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성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약 55,780㎡, 둘레 는 약 2,000m 정도로 추정된다. 이는 테뫼식 산성으로 알려져 있고 1963년에 사적으로 지 정되었다가 1966년 12월에 사적 해제되어 현재는 공군 00부대 대공방위를 위한 군사시설 이 위치하고 있다. 성산성에 대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있었지만, 그 성격과 축조시기 등 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고지도와 고문헌에 따르면, 성산성은 산성이 아닌 봉수가 있는 것으로 표기된 자료는 다 수가 존재한다. 성산성은 최소한 조선시대에는 그 존재적 가치가 없는 상태이거나, 그 존재 의 실체를 인지하지 못하여 활용가치에서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1668년 경산(지 금의 성산)에 관련된 사찬지인 경산지에 의하면, 성산봉수대 꼭대기에 옛 성터와 절터가 남아 있으며, 저수지도 있다고 기록한 것이 유일하다. 성산성에 대한 조사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은 1917년 일제강점기 일본학자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사적 제91호로 지정될 당시인 1963년의 조사내용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명 확한 내용은 파악되지 않으며, 1966년 지정해제 당시의 문화재위원회의 실태조사 내용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2008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부분적으로 시ㆍ발굴조사 등이 이루어져 성주 성산 성의 체성 일부 등이 조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사를 담당한 연구조사기관에서 성주 성 산성의 체성 둘레를 추정하여 제시한 바 있다. 여러 문화재 전문조사기관에서 시행한 지표조사 결과 추정한 성산성의 평면은 부정형의 다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산성 특히 치소성(治所城)의 평면 형태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성산성은 군부대가 이미 오랜 기간 주둔하여 상당한 지형 훼손이 이루어져 축조 당시의 둘레와 진행 방향을 추정하기가 지금으로서는 어렵다. 그리고 각종 지표조사와 각종 시(발)굴조사에서 상당한 양의 기와편과 도기편, 일부 청자편 도 수습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최근의 조사에서는 건물지와 함께 막새기와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상황을 볼 때 성산성이 치소로서의 기능을 하였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치소성이 산 위에 있는지 또는 산 아래에 있는지에 대하여 이미 상당한 논쟁이 있지만 고려시대 전체를 일괄하여 단정 짓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 성주 성산성 정밀지표조사를 통하여 획득한 성과는 체성부 의 윤곽선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성산성의 정체성을 추정할만한 근거가 되는 문지, 건물지, 연지 등과 함께 봉수대의 위치를 함께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지금까지의 성산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현지 여건상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 지만 금번 연구에서 성산성에 관련한 현존하는 모든 자료를 수집, 정리, 분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고문헌, 고지도를 한 자리에 정리하여 자료화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앞으로 성산성에 관련된 자료가 더 확보되고 연구가 지속되길 기대하면서 이러한 연구에 조 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내용이었길 바란다.
현재 성주지역에는 고대산성으로 알려진 성산성, 용각산성, 성주 할미산성 등이 있고, 고 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성곽으로는 성주읍성, 가야산성, 독용산성 등이 있다. 성주지역이 가야의 고지로서 대가야와 경계를 함께하였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성곽을 가 야와 연관시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가야 성곽의 축조수법과 안정된 토층에서 가야의 출토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한 보다 신중하게 검토한 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자료로 제공되 어야 할 것이다. 성주지역 고대산성과 인근지역 고분은 서로 간에 시기 차이가 있다. 