 서북해안에 단 한 번도 넣지않고 수시 간행하는 朝鮮水路誌에 반드시 넣은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일본 내무성은 1876년 지적편찬 사업 때 동해 가운데 ‘울릉도와 그 외 1도 독도(우산도)’는 일본과 관계없는 조선영토임을 정밀한 조사 결과와 太政官(총리대신부)의 훈령으로 이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카이(中井)의 영토편입 청원서를 무리하게 접수 실행하면 한국정부가 항의하고 세계 여론이 비등하여 일이 결코 용이하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각하시키려 한 것이다. 일곱째, 나카이(中井)는 자기의 큰 이익이 무산되려 하므로 낙망하여 외무성으로 달려갔다. 외무성 정무국장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郞)는 이미 해군성 수로부장의 공작 연락을 받고, 러·일전쟁 중인 지금 시국이야말로 리앙쿠르 도(獨島) 영토편입을 긴급 요구하고 있다고 나카이를 선동 격려하였다.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설치하고 해저전선을 부설해서 적 러시아 함정을 감시하는 것이 절대 필요한데,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 청원하는 것은 전쟁 승리의 애국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선동하였다. 또한 야마자(山 座)는 일본군이 한국을 점령하고 황제를 지배하고 있으므로 내무성에서 고려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하고, 급히 영토편입 청원서를 일본정부 외무성에 제출하라고 독려하였다.
여덟째, 한국 영토 독도를 침탈하여 일본 영토로 편입시키는 건에 대하여 해군성은 공작 조종하고, 농상무성은 찬성하고, 내무성은 반대하므로, 그 최종 조정과 결정은 영토 담당부서인 총리부(總理大臣府)의 몫이 되었다. 아홉째, 그러나 일본정부의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의 이 결정은 다음과 같은 이유와 내용이 거짓이어서 국제법상 전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열째, 일본 정부는 1905년 7월 28일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잘 알면서도 군사적 목적으로 독도를 침탈하여 일본 영토에 편입하는 결정을 한 다음, 이를 ‘국제고시’하지 못하는 고민에 빠졌다. 당시 국제법은 무주지(無主地)일 경우라도 선점하여 영토편입할 때에는 반드시 그 무주지의 사방 주위 국가에게 사전 조회하거나 반드시 국제고시하여 다른 의사 또는 反對의사가 없는가의 여부를 질문해서, 이의(異議)가 없어야 함을 전제와 관행으로 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 정부가 한국 영토 독도(于山島)를 침탈해 놓고 간지(奸智)를 발휘하여 이를 사실상의 ‘비밀(秘密)’로 처리했기 때문에 1905년 1월~2월 당시에 대한제국 정부와 국민은 이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와 국민 뿐 아니라 일본제국의 정부 기관과 국민도 극소수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 증거는 당시 일본 최대의 출판사 박문관(博文館)이 러·일해전의 승리에 기뻐서 1905년 6월에 출판한 유명한 「日露戰爭實記」의 지도에 독도(리앙쿠르 도)를 여전히 한국영토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이 허약한 틈을 노리고 한국영토 독도를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한국정부와 국민 몰래 1946년 침탈했다가 1946년 1월 연합국이 반환한 것을, 오늘날 현대 일본 정부가 자기 영토라 주장하면서 다시 독도를 침탈하려고 시도하는것은 구 일본 제국주의를 계승하여 한국을 재침략 시도하는 것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한국정부와 국민은 더욱 단호하게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1905년 독도의 불법적 영토편입을 시작으로 일본의 대한제국의 영토주권에 대한 전면적 침탈은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과 직접적 관련성을 갖는다. 이 글은 우선 국제법적으로 러일전쟁의 발발과정에서 대한제국의 제물포사건이 갖는 의미, 전쟁개시 시점 그리고 국제법상 일본의 전쟁선포행위가 합법적인지에 대해 검토하였다. 러일전쟁의 개시 시점에 대하여는 일본 해군이 중국 뤼순 항구에 정박 중인 러시아함대에 대한 무력공격을 도발한 1904년 2월 8일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글에서는 러일전쟁의 발발과정 특히 대한제국의 영해인 제물포 앞바다 사건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일본이 러일전쟁의 개전 일자를 일본 해군이 전쟁수행을 위해 사세보항구를 출항한 2월 6일으로 주장하는 이유가 일본이 전시국제법을 위반하여 러일전쟁을 시작하였음을 은폐하려는 의도임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 이 글은 일본이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으로 인정받게 된 근거와 러일전쟁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이 유럽국가인 러시아가 아닌 일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하기 위해 일본 지식인들과 관료들의 유럽과 미국에서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러일전쟁을 통해서 일본이 국제사회에 강대국으로 등장했다는 인식과 다르게 일본은 러일 전쟁이전에 유럽의 소수국가와 미국이 중심이 된 제국주의국가들의 국제클럽(international club)에 의하여 아시아에서 유일한 소위 문명국(civilized state)으로 인정되어 있었으며,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한제국과 만주의 패권을 놓고 벌인 소위 문명국 간의 전쟁이었다.
세 번째, 러일전쟁의 발생 이전에 국제법상 중립(neutrality)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영토 주권이 어떠한 이론적 배경에서 일본에 의하여 무시되고 침해당하였으며 미국과 영국 등 당시 국제사회를 주도하던 국가들은 왜 이를 묵인하였는지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한일 간에 체결되어 있던 조약들은 어떻게 양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었는지를 분석해 보았다. 이와 함께 일본의 대한제국 흡수행위의 근거가 된 소위 국제클럽 구성 국가들의 낙후지역(backward territory)이론의 문제점에 대하여도 살펴보았다.
