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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세워진 젠코지(善光寺)와 그 불상의 특징을 살핀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일본의 젠코지 아미타삼존상은 백제 성왕이 전해준 일본 최초의 불상이다. 젠 코지 상에 대한 연구는 전근대기 일본의 상황을 중심으로 구미와 일본에서 여러 차례 진행되 었으나, 그 모각상이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봉안됐음은 주목되지 않았다. 이는 조선 젠코지와 그 상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유입된 일본 불교 미술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또한 백제와 일본의 미술사적 교류 사실이 근대기에 어떻게 정치적으로 해석되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논문에서는 조선에 들어온 젠코 지의 사례로 1916년에 창건된 진해 젠코지와 1942년에 승인된 공주 젠코지를 제시한 후 각각의 특징을 고찰했다. 이를 통해 첫째로 젠코지 상은 조선 내에서 그 내력이 재발견 되었 으며 이에 따라 동일한 상이 모각됨에도 모각 시기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성격을 갖게 되었음을 확인했다. 둘째로 조선에서 젠코지식 상은 나가노 젠코지의 분신으로 여겨졌으며 상의 모각이 나가노 젠코지의 엄격한 통제 하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본 논문은 이를 살핌으로써 일제강점기 조선 내 일본 불상의 연구 범위를 확장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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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3.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양 본의리 소조 불상 대좌의 제작기술은 지금까지 주로 육안관찰을 통해 해석되었다. 그러나 대좌에 존재하는 제작흔들은 상당히 미시적인 형태를 보이고, 다양한 시각적 간섭을 받아 육안이나 탁본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3차원 스캔데이 터를 기반으로 기하정보 매핑과 렌더링 기술을 적용하여 대좌의 제작흔을 입체적이고 가시적 으로 분석하였다. 본의리 대좌에 존재하는 포목흔, 지두흔, 받침모루흔, 타날흔, 접합흔, 절 단흔, 명문과 문양, 손잡이, 이음 구조 등으로 볼 때 성형-분할-건조-소성-조립의 체계적인 설계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워낙 대형의 크기를 가져 자연건조와 소성 과정 중 수축과 뒤틀림이 발생하여 실제 사용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전체적인 규모와 제작기술로 볼 때 국내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벡제 토제 기술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가시화 기술은 본의리 대좌뿐만 아니라 향후 토제 유물의 제작기법 해석에 있어 중요한 방법론으로 활용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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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7.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일본 최초기의 阿彌陀如來像에 대해서는 7세기 중반의 작품이 확인 되지만 이 시기의 阿彌陀像은 法隆寺獻納宝物144호 불상처럼 彌勒如來圖像을 차용한 倚坐像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당시 阿彌陀信仰이 彌勒信仰과 밀접하게 결합했던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7세기 말이 되 면 唐代淨土敎의 흐름을 이어가는 阿彌陀信仰을 배경으로 橘夫人念 持佛阿彌陀三尊像을 비롯한 인도식 통견・연화좌 위에서 結跏趺坐를 한 阿彌陀像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도상의 阿彌陀像은 善導流淨土敎 의 수용을 시사하고 있으며, 觀想念佛과 稱名念佛의 대상으로 기능했 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종교적 기능은 8세기 전반의 東大寺阿彌 陀堂의 淨土集會群像에 계승되는 것과 함께 善導流의례에 바탕을 둔 阿彌陀悔過가 阿彌陀堂에서 행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7세기 말에서 8세기 중반의 阿彌陀像은 彫像에서 板佛, 塼佛에 이르기까지 대륙과 반도로부터 전해진 밑그림에 의거해서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8세기 후반에는 華嚴敎學과 雜密信仰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阿 彌陀信仰이 雜密的인 색채를 띠었으며, 이와 함께 阿彌陀像의 造像法 도 외부의 밑그림에 의거한 조상에서 雜密經典인 陀羅尼集經에서 말 하는 畵像法에 바탕을 둔 造像으로 변용된다. 法隆寺傳法堂서쪽 불 상은 이렇게 제작된 雜密系阿彌陀像의 전형이라고 생각되며, 이 작품 과 같이 양 손의 엄지와 약지를 함께 구부리는 독특한 설법인을 취하는 阿彌陀像은 당시 雜密信仰이 주로 華嚴의 배경에서 전개되었다는 것 을 시사한다. 즉 陀羅尼集經에서 이야기한 阿彌陀像은 法隆寺傳法 堂서쪽 불상이나 法華寺阿彌陀淨土院본존과 같이 盧舍那佛과 밀접 하게 관련 있는 불상이라고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서쪽 불상과 흡 사한 傳法堂중앙의 삼존불상은 서쪽 불상과 대칭을 이루는 盧舍那三 尊像으로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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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남북조시대 사람들이 당시의 불상을 바라보던 시각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사원의 중심이 스투파였다. 문헌에 의하면 붓다의 열반 후 스투파는 8기가 건립되었지만, 아쇼카 왕이 이 중의 7기를 해체하여인도전역에8만4천기의 불탑을 세웠다고하였다. 이것은 인도 전역의 거의 모든 불탑은 사실상 아쇼카 왕 시절에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에 사원을 건립하면서 불사리가 필요했지만, 역사적으로 이를입수하기란거의불가능에가까운일이었을것이다. 때문에 集神州 三寶感通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아쇼카 왕이 8만4천탑을 세울 때 그 일 부가중국에세워졌고, 그때의사리가발견되어 중국의 초기불탑들에 봉안된 것이라는 설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만으로는 더 많은 불사를 건립하는데 있어한계에부딪쳤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책은 사리를 대체할 수 있는 물건으로도 탑을 세울 수 있다는 개념이었는데, 그러한 아이디어는 석가성도지인 보드가야의 중층누각형식의 마하보디 사당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하보디 사당은 사리가 아닌 석가성도상을 봉안한 건축물이었는데, 당시 보드가야를 방문한 중국의 구법승들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특히 현장과 같은 승려는 장안 慈恩寺大雁塔을 세울 때 이 마하보디 사당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탑 대신에 전혀 다른, 보다 쉬우면서도 직접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불상이었다. 