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에서 마립간기는 ‘新羅國王’으로 표방되는 지증왕대 이후 신라 사회의 급격한 성 장과 질적 변화를 추동한 시기이다. 특히 마립간기에 본격화된 영역의 확장은 신라 국가 성 장의 중요한 배경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자비·소지마립간 재위기에는 축성 기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이는 당대 신라의 영역 확장 과정을 잘 보여준다. 신라 중앙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축성된 신라성은 신라의 영역을 실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유효한 자료이다. 또한 문헌사료에 기록된 성을 현재 남아 있는 성[城址]과 타당하게 일치시킬 수 있다면 신라의 영 역 확장과 그 운영 방식에 대한 더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 자비·소지마립간기의 축성은 앞선 시기 영남권역을 확보한 신라가 소백산맥 일원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축성 지역은 한강 (최)상류와 소백산맥 서북부 일원 에 집중되어 당대 신라 영역의 북서쪽 경계[北邊]를 반영한다. 각 성은 기본적으로 확대된 영 역의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축성되었으며 서로 가깝게 위치한 성은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일 정 권역의 방어체계를 형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몇몇 성은 축성 지역 일원을 신라의 지 방으로 운영하는 거점의 역할[地方據點城]을 병행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러한 축성 목적과 역할에 따라 성의 입지와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의 구성에서 일정한 차이가 나타난다. 5세기 후엽인 신라 자비·소지마립간기 축성의 가장 큰 특징은 石築山城의 본격화이다. 석재를 이용하여 높게 쌓은 체성벽과 이를 보강한 보축성벽, 현문식 성문, 성벽을 돌출시킨 (곡면)치성, 성벽 통과식 수구와 그 안쪽의 집수시설 등 공통적 구조를 갖춘 석축산성은 이 시기에 典型을 이루고 이후의 축성에서 탄력적으로 變容된다. 한편 신라 축성 사업의 원활 한 전개는 축성 지역의 親新羅化를 전제로 가능하다. 축성 지역의 재지세력은 신라 중앙의 축성 의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기 안전을 보장받고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 신라성에 인접한 대단위 고분군의 조영과 중심 고분의 高塚化가 이를 반영한다. 그러나 신라 중앙의 영향력 투사가 점차 심화되면서 지방의 신라 고분군은 각각 특정한 시점에 조영이 중단되며 이는 신라 지방 운영 방식의 질적 변화를 암시한다.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여러 지역에서 진행된 축성은 신라의 인적·물적 자원의 관리와 동원 체계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축성과 같은 국가적 사업 의 수행을 위한 대단위 인력 동원은 신라 사회 구성원의 동질감과 정체성 형성의 주요한 계 기가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당대 신라 축성의 결과인 보은 삼년산성 등 거대 석축산성은 신 라의 확대된 영역과 내적 역량을 과시하는 표상으로서 역사적 기념물의 의미를 함께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통일신라시기의 산성은 성벽이나 문지, 집수시설 등을 중심으로 발굴조사 되었 다. 그 결과 성벽의 축조기법이나 조성 시기, 구조 등에 대해선 비교적 많은 자료가 축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산성의 주체인 인간의 숙식 등과 관련된 건물지의 조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통일신라시기의 산성 내 건물지는 대체로 기단석을 갖추고 있으나 동 시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구식기단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그리고 이 시기의 주요 난방 시설인 쪽구들 의 경우도 초석 건물지에서 발견된 사례가 거의 없다. 단적으로 전면 발굴조사가 진행된 광 양 마로산성의 경우 성주나 하급 관리, 병사들이 머물 수 있는 난방시설이 턱 없이 부족함을 살필 수 있다. 아울러 전술한 기단석의 위계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당시 광양 마로산성은 치소성이나 거점성으로 인식될 정도로 중요한 산성이었다. 그러나 성주나 관리, 병사들이 상주하기 위한 온돌 건물지와 성주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 물지의 기단석 등은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산성 내 건물지가 일상생활을 영 위하기 어려운 구조였음을 알게 한다. 그런 점에서 향후 산성 외부의 건물지 조사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과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원도 영동지역의 수많은 산성들 가운데 문헌 자료들에 대한 비판적 논증과 함께 고고자료들을 분석하여 신라~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8곳의 산성을 추출하였다. 그 결과 여러 가지 고고학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었고, 역사적인 실상에도 접근 할 수 있었다. 우선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도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행정단위인 주-군-현마다 산성들이 있었고, 산성의 규모도 행정 구역 단위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주(州) 단위는 1,000m 이상이며, 현(縣) 단위는 200~600m 정도로 구분된다. 또한 일찍이 설치된 실직주와 하슬라주의 산성(州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복식(山腹式)의 토성이고, 이후에 만들어지는 현 단위의 산성(縣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정식(山頂式)의 토성이 많았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 북진기 이 전에 축조한 산성의 성벽은 토루에 돌을 피복하는 공통점도 보였다. 