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몽골침략은 페르시아의 사상, 종교, 문화에 전반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 중 몽골지배 이 전과 대비하여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슬람 신비 주의 종교철학인 수피즘에 대한 인식 변화이다. 이슬람 왕조의 세속주의와 향락 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동한 수피즘은 12세기 페르시아에서 종단이 세워지면서 하나의 기득권층이 되었으며, 몽골침략 이 후 몽골지배층과 결탁하여 이민족의 정권을 선전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금욕과 청빈이 미덕인 수피들 은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14세기 몽골족 지배하에 활동했던 하페즈와 같은 시 인들은 자신들의 시에서 이러한 수피들을 비판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페르시아 의 시성인 하페즈의 작품에 나타난 수피 상징 연구를 통하여 몽골 침략 이 후 수피에 대한 인식 변화를 보여주고자 한다.
본 연구는 조선왕조 말기에 일본 육군성 참모본부 소속의 장교들로 조직된 첩보장교들이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한반도에 침투하여 측량침략을 감행한 비밀측량 지도들을 분석한 것이다. 이 지도들은 첩보장교들의 목측에 의해 은밀하고 신속하게 제작된 노상측도와 目測迅速圖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일정한 도식이 적용되지 않았다. 이들 지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일정한 도식에 근거한 등고선과 축척표시가 체계화되지 못하였고 지형의 고도를 표시하기 위하여 우모식과 등고선식이 혼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형을 사실과 근사하게 표시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요구되었으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간단한 약식등고선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기호의 범례는 대부분 생략되었다.
2018년 7월 17일,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이 채택된 지 20주년이 되던 날을 기념하며,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침략범죄에 대한 관할권 행사를 개시하였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뉘른베르크와 도쿄에 설립된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개인을 형사처벌한 이래 70여 년 만에 침략범죄에 대한 형사관할권을 행사하는 상설 국제형사재판소가 존재하게 되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이 모두 ICC의 당사국임을 고려할 때, 두 국가는 모두 ICC가 침략범죄에 대한 관할권 행사를 개시하였다는 규범적 변화의 영향으로부터 무관한 지역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규범적 변화가 독도 문제 해결에 있어 서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해결을 강조하고 불법적인 무력사용을 통한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억지하는 직·간접적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요구된다. 이러한 판단은 결국 ICC에서 채택된 침략범죄의 정의와 ICC의 침략범죄에 대한 관할권 행사의 전제조건 및 범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될 때 가능한 것이기에, 이 글은 요구되는 선행적 이해를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ICC에서의 침략범죄에 관한 규범적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한국 정부는 독도가 침략범죄에 대한 규범적 발전으로부터 무관한 지역이 아니라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명함으로써, 이를 평화를 추구하는 정책의 규범적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광복 후 일본정부의 독도 침략은 1953년에 시작되었다. 5월에 시마네현(島根縣) 수산시험선 ‘시마네마루(島根丸)’가 독도에서 한국 어민들의 어로를 확인하자 일본정부는 ‘다케시마(독도) 단속’를 결정하였다. 6월 일본 순시선의 무장한 임검반이 독도에 상륙해 일본의 영토표주를 세우는 한편, 어로 중인 한국 어민들을 심문하고 퇴거를 명하였다. 이즈음 일본 정부는 독도 탈환의 구체적인 방도를 세웠다. 첫째 방도는 순시선을 자주 독도에 파견해 한국 어민의 어업을 막는 것이며, 그 후 1년 동안에 26번이나 순시선을 침입시켰다. 한국 측은 이런 활동에 분노해 어느 때는 울릉경찰서 순라반이 순시선을 총격하고 일본의 영토표주를 철거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영토표주가 수차례 철거되어도 그때마다 새 영토표주를 곧 세웠다. 결국 영토표주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1954년 5월 중순까지 독도는 80% 일본에 침탈당하였다.
독도 탈환의 둘째 방도는 독도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본 어민들의 두절된 어업을 부활시키는 것이며, 1954년 5월에 실시되었다. 이 어업의 성과는 적으며, 일본 어민들은 독도는 가치가 낮은 섬임을 알고 다시는 독도에서 어업을 하지 않았다. 자연히 독도 탈환의 둘째 방도는 사라졌다. 또한 탈환의 첫째 방도도 5월부터 한국 해양경찰대가 독도에 드나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실시가 어렵게 되었다. 또한 8월부터 한국은 관민 공동으로 독도를 본격적으로 경비하고 순시선을 총격 혹은 포격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은 독도 탈환 방도를 포기해 외교적으로 해결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 순시선의 침입은 줄고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매년 1번 정도로 됐다. 그러나 1977년에 일본이 ‘영해 12해리법’을 시행하자 순시선이 독도 지근거리에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반격을 받아 퇴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해에 한국도 ‘영해 12해리법’을 시행하자 일본 순시선은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독도 해역으로 침입할 것을 삼가게 되었다.
A major history textbook for high schools, A Modern History of Korea for High School (Seoul: Kumsung Publishing House, 2007) described that Protestantism in Korea supported Japanese invasion to Korea. The text book has been used for many years by more than 50% high schools in South Korea. The argument of this book is very important because it might influence over high school students who think that the text book should always be correct. However, Protestantism in Korea was not the supporter of the Japan Empire in the turn-of-twentieth century Asia. In reality, Korea Protestantism had been appeared by Korean people as defender of Korean people against Japanese power. At that time Korea protestantism had been closely related to America which send their missionaries to Korea and helped its modernization. When Japan tried to put Korea in her power, King KoJong sent his envoy to the president Roosevelt of USA for help to maintain his independence. In reality, Japan government had considered Korean Protestantism as big obstacle for its rule over Korea. Japan had always be afraid of Korean Christianity and spied over it. Japanese army in 1911 arrested 105 important Christian leaders to destroy Korean churches. Also, in the last years of Japan imperialism, Japan governor-general of Korea expelled American missionaries from Korean peninsular to disconnect Korean Christian relationship with America. Finally, missionaries tried to maintain the principle of separation between church and state in Korea. They did not involve in political matter either on Korean nationalism or Japanese imperialism. This attitude of missionaries could not be satisfied with Japanese as well as Korean. However, they thought that their original mission in Korea is evangelization, but not independent movement of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