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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최술은 韓愈의 「原道」에 나오는 道統論을 인용하여, ‘공자가 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로 이어지는 道統의 전수자’라는 절대적인 위상을 설정하고 있다. 맹자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며 亂世로 접어드는 혼란 속에서 孔子이후의 道統의 전수자로 孟子를 설정한 것이다. 최술은 ‘孔子를 존재할 수 있게 한’ 孔子의 弟子들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그는 공자의 弟子24人을 德과 功勞에 따라 顔子부터 子思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배치하여 이들의 행적을 상세하게 고증하였다. 공자제자들의 위상을 순차적으로 설정하면서, 최술은 기존의 이른바 ‘孔門十哲’을 과감히 해체했다. 현재 成均館文廟配享順位에 포함된 孔門十哲중에서 12. 子游, 13. 子夏, 14. 子張, 15. 宰我, 16. 冉有5인이 10위권 밖으로 빼고, 8. 有子, 9. 原思, 10. 公西華, 11. 子賤4人을 이들보다 훨씬 앞선 순위에 배치시킨 것이다. 또한 최술은 『孟子』의 내용을 정치하게 분석하여 『孟子』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공과를 분류하였다. 그는 이들을 樂正子․公都子․屋廬子, 萬章․公孫丑․充虞과 같은 “수준 높은 제자[高第弟子]” 두 그룹, 陳臻․徐辟과 같은 “차등의 제자그룹”, 그리고 陳代․彭更․咸丘蒙․桃應과 같은 “제자의 여부를 단정할 수 없는 그룹”까지 4등급으로 나누어 철저하게 고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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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제문이 가지는 특성에 주목하여 南冥 曺植(1501-1572)의 제자들이 지은 11편의 제문을 분석한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남명의 제자들이 문하에 나아간 때는 언제이며, 당시에 그들이 저마다 받은 각별한 가르침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11편의 제문에 드러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오건은 1551년에 남명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자신이 스승에게 받은 특별한 가르침을 ‘공부하는 방법’과 ‘때를 알아보는 의리’로 함축했다. 정인홍은 남명의 교육은 책을 잡고 읽는 강학이 아니라 제자들의 정신을 깨우쳐 스스로 터득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고 술회했다. 김우옹은 남들보다 백배 천배 노력하라는 말씀, 출처에 관한 경계, 성성자를 전해 받은 일, ‘雷天’ 두 글자의 훈계 등을 남명에게 받았으며, ‘서리 내린 소나무와 눈 쌓인 측백나무’처럼 어떠한 어려움에도 자신을 간직하라는 장려를 입었다. 정구는 남명이 6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밤낮을 이어가며 강학을 진행했는데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고 회고하며 스승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가르쳤는지를 서술했다. 최영경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 남명이 가진 ‘깔끔한 맑은 기풍’에서 큰 배움을 얻었다. 하항은 남명의 교육 방법의 특징으로 일에서 비유를 취해 깨우치게 했다는 점을 특기했다. 이 기록을 통해 남명이 문장을 지을 적에만 비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적절하게 활용하여 깨닫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는 스승의 모습을 봄날에 눈이 녹는 듯이 감화시키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제신은 스승의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보았으므로, 그분의 언행이 일치한 것은 자신만이 안다고 확신했다. 류종지는 남명의 교육 방법을 ‘병통의 뿌리를 시원하게 도려내고 뒤이어 약을 처방하는 것’이라고 기억했다. 곽율은 남명이 제자들을 가르칠 적에 두 양단을 들어 남김없이 극진하게 말씀해주셔서 정성스러운 가르침에 감화를 입어 분발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조원은 자신의 자질이 매우 부족했지만 정성스럽게 가르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선비[佳士]’로 장려해주신 일에 깊이 감격했으며, 가르침의 핵심을 ‘居敬窮理’라고 요약했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그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제문의 작자들은 남명 문하에서 중요한 비중을 가지는 제자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데, 남명이 산청의 산천재에 은거한 만년에 입문한 학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둘째, 남명은 절실한 비유에 의해 새롭게 각성시키는 것, 핵심 단어와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수양의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 자신이 살아온 삶에 근거해 학자가 추구해야 할 이상을 보여주는 것 등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3.