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펜데믹 이후 중단되었던 대규모 페스티벌들이 다시 재개되고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과 덴마크의 로스킬데 페스티 벌, 영국의 글래스토버리 페스티벌 등이 성공적으로 개최되었 다. 세계적인 문화콘텐츠들이 기술과 창의성의 융합으로 기술적 진보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접목하여 흥행을 이루고 있다. 또 한 새로운 소비집단의 대두와 니즈가 나타나고 AI감성 마케팅 과 같은 전략이 필요하다고 예상된다. 한국의 K-pop, 드라마, 영화 등 한류 콘텐츠의 전 세계적 확 산으로 한국의 문화콘텐츠 문화산업이 경제뿐만 아니라 인류 행복에 미치는 영향력은 증대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국의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과 프랑스 니 스카니발의 문화축제콘텐츠를 비교하여 두 축제의 문화 원형적 구성요소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각 축제의 문화적 특성과 차 이점을 밝혀 성공적인 한국의 문화축제콘텐츠의 방향성을 제시 하는 것을 목적을 두고 있다. 두 축제는 각국의 전통적 문화유산을 기반으로 하여 현대적 으로 재해석된 대표적인 사례로, 문헌 연구와 사례 분석을 통 해 수행되었으며, 두 축제 모두 전통적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글로벌 관객에게 어필하는 독창적인 문화콘텐츠로 발전해 왔음 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K-문화콘텐츠를 발전시키고 문 화융합페스티벌의 한 장르가 생겨날 계기가 될 것이다.
문화원형은 전통문화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한 사회의 주 요한 행동양식이나 상징체계를 문화라고 한다면 문화원형은 민 족 또는 지역의 특징을 잘 담고 다른 것과 구별되는 원래모습 에 해당되는 문화라 할 수 있고 전통문화는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사회의 관습이나 행동양식 등을 일컫는다. 문화원형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는 ‘한국적인 정체성, 나아가 고유성 을 가진 문화에 대한 원천자료를 지칭하는 것으로 문화원형은 콘텐츠 제작을 위한 원천소스 또는 원천자료‘라고 하였다. 문화 원형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20여년 된다. 2002년 문화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문화원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문화원형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문화원형 발굴에 대한 결과물에 치중하다보니 다양한 산업에서 원천콘텐츠로 활 용되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문화가 외국에서 인기를 얻는 한류는 우리나라의 한류(韓流)는 아시아를 넘어 국가를 초월하여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1990년대에 드라마와 영화를 시작으로 게임과 K-pop 등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전 세계인이 교감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류는 소셜미디어, OTT 플랫폼들과 결합하여 동시 다발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발굴사업을 통해 발굴된 문화원형과 그 밖에 무궁무진한 우리나라의 문화원형(Culture Archetype)에 대하여 더욱 다양해지고 있는 유통 채 널을 활용하는 등 캐릭터 콘텐츠에 대한 OSMU(One Source Multi Use)를 확보할 수 있는 접근방법론과 활용 가능성을 고 찰해 보고자 하였다. 우선 본 연구에서는 캐릭터 콘텐츠의 IP관리 체계와 OSMU 의 전개 유형을 알아보고 문화원형을 기반으로 하는 OSMU 사 례 등을 분석하여 문화원형을 기반으로 하는 캐릭터 콘텐츠의 OSMU에 대하여 전략적 관점에서 진흥방안을 제안하고자 한 다.