1904년, 일본해군은 러일전쟁 개전 때부터 러시아 여순(旅順)함 대 공략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 블라디보 함대가 가령 방비가 약한 홋카이도(北海道)를 위협해도 쓰가루해협 (津軽海峡)을 경비하는 정도로 하고, 오타루(小樽) 등은 그들의 마 음대로 시켜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예측대로 개전하자 마자 블라디보함대는 쓰가루해협 근처로 출격해 상선을 격침하였 다. 이 때문에 홋카이도 마쓰마에 주민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한편 강원도 원산에서는 블라디보함대에 의해 수송선 긴슈마루 (金州丸) 등이 격침당하고 198명이 포로로 되는 등 피해가 컸으며, 일본해군은 블라디보함대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서 일본해군은 러시아의 의도대로 여순에서 가미무라(上村) 제2함 대를 빼고 블라디보함대 대책으로 충당하였다.
한편 강원도 원산에서는 블라디보함대에 의해 수송선 긴슈마루 (金州丸) 등이 격침당하고 198명이 포로로 되는 등 피해가 컸으며, 일본해군은 블라디보함대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서 일본해군은 러시아의 의도대로 여순에서 가미무라(上村) 제2함 대를 빼고 블라디보함대 대책으로 충당하였다.
일본해군은 머지않아 블라디보함대가 남하해 대한해협,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군 보급로를 위협할 것을 예상하고, 동해에서의 적함 감시 체제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이 일환으로 영일만, 울릉도, 독도에 망루를 세우고, 울릉도에는 무선전신소를 두고 독도 망루 와 해저전선으로 연결할 방침을 세웠다.
그즈음 여순에서는 일본 전함 2척이 기뢰에 건드려 침몰해 전력 이 저하하였다. 이를 계기로 블라디보함대는 쓰시마해협에 출격해, 방심하고 있었던 일본 수송선 히타치마루(常陸丸), 이즈미마루(和泉丸) 등을 격침해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더 나아가 블라디보함대는 대담하게도 쓰가루해협을 지나서 도교(東京)만 앞 바다까지 출격해, 각지에서 전략물자 등을 운반하는 상선을 격침 하였다. 함대의 출격 목적은 미국으로부터 가져오는 200만 파운드 의 전비를 노린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블라디보함대의 종횡무진의 활약도 울산 앞바다에서의 해전으로 끝이 났다. 순양함 1척을 잃고 나머지 2척은 손상을 입었다. 그러 나 블라디보함대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유럽에서 러시아 발틱함대가 제2태평양함대로 재편돼 극동으로 파견될 예정 이다. 일본군은 동해에 있어서 적함 감시 체제의 강화를 서둘렀다. 울릉도에는 망루 2개소가 설치되고 경상북도 죽변에 해저전선으로 연결되었다.
이 무렵 오키에 사는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郎)로부터 ‘리양코도 영토편입 및 임대 청원서’가 제출되었다. 내무부는 리양코도가“한국 영지로 의심 된다”고 해 반대하였다. 이에 반 해 외무성 야마자 엔지로(山座圓二郎)는 오히려“시국이야말로 그 영토편입이 긴요하다”고 나카이에게 청원서를 외무성에 회부하도 록 지시하였다. 야마자는 독도의 군사적 가치 및 열강국간의 파워 포리틱스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의견이 중시되어 독도 는 1905년 2월에 일본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해 5월 27일에 발틱함대는 쓰시마해협을 통과하자 일본 연합 함대와 격돌하였다. 결과는 일본군의 대승리였다. 다음 날 북쪽으 로 도망가려던 러시아 주력 함대는 울릉도・독도 근처에서 일본군 에게 대패해, 지휘관은 항복하였다. 독도해역은 발틱함대의 종언의 바다로 되었다. 이 해전의 결과 울릉도・독도의 군사적 가치는 더높아지고 울릉도 동북부에 망루가 1개소, 독도에 1개소 세워졌 다. 이것으로 동해에서의 적함 감시의 공백 지대는 해소되었다.
이 글은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점취한 목적과 과정을 구명함으로써 그들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입증하려는 시도이다. 즉 일 본이 이 두 섬을 점취한 목적이 러일전쟁,특히 러시아 발틱함대의 내도(來到)에 대비하기 위한 기지확보용(基地確保用)이었음을 증명, 이것이 차이로 선언 위배행위였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독도편입은 러일전쟁 수행을 위한 일본정부의 대비책이 었다. 1904년 5월 15 일을 전후하여 일본해군이 여순항에서 최신예 해군전력의 약 3분의 1을 한꺼번에 상실하자, 그들은 우선 울릉도가 갑자기 필요하게 되었다. 망루를 설치하는 방법 이외에 전력을 보충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군은 죽변과 울릉 도에 망루 건설을 시작하여 8월과 9월에 각각 완공했다. 이어 해군 군령부는 9월 25 일 독도 망루 설치를 위한 조사를 명령했다. 그러자 내각은 불과 4일 뒤인 9월 29 일 나까이를 시켜 ‘리양코도 영토 편입원’을 제출케 했다. 독도점취를 위한 대부분의 조치가 집중적으로 취해진 시기는 도고가 군령부장의 명령에 따라 동경에 체류한 5주간(1904.1 2.30 - 1905.2.6) 의 일이었다. 독도 영토 편입고시는 도고의 엄전 태세 완비 선언 (2.2 1)에 이어 바로 이튿날(2 .22) 이루어졌다. 그 방법도 열강 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시마네 현이라는 일 지방관청의 관내고시로 처리했다. 당시는 미국이 일본의 과도한 승리를 우려하여 러시아 대신 일본에 대한 견제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 사실이 엄연한 이상 어떤 논리로도 독도영토편입과 러일 전쟁과의 관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쟁에는 ‘폭력’과 ‘탐욕’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일본의 독도점취가 차이로 선언의 규제 대상 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