특히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은 바닷가의 곶[산]에 석호나 강을 끼고 입지 하고 있는데, 이들 산성이 신라의 동해안 연안항해와 관련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이후의 시기에는 이들 산성이 다소 내륙으로 들어가 산의 정상부에 입지 하는 경향성을 보여주는데, 특히 진흥왕 북진기부터 통일전쟁기에는 그 입지의 변화가 잘 나타난다. 나아가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의 존재는『삼국사기』에서 실직(城)과 하슬라(城主) 등과 함께 나오는 사료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준다. 아울러 삼척 오화리산성은 북해(北海)의 제장(祭場)인 비례산(非禮山)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비교적 확실한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들을 최초로 다루었다는 의의가 있는데, 앞으로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사와 신라고 고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三國史記』에의하면신라文武王13년(673) 9월에 둘레 2,592보의 국원성(國原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국원성 추정지는 지금의 충주 중심부 외곽 사직산∼만리산∼충주 성심학교를 연하는 구릉성 능선과 평지를 에워쌓은 외성(外城)이 말각정방형(抹角正方形)으로 둘레가 약 6km 의 흔적을 남기고 있고, 그 안쪽의 내성(內城)은 조선후기까지 경영된 충주읍성터가 위치하고 있어 이중복곽(二重複郭)의 나성구조(羅城構造)이다. 외성의 한 변의 폭은 대략 1.6km 정도로서 남북 중심축이 약 48° 정도 서향하고 있는데, 이는 주변의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계획적인 구상을 하여 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성터의 입지는 성곽의 규모가 크면서 북쪽의 남한강(南漢江)과 서쪽의 달천(達川) 사이에 위치하고, 전면에 하천을 끼고 뒤에 산을 배경으로 하여 축조되고,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축조되어 있음은 한국의 다른 읍성(邑城)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성터는 당초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국원성이라는 큰 성을 쌓아 중원경(中原京)의 치소(治所)로서 기능하였다고 여겨지며, 이 성터는 고려시대(高麗時代) 충주성(忠州城)으로서 기능(機能)하여 고려후기 몽고침입기(蒙古侵入期)를 즈음하여 대대적인 개축(改築)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방치되고 내성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성터는 충주의 사직산 서쪽 사면 구간과 만리산 동쪽 구간 능선 외연(外緣)에 잔존하는 성벽 구조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만리산 구간 토루 주변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대략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때의 신라계 산성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기와편으로서 인접한 충주산성에서 출토된 것들과 같은 유형의 유물이며 내성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국원성의 축조(築造)와 관련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신라의 국원지역 대한 성곽 경영(經營)은 진흥왕 때에 먼저 남쪽의 충주산성(忠州山城) 및 평지에 작은 읍성(邑城)을 먼저 축조하고, 이후에 외곽에 대규모 평지성을 축조한 것이다. 이 성터의 구조가 평지에 대규모 방형(方形)의 이중복곽구조 성곽(二重複郭構造城郭)을 이루고 있으면서 배후(背後)에 산성을 두고 있음은 같은 시기의 다른 지역 도시성곽과 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昧谷山城은 忠淸北道 報恩郡 懷仁面 富壽里 산 443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은 三國時代에 견고하게 初築된 石築山城으로서 新羅末~高麗初 이 지역의 豪族인 龔直의 活動 根據地로서 지속적으로 經營되었다. 昧谷山城이 위치한 懷仁은 淸州平野의 남쪽을 가로막는 山麓의 매우 험준한 계곡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중북부에서 嶺南 ․ 湖南地域을 있는 直路로서 地理的으로 삼국시대 이래 중요한 交通의 要衝地이자 軍事的 要衝地로써 後三國時期에 後百濟와 高麗 사이의 國境地帶로 인식되어 歷史地理的 위상이 크다. 昧谷山城은 單郭構\造으로서 각종 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둘레가 1,152尺이고, 높이가 8尺이다. 실측 조사한 길이는 내측의 둘레가 635m이고, 성벽의 높이는 외측의 무너진 부분이 6m 이상이다. 성벽 북쪽과 동쪽의 외향으로 돌출된 角雉 혹은 曲城의 흔적이 50~55m의 간격을 두고 모두 7개소가 배치되어 있음은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昧谷山城은 三國時代 高句麗․百濟․新羅가 쟁탈전을 벌이던 무렵에 축조되었다. 성벽의 축조에 있어서 板石을 이용하여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린 점이나 基壇補築 등의 축조기법은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5세기 후반경에 新羅에 의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新羅末 高麗初에 昧谷山城은 城主將軍 龔直이 강력한 土着勢力을 바탕으로 根據地로 삼고 있었다. 매곡산성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줄무늬병편 등의 유물은 대략 10세기를 전후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羅末麗初의 昧谷山城은 삼국통일 이전의 성곽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면서 성곽의 立地는 주요 都市의 외곽 혹은 交通의 要衝地에 위치하고 있어 城郭戰術의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城主將軍 龔直은 昧谷山城을 根據地로하여 처음에 甄萱에 歸附하였고, 高麗 太祖 15년(932) 王建에 歸附하여 報恩 ‧ 淸州 ‧ 文義 등 중서부지역의 쟁패에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결정적인 轉機를 마련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