필자는 교차편년으로 설정된 기존의 남한 원형점토대토기문화의 연대와 출현 과정에 오류가 있음 을 발견하였다. 이에 방사성탄소연대를 이용해 기존의 견해와 다른 새로운 연대 안과 출현과정을 제 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현재 학계에 뚜렷한 견해가 없는 원형점토대토기문화의 성격에 대하여도 새로 운 시각으로 접근하여 원형점토대토기문화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남한 원형점토대토기는 BC 12세기 무렵, 비파형동검과 동시에 출현하였으며, 이후 후기 청동기시 대 송국리문화, 역삼동후기문화, 검단리문화 등과 기원전 2세기 무렵까지 장기간에 걸쳐 공존하였다. 남한 원형점토대토기문화 집단은 요동지역‘정치집단’의 이주민이 아니라 청동기시대 조기부터 형성 되어 있던‘요동-서북한-남한’의 네트워크를 통해 남한에 들어온‘청동장인집단’이다. 이들이 남겨 놓은 유적 중‘수석리유적’,‘교성리유적’등은 당시 청동의 원광석을 채광·선광했던 장소로 추정 되며,‘동학산유적’,‘방동리유적’등은 청동을 제련·주조 했던 장소로 추정된다. 이‘청동장인집단’은 재지 사회의 지배층에게 비파형동검 등의 청동기를 제작·공급해서 생계를 유지하던 기술장인들이었으나 점차 정치력을 갖게 되면서 세형동검단계에 이르러서는 당시 사회의 지 배층인‘제사장’이되고, 결국 삼한 사회의 최상위 지배층으로 성장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신석기 시대 존재했던 여성 신이 지녔던 생명력, 평등성, 포용성, 그리고 이타성의 가치와 인류 문화원형의 상징성을 파악하고 복원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자연 생태계 파괴, 전쟁, 그리고 환경 오염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다. 따라서 생명의 존엄성으로 대표되는 여신의 상징적 가치 회복은 중요한 문제이다. 생명의 가치를 대변하는 여신문화는 현대사회의 미래지향적 가치와 연결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여신문화의 회복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다양한 여신 관련 신화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제주도 여신 신화 및 문화는 신성성, 생명성, 그리고 주체적 여성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제주도의 여신문화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뿐만 아니라 인류가 상실했던 여신 원형 문화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보존 필요성이 요구되는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dentify the structure and characteristics for the reproduction of the armor in the Unified Silla period, and then reproduce and utilize it as a cultural content. In the armor reproduction project excavated from Jaemaejeong, Gyeongju. Jaemaejeong armor is consisting of Singap (身甲, body armor), Sanggap (裳甲, hip armor), and Sangbakgap (上膊甲, upper arm armor) at the time of excavation. Unlike the armor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Singap and Sanggap are separated. Singap is Yangdangsik (裲襠式, side opening method) and Gyunggap (頸 甲, gorget) was not unearthed, Sangbakgap was divided into a part that protects the left and right upper arms and a part that protects the chest, so that the unexcavated head and neck cover of the helmet can be protected to the shoulder. In addition, in the case of Chalgap (札甲, lamellar armor), the Oejungsik (外重式, folded from outside to inside) is mainly used, but it is peculiar that Naejungsik (內重式, folded from inside to outside) is used in Sangbakgap of Jaemaejeong armor. It is presumed that this was used as a method to ensure that the armor were closely attached to the human body. In order to design with the parade armor of Gochwidae in Gyeongju based on the reproduced Jaemaejeong armor, the designer’s imagination and historical work of the times were involved due to the characteristics of performance costumes. Reproduced armor as a cultural content should be considered indispensable to simplify and lighten clothing suitable for performances based on the excavated historical armor.
이 글은 인천광역시 연수구를 대상으로 최근 개발된 도심에서 불교 문화콘텐츠를 구성하는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이 글에서는 먼저 연수구의 지역적 특성을 파악하여 연수구의 문화적 원형을 정리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연수구의 불교적 문화원형을 찾는다. 이어서 이를 바탕으로 기존에 진행되고 있는 문화자원에 결합하여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구성함으로써 연수구의 불교문화콘텐츠 구성의 실례를 모색하고자 한다. 최종적으로 연수구가 신흥 개발 도심임을 상기하여 이러한 작업이 불교를 전면적으로 내세울 일이 아니라 일반 인문학의 범주에서 수용 가능한 맥락으로 구성해야 함을 밝히고자 한다.
연수구의 기본적인 문화원형인 바다와 백제를 바탕으로 인문학적 관점으로 불교문화콘텐츠를 구성한다면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국제교류가 담긴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콘텐츠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 로 송도국제도시를 품고 있는 연수구의 미래와 한국문화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바탕이 될 것이다.
