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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9세기 江右地域의 대학자 晩醒 朴致馥의 남명학 계승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것이다. 본고는 만성의 학문이 定齋 柳致明을 통한 퇴계학파의 학설을 수용한 점과 性齋 許傳를 통해 근기 남인계 星湖學의 實用主義를 수용 한 점에 주목하여, 만성이 이 두 학문을 겸함으로써 전통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 면서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致用의 학문을 한 것으로 평가하였 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학문성향은 寒洲 李震相의 心卽理說이나 蘆沙 奇正鎭의 主理論이 전통의 성리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설을 전개한 것과 다르다. 또한 양 자를 兼取하였다는 점에서 퇴계학파나 성호학파의 학문성향과도 변별된다. 그 리고 학문이 침체되었던 강우지역에서 새로운 학문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학 술사적 의의가 크다. 본고에서 논한 만성의 남명학 계승양상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만성의 南冥遺蹟 探訪과 追崇事業으로는, 山天齋・白雲洞 등 남명유적을 찾아 추모한 것과 산해정 중건 기문을 지은 것을 들 수 있다. 둘째, 南冥의 文廟從祀 를 위한 노력으로는, 만성이 1888년 疏頭가 되어 상소문을 올린 것을 들 수 있 다. 셋째, 만성은 許眉叟의 문집 󰡔記言󰡕에 남명을 사실과 다르게 폄하한 「答學 者書」를 삭제해 줄 것과 「德山碑」의 개정을 요청하였고, 󰡔南冥集󰡕 重刊을 위해 교감을 보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넷째, 만성의 現實認識의 측면에서 본 南冥精 神 繼承으로는, 「上時弊疏」에 나타난 현실인식과 민생구제정신이 남명의 상소 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섯째, 만성의 南冥에 대한 認識 및 論評으로 는, 남명을 소미성으로 상징되는 처사로만 보지 않고 傅說・富弼처럼 賢相名丞 의 자질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고, 남명의 학문을 程子・朱子를 계승한 正學으로 보았으며, ‘秋霜烈日 千仞壁立’으로 일컬어지는 남명의 기상에 대해 敬義學을 전제함으로써 伯夷와 다른 성향으로 재평가하였고, 山海亭의 山海에 대한 해석 을 통해 남명의 정신지향을 泰山보다 높고 瀛海보다 크다고 평했다.
        2.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朴致馥의 《大東續樂府》는 조선시대 사화를 수용하여 악부체시 형식을 빌어 쓴 영사악부로서 28편이나 되는 시 모두를 일컫는 시집 이름이다. 작가의 창작 동기는 《大東樂府》를 보고 조선 시대 역사가 빠져 있어서 이를 보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따라서 이 작품은 대동악부의 속편으로 조선 시대 사화를 중심 으로 지어진 것이다. 박치복의 《대동속악부》는 盧德奎의 《海東續樂府》와 내용이 같은데, 박치 복의 《대동속악부》가 원본이고 노덕규의 《해동속악부》는 박치복의 《대동 속악부》를 베낀 이본이다. 《대동속악부》는 조선시대의 王政, 烈行, 忠節, 學行, 孝行 등의 사화를 수용 하여 褒貶을 노래한 시로서 勸善懲惡의 교훈성을 지니며, 문학성과 역사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28편 모두를 1편 3수의 편법으로 구성하였으며, 장편의 서사성을 더하여, 일반 영사악부들이 지니는 문학성, 역사성, 교훈성을 뛰어 넘 는 특성을 지녔다. 특히 1편 3수의 편법과 장편 서사시로서의 구성과 표현은 우 리 나라는 물론 중국 고악부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양식이다. 