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참여정부 시기 여성 정책과 관련해서 대표적인 사례 인 여성고용확대정책과 「성매매방지법」을 중심으로 비판적 재검토함으로 써 이 시기의 여성 정책 접근방식에서 드러난 핵심의 전환을 구체화하는 것에 있다. 참여정부 시기에 이루어진 여성 정책에 대한 접근방식의 핵 심은 단순히 기회의 평등에서 결과의 평등을 확보하는 단계로 전환하는 가운데,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는 바탕 위에 성인지적 관점을 담겨 기존 의 성 질서에 도전하고, 실질적인 양성평등 사회의 성별 구조를 재구성 하는 단계로 전환하였다는 것은 본 연구의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여성고 용확대정책은 여성의 경제활동과 고용과정에서 차별을 해소하고 경제활 동에서 기회의 평등을 보장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인 고용개선조치 도입 등을 통해 결과의 평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전환을 볼 수 있 다. 또한, '성매매 피해자 개념' 제시와 성매매 표현 재규정 등을 포함한 성매매방지법은 성인지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결과의 평등을 확보하는 단 계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양성 질서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양성이 평등한 성별 구조를 재구축하려는 새로운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대전지역 노동시장의 구조와 특성을 살펴보고 일자리 미스매치와 성별 임금격차를 분석하여 일자리창출과 지역 고용정책 수립방안을 위한 시사점을 제시 하는데 있다. 대전지역의 실업률은 2013년 2.0%, 2014년 2.5%, 2015년 2.6%, 2016년 2.9%, 2017년 3.3%로 매년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 인력수급의 구조적인 불일치를 보여 왔다. 특히 금속가공제품 업종의 경우, 성별 임금격차는 월 평균임금이 439만원으로 여 성 월 평균임금의 283만원보다 156만원의 격차를 보였다. 성별 임금격차의 분석결과를 보면, 결혼(MAR), 교육(EDU), 고용계약(CONTRACT), 연령(AGE2 ), 가구주(HOUSEHOLD), 근무기간(TERM)의 순으로 나타났다. 인적자본 요소에서 결혼(MAR)의 β 값이 높은 것은 경력단절여성의 경우 결혼, 출산, 보육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노동시장을 떠난 후 재취업 할 경우 장기근속 숙련공에 비해 임금의 차이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연구결과 는 대전시가 향후 경력단절여성의 경력개발을 위한 일・가정의 양립을 지향할 수 있 는 지속적인 사회 정책적 지원이 필요함을 시사하고 있다.
본 논문은 한국사회의 다문화 논의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결혼이주여성의 문제들을 문제화한 것이 다. 바키의 문제재현 분석틀(What problems represented to be: WPR)을 활용하여 특정 시기의 다문화 정 책이 문제로 삼은 것이 무엇이며, 그 문제 재현의 전제와 효과가 무엇인지 고찰하였다. 결혼이주여성의 문 제는 위장 결혼문제, 인권침해문제, 가족해체와 통합의 문제 등으로 재현되어 왔으며, 이러한 문제의 재현 에 상응하여 결혼이주여성은 속물적 기회주의자, 매매혼의 피해자, 가족 형성 및 유지자로서 다루어졌다. 바키의 WPR을 적용하여 보면, 문제화 과정에서 침묵 되어 있던 부분들이 수면으로 드러난다. 결혼에 포함 되는 모험심과 로맨스와 헌신에 관한 이야기, 능동적인 생존자와 주체적인 시민으로 사는 삶에 대한 논의는 재현되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다. 그들의 목소리와 경험이 간과된 채 통치되어 온 결혼이주여성들에 관한 재현들을 전치시키고, 아울러 경합적인 재현을 탐색할 것이 요청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결혼이주여성의 주 체성 혹은 에이전시(agency)의 재현에 대한 주목이 필요하다.