이들 고대산성은 신라가 진출한 시기와 유적의 입지, 축성 목적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축성주체 및 산성의 성격, 구체적인 축성시기 등을 밝히려면 체성벽과 성문, 집수 지, 성내 건물지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고려시대 경산부(京山府)의 중심지로 보고 있는 성산성과 성주고읍성의 관계, 그리고 조 선시대 성주읍성의 옛 동문지 기록과 평지 토성의 증축 가능성 문제, 고려시대 토성의 범위 확인과 조선시대 성곽과의 중첩관계 등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와 사용 척도에 대한 고증, 그리고 고려시대 축조된 토성과 조선시대 증축 또는 중 종 15년(1520)에 개축된 석성과의 범위 관계도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입보용산성은 몽골 침입과 관련되어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최근에는 그 시기가 나말 여초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가야산성과 독용산성은 평지에서 멀리 떨어진 험 산대성(險山大城)이다. 가야산성 내에서 조선 전기 및 그 이전 시기의 유물이 수습되고 있 으며, 독용산성 남문지 하부에서 토축 성벽이 확인되어 이들 산성은 축조시기가 고려시대까 지 소급될 수 있는 전형적인 입보용 산성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산성에 대한 발굴조 사가 진행된다면 보다 구체적인 입보용산성의 초축 시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성주는 신라이래 고려시대까지 군현명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피현 (本彼縣, 신라)·신안현(新安縣, 757)·벽진군(碧珍郡, 후삼국)·경산부(京山府, 940)·광 평군(廣平郡, 981)·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 1295)·성주목(星州牧, 1308)·경산부(京 山府, 1310) 등으로 자주 바뀌었다. 1401년(태종 1) 태종의 태실(胎室)이 조성되면서 다시 성주목(星州牧)으로 환원되었다. 이후 몇 차례 현(縣)으로 강격(降格)을 거듭하다가, 1745 년(영조 21)에 다시 성주목으로 환원되었다가 1895년 8도제(道制)를 폐지하고 23부제(府 制)를 실시할 때에 성주군이 되었다. 이후 이웃 지역과 몇자례의 면(面)·리(里)의 행정 분리 조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주는 신라시대 때에는 그만큼의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성주읍 지역에 있던 신안현(新 安縣)은 성산군(星山郡) 소속 4개 영현(領縣)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 일대의 지역 중심지는 현 성주읍 지역이 아니라, 옛 성산군의 치소가 있던 낙동강변의 현 경북 고령군 성 산면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경산부와 조선시대 성주목으로 경상도의 상주, 진주 와 함께 3대 목(牧)의 하나로 번영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성주목이 지녔던 지역적 위상은 이 미 고려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성주는 고려시대 이후 한말까지 다른 지역보다 많은 인물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른바 성주 ‘6이(李)’와 함께 성주배씨(裵氏)와 성주도씨(都氏)가 유명하다. 성주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여섯 이씨 가문은 모두 다른 시조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이총언(李悤言)의 등장 이후 성주 지역에서는 이씨 성을 칭한 가문들 사이에 세력 경쟁이 매우 치열했던 것으로 여 겨진다. 이총언(李悤言)·이능일(李能一)·이장경(李長庚)·이조년(李兆年)·이승경(李承 慶)·이승휴(李承休)·이인복(李仁復)·이인임(李仁任)·이숭인(李崇仁)·배극렴(裵克 廉)·도길부(都吉敷)와 조선시대 인물인 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이진상(李震相)· 김창숙(金昌淑)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려시대 유적으로는 성주 가암리와 동포리, 봉정리, 어산리, 용봉리 등에서 토기 및 자기산포 지가 지표상 확인되었으며, 성주읍 예산리 동방사지 칠층석탑(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0호) 과 가천면 금봉리 석조비로자나불, 수륜면 백운리 석탑부재, 가천면 창천리 청명사 석불좌 상과 같은 불교 관련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성주 시비실, 예산리와 기성리, 학산리, 대성리 그리고 성산 옥성리 유적에서 이루어졌다.
이 연구에서는 경영체DB와 토양DB로 구성된 농업빅데이터와 성주군 참외와 경산시 복숭아 경영성과 자료를 활용하여 품목별 단위 생산성을 예측하였다. 또한 추정결과와 품목별 판매단가를 적용하여 휴· 폐경지역 해당 품목 도입 시 효과를 살펴보았다. 분석결과를 요약하면 첫째, 참외는 적지와 비적지 단위생산성에 차이가 존재하였고, 복숭아는 판매가격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둘째, 참외의 적지 생산성이 비적지보다 높게 나타나며, 배수가 잘 될수록 생산성이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셋째, 복숭아는 사토일수록 생산성이 감소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경사가 낮을수록 생산성이 증 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 참외의 휴·폐경 활용효과는 총 488.4백만원으로 추정되었고, 복숭아의 휴·폐경 활용효과는 총 745백만원으로 추정되었다.