인도에서도 불상이 있었지만, 이는 주로 탑을 장엄하는 용도였으며 혹, 사리를 봉안한 불상이 불탑만큼 존숭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 안의 사리 때문이었지, 상 자체의 영험함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상들 역시 불사리처럼 진정성을 획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아쇼카 왕의 조탑 설화와 마찬가지로 아쇼카 왕 조상 설화가 중국에서 만들어졌으며, 소위 아쇼카 왕상이라고 하는것은 오래 전에 중국에 전래되어 묻혀 있다가 새롭게 발굴되어 남북조 시대 사람들 앞에 다시 현현한 것으로 서당시 사람들에게 믿어졌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상들은 다양한 기적을 일으켰으며, 만약 똑같이 복제되는 경우, 원본과 같은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미지를 복제함으로서 영험함도 복제할 수 있다는 이러한 경향은 보다 쉽게 불상의 진정성을 널리 유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남북조시대의 일부 불상들은 아쇼카 왕이 만든 상, 혹은 그 상을 복제한 상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불상들은당시에제작된것이아니라, 훨씬오래전에제작된불상, 혹은오래된 양식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이들 불상이 보이는 양식은 당시의 양식이 아니라, 당시보다 더 오래된 양식으로 보이기 위한 의도된 고식, 혹은 고법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의 양식을 倚古양식으로 불러보고자 하였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우다야나 왕 조상설화도 전래되었는데, 이것은 우다야나 왕 시절에 도리천에 장인을 올려 보내 석가모니의 진용을 모사해 와서 조성한 상이므로, 석가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조각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말하자면 석가의 초상으로서 사실주의를 어느정도 바탕에 두어야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본다면불교미술에서 사실적 양식이라고 언급해 왔던 인도의 굽타 양식이나 이를 받아들인 북위시대 운강석굴 초기의 불상 양식들은 서양의 사실주의와 구분하여 眞容양식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제시해 보았다. 결국 이러한 고찰을 통해 단순히 인형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불상들에 사리를 대신한 진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쇼카 왕 설화와 같은 역사적 전통을 만들어 내거나 우다야나 왕 설화와 같은 시각적 전통에 의지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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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1.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t is a true fact that the ancient Buddhist temples of Korea were great, important historical influence revealing the transition and developing stages of all the BUddhist temples in Eastern Asia including China and Japan. Before Mahayana arose within India, the monastery and pagoda were united during the conflict and development of the original Buddhism and pagoda faith. With the arising of Mahayana and the introduction of Buddhist statues, the Buddhist temple and pagoda were in conflict and resulted in separation. With the creation and development of the Mahayana Bodhisattva concept, Hinayana and Mahayana started to show doctrine differences and expressed each others' characteristics relevant to the structure of the temple. As a result, the Buddhist Temple having 1 pagoda spread in China together with Hinayana and Mahayana. The Buddhist temple of Hinayana had its temple and pagoda separated and the Buddhist temple that has a pagoda in front was divided into a form of 1 pagoda and 1 main temple. The temple and pagoda for Mahayana in the form of 1 pagoda and 2 temple, where the main statue of the Buddha may be worshipped from both the left and right hand sides, were separated in the form of 1 pagoda and 3 temples to have its original form again. Mahayana was first introduced into Goguryeo through the routes in the northern region and developed from having 1 pagoda and 2 temples, to having 1 pagoda and 3 temples. China was influenced by the southern regions, which is why Abhidharma was introduced into Baekje. Later on, the importance of Bodhisattva increased and the transition speed of the Buddhist temple having 1 pagoda and 3 temples accelerated, as Buddhism became more popular and as Mahayana flourished. The statue of the Buddha on both sides of the pagoda shall gradually move next to the central temple , and the temple shall form large crowds to not only form a tacit boundary with the pagoda but the expansion of Bodhisattva shall also have a wall or a corridor constructed in between the central, left and right hand side temples to form separate areas, and shall have a pagoda built in front of the temples that worship from both sides. In conclusion, independence shall exist among each Bodhisattva within the Buddhist temple, and the status of the pagoda shall fall and appear as the pagoda on both sides in front of the main Buddha sta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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