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는 일상에서 유학 덕목을 실천하는 기초였던 심신관리는 修身이며 이를 養生, 養心이라 하였다. 종래 남명학 연구에 서 남명이야 말로 자기수양에 철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남명과 그 문파들의 수신 즉 심신관리의 지혜에 관한 선행연구는 많지 않다. 본고 는 덕천서원 유생들의 심신관리 지혜의 모태를 남명이 찬술한 성리학 요약서인 學記類編, 또 남명과 그의 제자들의 행적에서 찾고자 하였 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질서에서 의학은 도덕적인 수양을 방해하는 잡학 이자 자기 몸을 보존하고 부모님께 효를 다하기 위한 일상적인 기술로 취급되었고 이는 유학이 시작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유 학과 의학은 태동과 발전의 역사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송 대 신유학에서 신체원리와 병리현상의 개념이 적극 수용되면서 의 학의 생명적 세계관이 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다. 이러한 송 대 신유학의 생명적 세계관이 반영된 글이 성리대전과 당대 유학자 들의 言表들인데 학기유편에서는 주로 이들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학기유편에 근거한 생명적・역동적・실천적 세계관은 곽재우, 정인 홍, 김우옹, 정구 등의 예와 같이 행동하는 삶의 바탕이자 보이지 않는 계율로 작동하였을 것이다. 남명의 심신관리와 치병에 관한 행적은 주로 남명집에서 확인되었 다. 남명은 몸을 다스리기 이전에 마음 수양을 기초로 보고 ‘좌우명’, ‘패검명’, ‘혁대명’ 등을 지니고 '‘神明舍圖’를 붙여놓고 평생 ‘銘’으로 삼아 실천하였다. 또 남명은 정신을 한 군데에 집중하고자 항상 정좌수 행과 猩猩子의 쇠방울 소리, 敬義劍의 날카로운 형태를 통해 수시로 의식을 각성시키는 등 특별한 무언가를 갖추고 행하는 심신수양의 방 법을 보여주었다. 남명이 일생동안 겪은 질병에 대해서는 9세 때 사망 직전에 이를 정도로 심한 질병을 앓았다는 것이 연보의 기록이고 문집에서는 거의 40대 이후의 질병과 치료에 관한 내용이 있을 뿐이다. 다만 20년 가까 이 반복적으로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남명의 현기증과 두통이 고질적 지병으로 확인되었다. 남명의 성정은 자신은 물론 일상다반사에 대해 지극히 엄정했다. 이와 같은 그의 성정이 만성적인 피로감과 두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지 추측해 보았다. 남명은 약재를 구하거나 약을 짓는 등 본인과 가족의 질병에 대해 직접 치료를 행했던 것으로 나타나 그의 행장 등에 기록된 다양한 분야 에 관한 능통하고 의약도 섭렵했다는 구절과 다르지 않았다. 남명과는 동시대를 살면서 서로 다른 학문관과 출사관을 가졌던 퇴계와 심신관 리, 의료행적을 비교해 보았다. 퇴계 본인은 물론 지인들에 대해 행한 다양한 의료 행적이 전하지만 오늘날 유학자의 양생서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활인심방의 편저하기도 하였다. 퇴계 뿐 아니라 16세기 이후 에는 유학자들의 다양한 양생서가 저술되었다. 그러나 남명 문하에서 는 망우당 곽재우의 양심요결이라는 제목만 전하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양생서는 전하지 않는다. 남명의 문인 중 한강 정구는 의서저술과 대민의료시설 재건 등을 통해 修己와 安人의 실천의지를 보여주었다. 한강은 의서 외에도 대민 구제를 위해 성주의국을 설치하였다. 성주의국은 임진왜란 후에 피폐 해진 의료시설로 한강은 이를 재건해 대민의료의 기반을 갖추고자 하 였다. 한강은 60대에 이르러 개인적으로 내우외환을 겪고 73세에 중풍으 로 오른쪽이 마비되기에 이른다. 한강은 중풍 발병 이듬해인 1616년부 터 중풍 치료를 위해 온천기행을 시작하여 이후 3년간 지속하였다. 한 강의 온천치료를 위한 기행은 제자 이윤우가 기록한 「봉산욕행록」에 자세하다. 봉산욕행록은 1617년 7월부터 9월의 기록으로, 45일 동안 의 여정, 한강이 매일 반복적으로 목욕요법을 행하고 제자와 관료를 접대하는 등의 내용이 쓰여있다. 남명의 또 다른 문인 망우당 곽재우 역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 으로 나서는 등 남명의 충군애민 실천 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망우당은 개인적으로 불우했고 관료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다. 이 과정 에서 망우당은 불로장생과 신선의 세계에 심취하였고 일반적인 유학자 들의 양생이 아닌 수련 양생의 길을 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망우당이 50대에 이르러 벽곡조식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망우당의 벽곡조 식에 대해 허균과 성여신은 한나라 장량에 버금가는 처세술이었다고 변호하였다. 한국도교사에서 망우당에 대한 평가는 조선단학파의 맥을 잇는 한 사람이고 민간에서는 의병과 신선을 넘나드는 전설적인 인물 로, 덕천서원의 유생들에게는 남다른 기개의 선배로 남았을 것이다. 남명을 비롯한 문우, 제자의 박학풍은 남명문파들의 공통된 특징으 로 나타나고 있다. 덕천서원 건립에 참여했던 각재 하항, 남명의 문인 내암 정인홍의 제자인 함양 선비 고대 정경운 등의 예와 같이 의약으로 자신과 가족을 치료하고, 대민구휼을 위해 사우들과 의론을 펼치는 등 남명의 충군애민 실천사상이 재전제자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