본 연구는 성주지역에 적합한 참외재배용 내재해형온 실을 개발하기 위하여 참외 재배온실의 구조현황 조사, 최근 기상자료가 반영된 설계하중 산정, 온실모델 설정 및 구조안전성 분석을 수행하였으며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주지역 참외온실의 구조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현장 조사한 결과, 온실의 지붕형상은 아치형이 가장 많았으며, 최근에 시공한 온실일수록 복숭아형이 많았으며 폭이 넓어지고 동고도 높아지는 추세였다. 그리고 성주지역에 가장 인접한 구미기상대의 기상자료를 이용하여 재현기간에 따른 설계풍속 및 설계적설심을 산정할 수 있는 계산식을 유도하였으며, 내재해형 온실 규격을 만족하는 재현기간 30년의 적설심은 23.7cm, 풍 속은 33.8m·s−1로 계산되었다. 이러한 성주지역의 내재해형 설계기준을 만족하는 참외재배용 단동온실 4종, 2연 동온실 및 연결온실을 각각 1종씩 총 6종의 모델을 개발하였다.
There ar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the birthplace of their first ancestor), and they are called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which include the Nongseo Lee family, the Byeokjin Lee family, the Seongsan Lee family, the Gwangpyeong Lee family, the Gyeongsan Lee family, and the Myeonggyeong Lee family. Thes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had different progenitors and frequently married each other. If they use the same Gwanhyang, it is considered as a marriage between people with the same surname and the same family origin.
Therefore, it was not easy to indicate Gwanhyang when there was a marriage between people from the six Lee families. Since Seongju and Seongsan were the most commonly used Gwanhyang by the six Lee families, it is highly difficult to find a certain ancestor with an assumption that the ancestor uses today's Gwanhyang, because it is hard to know which family this ancestor is from. Therefore, I want to reveal the origins of the six Lee families and how they indicated their Gwanhyang specifically. This work will be significant since it clarifies the identities of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and provides guidelines to find ancestors related to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The results of this review come down to the following.
First, there ar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and it includes the Gy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Akgeobujeong (official title) Lee Deok-bu; the Gwangpyeong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Gwangpyeonggun (official title) Lee Neung; the Nongseo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Nongseogungong (official title) Lee Jang-gyeong; the Myeonggyeong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Myeonggyeongjangwon (signifying winning the first place in the Myeonggyeon exam) Lee Geuk-song; the Byeokji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official title) Lee Chong-eon; and the S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Seongsangun (official title) Lee Neung-il.
Second, the Gy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the Akgeobujeong, was also called the Bujeong Lee family. As they were also the descendants of Sobuyoon (official title) Lee Gam, they were once called the Soyoon Lee family.
Third, the Nongseo Lee family unites and uses their Gwanhyang as the "Seongju Lee family" nowadays.
Fourth, the Myeonggyeong Lee family was combined into the genealogy of the Byeokjin Lee family after 1864, and it has been maintained until today.
Fifth, the descendants of Lee Gyeon-gan among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were once indicated distinctly as the Sanhwa Lee family.
Sixth, the Gwanhyang of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was indicated as "Seongju" in the official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era.
Seventh,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frequently used "Seongju" and "Seongsan" as their Gwanghyang in historical records.
Eighth, "Byeokjin" and "Nongseo" are the most distinctive Gwanhyang among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as they refer to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and the descendants of the Nongseogungong.
Ninth, the Nongseo Lee family and the Seongsan Lee family temporarily used "Gyeongsan" as their Gwanhyang, and the Nongseo Lee family temporarily used "Gwangpyeong" as their Gwanhyang. However, in general, the Gyeongsan Lee family and the Gwangpyeong Lee family have a historical uniqueness.
Finally, the need for distinguishing Gwanhyang began to be gradually recognized after 1593 when genealogies were established, and it was strengthened in around 1800, but it did not completely settle down. In the 1900s, Gwanhyang began to be indicated distinctively. Before then, Seongju and Seongsan were mixed and used so that it was not possible to distinguish the six Lee families only with Gwanh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