이를 통해서 작가의 충만한 표현 욕구에 의한 다양한 표현의 추구, 서사시의 다양한 변모, 연작시의 새로운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대동속악부》는 중국의 악부에 대한 한국의 악부라는 개념이 바탕이 되어 서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노래를 중시한다는 작가의 역사의식에 의해 창작되었 다. 작품을 통해 작가의 서민의 삶에 대한 긍정, 조선 건국의 위대성, 충신, 열 녀, 학자, 효자의 아름다운 행실을 후대에 전승하려는 역사의식도 함융되어 있 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지니게 된 밑바탕에는 박치복의 역사관과 衛正斥邪 사상 이 깔려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대표적인 글이 「斥洋邪論」이다. 《대동속악 부》에 나타난 악부시적 성격과 작가의 역사의식을 통해 나타난 양상은 한국악 부문학사는 물론 漢詩史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3.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慶尙右道에서 활발한 敎學 활동을 벌였던 晩醒 朴致馥은 定齋 柳致明과 性齋 許傳의 학문을 계승하여 理學과 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이 논문에서는 만성의 문집에 수록된 그의 禮說을 禮本質論, 經禮 해석 관점, 變禮 조처의 경향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는 각종 變禮를 논함에 있어서 대체로 󰡔家禮󰡕에서 수립 된 典範을 준수하여 원칙에 입각한 조처를 강구하였다. 그는 예의 본질이 忠信 質素에 있다고 하여 소박한 인정의 진실성을 중시하였으며, 人情의 편안함을 전제로 하여 廬墓의 관습과 묘소가 없는 선조의 壇享과 影幀을 모시는 生辰祭 를 긍정하는 논리를 세웠다. 經禮의 해석에 있어서 桑主와 栗主의 차이를 喪과 慄의 의미로 해석한 것이나, 春秋左傳과 周禮에 근거하여 爲人後者에 대한 새 로운 해석을 제안한 것, 影幀과 神主의 의미를 生事와 死事의 도리로 구분한 것 등은 모두 그의 독특한 創見이다.
        4.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晩醒 朴致馥은 定齋 柳致明과 性齋 許傳, 두 문하에서 수학하여 江右(慶尙右 道) 지역을 대표하는 퇴계학파의 학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하던 한주학파의 새로운 학설로부터 師門을 보위할 것을 자임하 였다. 한주와 만나 太極動靜의 문제를 토론하고 만성은 바로 그 이듬해인 무인 년에 太極動靜辨을 저술, 한주의 태극설을 반박하였다. 여기서 만성은 태극이 홀로 동정할 수 없고 반드시 음양이 함께 있어야 하니, 음양을 떠나서 태극의 동정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따라서 氣를 떠나서 理를 말하면 理가 공허하 고 추상적인 것이 될 우려가 있다고 반박했는데 이는 퇴계학파 전통의 心說인 合理氣說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만성의 명덕설은 스승 정재의 설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주의 설을 반박한 것이 다. 만성의 명덕설에서 중요한 특징은 氣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고, ‘맑고 밝은 것도 명덕이요 맑혀서 다시 밝게 하는 것도 명덕’이라 하여 明明德까지 명덕의 개념 속에 포함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만성만의 매우 특이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工夫論의 차원에서 나온 견해로 이해된다. 태극설, 명덕설을 이어서 心說에서도 만성은 理와 氣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 하였으며, 특히 氣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는 역시 理만으로 심을 정의한 한주의 心卽理를 논박하기 위한 것이다. 만성의 心說 전반을 관통하는 심의 主槪念은 시종 合理氣일 뿐이다. 즉 합리기를 근간으로 삼은 위에서 경우에 따 라 즉기·즉리를 말할 수는 있지만 심의 개념 자체를 달리 정의할 수 없다고 생 각했던 것이다.