한반도의 석기-금속기 전환 과정은 청동기시대 중기 후반부터 원형점토대토기 문화를 거쳐, 삼각형점 토대토기 문화까지로 말해지고 있다. 이 과정 중에서, 위신재는 석기에서 청동기로, 실용기는 석기에서 철기로 대체되었다고 이야기되며, 이러한 인식에는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삼각형점토대토기 문화까지 동일한 문화 계통, 생업경제를 영위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 고고학적 양상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구의 재질 변화는, 기존의 재질은 점차 줄어들고 새로운 재질이 점차 증가하는 ‘과도기’ 또는‘이행기’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재질이 완전히 정착되는 흐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석기에서 철기로의 변화는 그러하지 않다. 철기가 등장하기까지는 수백 년간의 시간적 공백이 존재한다. 또한 원형점토대토기 문화는 토착의 청동기시대 중기 문화와는 계통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후 삼각형점토대토기 문화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석기에서 철기로의 전환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원형점토대토기 문화이다. 즉 청동기시대 중기 에서 원형점토대토기 문화를‘석기의 감소’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니라 청동기시대 중기의 석기 기종과 수량의 풍부함과 대비되는 현상으로 원형점토대토기 문화의 석기 양상을 확인하고 그 배경을 검토해야 한다. 본고에서는 호서지방 원형점토대토기 문화의 석기 조성을 검토하고, 석기 기종 구성의 편중은 목기의 사용과 일회적인 석기 제작·사용 방식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It is identified that an initial person who built of ‘Seoul Gyedong Modernized Hanok(former Min Hyeong-gi house)’ used as ‘Bukchon Culture Center’ in present, was not Min Hyeong-gi, but his wife, Yu Jin-gyeong, and she built it when 8 years went on after his death(1879~1973), and the construction year was at the gate of Chuseok in 1921. Yu Jin-gyeong was Head Family’s Eldest Daughter-in-law in family of Yeo Heung-min who was an influential person at the late Joseon Dynasty and was widow who had only son for 3 generations. And she built this house and moved to gain daughter and live futher grandchilds together in law in new nest. It is arranged that an annex surrounds with main building as the central figure. And this house emulates Yeonkeong-dang in backyard of the Changdeok Palace for 'preservation of main building' and Chim-bang-ga-toe applied on a bedroom in a palace is applied around nobleman family's the main room. It is rare case and expresses that a palace factor is borrowed. Yu Jin-gyeong's house is that a tradition Hanok is adjusted closely in city and central and basing mode as 'protective bedding' and building concept as 'a noble and protective architecture' is realized. So it has a character that development of Hangrang architecture is appeared and Head Family’s Eldest Daughter-in-law widow of modern upper class had a special benefit. As well as, a meaning that it is experimental house based on tradition and is build of Hanok with housekeeping as the central figure for appear a form which has minimal Hangrang for housekeeping in yangban family of modern city, can be found.
이 글은 조선시대 여러 학자들이 지리산 덕산동을 유람하고 남긴 시문을 통해 지리산 덕산동의 문화원형을 발굴하여 정립하고, 주요 명소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본 논문에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하면 다음과 같다. 지리산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 국토의 남단에 크고 넓게 웅거한 鎭山이라는 의미를 넘어, 우리나라의 중심이고 남쪽 지방의 祖 宗으로 인식됨으로써 그 위상이 한층 격상되었다. 그런데다 조선 중기 도학자 南冥 曺植이 지리산 덕산동을 은거지로 택함으로써 도학자의 은거지로 자리를 잡았고, 남명 사후에는 도학의 원류가 흐르는 聖地로 인식되어 순례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지리산 덕산동의 문화원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덕산동은 山天齋를 중심으로 한 南冥의 만년 은거지로 人道를 닦아 天道에 합하 기를 구한 求道者의 大畜地이었다. 둘째, 덕산동은 德川書院이 건립된 후 남명의 학덕을 기리고 본받고자 하는 朝鮮 道學의 聖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셋째, 덕산동 중에 大源寺와 肇開谷을 경유해 天王峯에 오르는 코스는 성리학자들에게 道學의 源流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인식되어 본성을 찾아나서는 구도여행 코스가 되었다. 이 세 가지 덕산동의 문화원형은 그 문화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덕산동의 주요 名所로는 도학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南冥이 붙인 入德 門, 상류에서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내려 갓끈을 씻을 수 있는 濯纓臺, 은자의 고사가 전해지는 叩馬汀과 首陽山, 남명이 만년에 도학을 완성한 山天齋, 남명 사후 남명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德川書院과 洗心亭, 남명이 문인 吳健을 전송한 고사가 전해지는 送客亭과 오건이 술에 취해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는 고사가 전해지는 面傷村, 도의 큰 근원이 흘러나온다는 大源寺 계곡과 肇開 谷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명소는 모두 남명의 도학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어 덕산동의 문화역사적 의미를 풍부하게 해준다. 곧 이런 유적지는 남명의 도학, 조선 도학의 정신 지향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체험학습, 현장학습을 하는 데 좋은 콘텐츠를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 하고 널리 알리는 일이 지속되어 잊히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