본 논문은 결혼이주여성과 그 가족을 주요 대상으로 지원하는데 초점을 맞춘 한국 다문화정책의 편향성이 결혼이주여성의 지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한 분석이다. 한국은 2000년대 초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결혼이주여성과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문화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주민의 다수를 차지 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배제한 한국의 다문화정책은 결혼이주여성과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다문화가 족정책으로 범위가 제한되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결혼이주여성으로 하여금 한국 사회에서의 적응과 동화를 강조함으로써 다문화에 반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국의 편향된 다문화정책 속에서 결혼이주여성은 한국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가족 형성의 수단으로서 간주된다. 이에 따라 결혼이주여성의 재생산 능력은 체류자격 요건에도 영향을 미친다. 결혼이주여성과 그 가족을 대상으로 지원하는 방식의 다문화정책은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이등시민의 의존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이들을 더욱 주변화 시킨다. 다문화정책의 주요 대상인 결혼이주여성의 관점이 배제된 한국의 다문화정책은 이들에 대한 편견을 초래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제까지 배제되었던 결혼이주여성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새로운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늘날 사회생활에 있어서 과거와는 달리 여성의 권익신장과 여성의 활동범위가 확장되면서 그와 더불어 여성범죄가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어느 국가사회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추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는 급격히 산업화․민주화가 진행되면서 한국 고유의 전통적․보수적제도가 축소되고 일부 여성들의 자유개방․황금만능주의적 풍조 등이 만연되면서 여성 범죄는 그 증가 추세일로에 있으며, 여성범죄자의 재범률이 높은 상황이다. 따라서 이러한 한국사회의 여성범죄의 추이와 그 주요 특징 등을 분석하여 여성범죄의 예방과 그 대책방안을 강구하여 본다. 그 방안으로 우선적으로 교정시설내 여성수용자의 교정처우상의 문제점과 그 개선방안 을 제시하는 것이 여성범죄의 예방을 위한 주요 교정정책이라 하겠다. 그 주요 개선방안으로 여성교정시설의 대체와 증설, 직업훈련의 확대와 다양화 가족유대관계 프로그램 강화, 가택구금과 일과후구금제도 도입 및 여성수용자 교정처우의 전면적 개방화를 제시하였다.
본 논문은 여성 지위 및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사회정책의 기능과 방향에 대한 탐색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여성 정책의 추진 기구로서의 여성가족부의 정책 변화과정과 기능 및 역할의 방향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우리나라의 여성정책은 여성정책이라는 용어자체가 생소했던 1980년 이전에는 여성에 대한 낮은 인식과 지위로서 사회적 영향력을 가잘 만한 정책의미미에서 2000년대 이후 여성 전담 정책기구의 신설과 정책 형성으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는 여성 정책 추진 기구의 변화와 정책의 구체화로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여성정책 추진 부서인 여성가족부의 기능을 세분하여 살펴보면 더욱 그 변화를 알 수 있다. 여성과 관련된 여성가족부의 정책을 추진영역별로 살펴보면 크게 양성평등, 인력개발, 인권보호, 가족, 청소년으로 나뉘어 있으며 하위 영역으로 세분화되어 추진되고 있으며 여성가족부 소관의 여성정책과 관련된 법률은 8개, 가족정책과 관련된 법률은 7개, 청소년정책과 관련된 법률 6개이다. 이와같이 여성정책의 구체화와 다양화가 3차에 걸친 여성정책 기본5개년 계획으로서 더욱 추진역량을 구조화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논의를 토대로 여성가족부의 역할과 기능을 정리하고 나아갈 정책방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earch Mattie Ingold’s life, the first lady missionary doctor served in Jeonla province. She is known as a founder of the Jesus Hospital in Jeon Ju, 108years old teaching hospital with 600 beds. But her contribution and limitation as a lady doctor was not properly evaluated. She was very well prepared medical missionary graduating Women’s Medical College in Baltimore with the first prize. She had passion for mission to Korean so much that she would not return home for this people. The Rock Hill First Presbyterian Church as a sending church was also very mission oriented enough to take care of her medical education for 5 years before sending her to Korea. However her ministry period as a medical missionary was only from 1898 to 1904. It seems not so long as to raise question if there were any reasons to quit medical ministry while serving in Jeon Ju until 1925. This study traced the Mattie Ingold’s life and circumstances she had faced at the end of 19th century and early 20th centur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ism. As other medical missionaries did in many area of mission fields sh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introducing the Christianity by bridging the gap with the traditional worldview or with the Confucianism. Her warm hearted medical care was definitely contributed to get rid of xenophobia prevailing in those days just few years after the Donghak farmer’s revolutionary movement. Even though, as a lady doctor, her medical work was restricted to caring ladies and children, her zeal for evangelism made her translate the Christian Cathechism Primer into Korean which has been used by all missionaries in Jeonla area. She rather used her limitation as a merit by involving more actively in home visiting and providing medical care for ladies and children which was not easily available to men. She must have struggled with xenophobia, male superiority complex and the health issue of herself which could have shrink her back from active medical work. But most depressing factor might have been the mission policy based on dualistic view on the Christian mission that medical ministry was just subordinate to the evangelistic ministry and that the medical care was just a bait for evangelism. This policy could have resulted in restriction in allocating resources for medical ministry. Moreover, at that time, even mission agency had male dominating atmosphere that ladies could not have a voice in decision making. This study may provide a lesson which is worth in helping individual missionaries of today’s mission by revealing that how the policy of a mission society and the contemporary worldview affects on the individual missionary’s min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