        5.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咸安은 학문의 고장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함안에 본격적으로 학자가 배출 되어 학문이 시작된 것은 조선 건국 이후부터이다. 高麗末 琴隱 趙悅과 茅隱 李 午의 咸安 정착이 咸安의 학문 興隆에 있어 하나의 큰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각 성씨가 함안에 기반을 잡아 번성함으로 인하여 그 후손 가운데서 많은 학자들이 나왔다. 朝鮮 宣祖朝에 寒岡 鄭逑가 咸安郡守로 부임하여 학문을 일으키고 교육을 장 려하고 󰡔咸州誌󰡕를 편찬한 것이 함안의 학문 수준을 높이고, 학문의 저변을 확 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咸州誌󰡕를 통해서 그 당시 함안의 지식인들 에게 그 때까지의 함안 문화의 전모를 알게 하여 함안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 부심을 느껴, 앞으로 문화를 가꾸어 나가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만들었다. 仁祖反正으로 침체되기 시작한 咸安의 학문은, 澗松 趙任道의 노력으로 급격 한 쇠퇴를 막고 현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仁祖反正 이후에도 江右의 다른 고을과는 달리 학문이 단절되지는 않게 되었다. 澗松은 南冥學派와 退溪學派의 융합을 위해서 평생 노력한 학자인데, 간송의 노력으로 인해서 함안 지역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퇴계학파나 남명학파 두 학파의 장점을 골고루 섭취하 는 이점을 갖게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함안에서 저명한 학자나 비중 있는 저술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 때 함안의 학자들은 書院 건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尊賢과 講學을 통해 서 학문적 전통을 이어나갔다. 咸安에서 스승으로 삼을 만한 대학자가 나오지 않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함안에서 학문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들은 慶尙左道나 畿湖地方으로 유 학을 가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어, 자연히 대부분의 선비들이 향촌의 小儒로 침 체됨을 면하기 어려웠다. 조선말기 性齋 許傳이 金海府使로 부임하여 관아에서 講學을 하자, 배움에 목 말랐던 함안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가 가르침을 들었다. 500여 명의 성재 문인 가운데서 90여 명이 함안 사람이고, 그 가운데서 문집을 남긴 문인만 해도 27명에 이르니, 함안의 학문은 성재의 敎導로 말미암아 완전히 중흥을 이루었 다고 말할 수 있다. 性齋의 문인들은 지금까지 간행하지 못했던 조상의 문집이나 實紀에 성재가 지은 序文을 얻어 간행하여 반포하고, 조상의 재실이나 정자에 성재가 지은 記 文을 붙이고, 조상의 산소에 성재가 지은 碑文을 얻어 새기는 등 先賢들의 學問 과 德行을 선양함으로 인하여, 묻혔던 함안의 학문이 단시일내에 다시 빛을 발 하게 되었다. 性齋의 문인 집단에서 좌장격인 晩醒은 性齋의 學統을 전수받아, 스승 性齋의 문집 간행과 성재를 享祀할 麗澤堂을 지어 성재의 학덕이 천추에 전할 수 있도 록 기반을 마련하여 敎恩에 보답하였다. 그는 또 定齋 柳致明의 제자이기도 한 데, 近畿南人學派의 실학적인 학문과 정통 嶺南退溪學派의 성리학적 특성을 잘 조화시켜 함안의 학문 경향을 정통을 지키면서도 실용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했 고, 退溪와 南冥의 학문이 잘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1937년을 하한선으로 할 때, 咸安의 학자들에 의해서 지어진 文集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약 200여 종에 이르고, 專著는 30여 종 되는 것으로 파 악되었다. 이 정도로 풍성한 著述이 나온 것은 咸安이 學問의 고장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이들 저술 가운데는 아직 간행되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것이 많고, 개중에는 전란으로 인하여 간행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춘 것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앞으로 함안 학자들의 저술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간행 보급하면, 함안에서 나온 文集과 專著를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본격적으 로 연구할 수 있게 되어, 함안의 역사와 문화가 새롭게 밝혀질 것이다. 특히 지 금까지 거의 방치하다시피 해온 朝鮮時代 咸安의 漢文學이 새롭게 조명되어 각 광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