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인 의미를 헌법적인 차원에서 분석하고 이를 계승하는 방법을 도출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2022년 대통 령선거 이후 한국에서는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포함하자는 여론이 형성 되었다. 이에 연구는 첫째,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포함할 가치가 있는지 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5.18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이 가능하다면, 국가 유공자 예우에 관한 논의를 분석하고자 한다. 연구는 세부적으로 5.18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세계적인 민주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사건이자 민주주의 이행과정의 시민항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이를 계승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국가유공자 예우에 대한 학술적 논 의를 진행하였다. 분석을 통해 연구는 5.18정신의 의미를 4가지로 제시 한바, 첫째, 민주주의 국민저항권, 둘째, 역사적 평가, 셋째, 법·제도 정 비, 넷째, 세계사적 평가 등을 위한 노력 차원에서 분석했다. 그리고 연 구에서는 5.18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은 필요하고, 이를 민주주의 국가의 주요한 동력이 되려는 방법으로 5.18 국가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1919년 4월 4일 익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농촌의 한 교회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매우 격렬하고 장엄한 의거였다. 이날 목숨을 바쳐 만세운동을 이끈 선각자들의 순교(혹은 순국)정신을 선교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익산지역 선교역사와 남전교회의 설립과정 그리고 4.4 만세운동의 준비과정과 만세현장을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먼저, 이들의 정신은 순교와 선교정신이다. 만세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6명 가운데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들은 하나님과 독립을 믿으며 죽음으로써 이를 증거(μαρτυρία)한 증인(μάρτυς)들이 다. 다음으로, 파송(missio)공동체 정신이다. 남전교회는 세상으로 파송 받은 공동체로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에 참여했다. 끝으로, 정의, 평화, 창조보전(JPIC)의 정신이다. 이것은 최근 세계교회가 일으킨 운동이나 순교자들은 이것을 앞서 실천한 선구자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mprove the ammonia (NH3) emission inventory estimation in the domestic CAPSS (Clean Air Policy Support System). Currently, the ammonia emissions rate is obtained by multiplying the activity (number of livestock) by emission factors. The amount of movement and treatment are not considered in the estimation of ammonia emission rates. However, livestock manure is currently moved and treated in accordance with the energy recycling policy. In this study, the new emission estimation method were suggested considering the moving and treatment characteristics of livestock manure. A new ammonia emissions was calculated for Bcity and Y-gun at Chungcheongnam-do province. It was shown that the moving and treatment ratio of ammonia emissions were 4.3% and 8.4%, respectively. Furthermore, this ratio would be increased rapidly with the continuous establishment of large-scale manure treatment facilities.
The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Military Rule during 1910s was definitively not occlusive. Movements toward Korean independence continued both within and outside the peninsula during this period, and the energy of resistance was continually accumulating. Because of capabilities for autonomy, the March First Movement could respond more efficiently to international context after the end of World War I. Compared to the May Fourth Movement of China or the Rice Riots of Japan, the March First Movement was peculiar in that it was a relatively large-scale, pan-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e experience of the March First Movement for the Korean people served as the fundamental matrix of subsequent independence movements and as part and parcel of their ethno-national, historical memory, was transported through liberation from Japan’s colonial rule down to today’s unification movement. Analysis of the specific plans for independence movements and the actual activities of the Korean national representatives vis-à-vis records of examination from the police, prosecution, and each level of the judicial court as well as pilot studies demonstrates that at the outset, the plans for the movement did not envisage pan-Korean demonstrations or coalition with students. The limitation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s by the national representatives were in fact overcome by the actual conduct of the masses that began at T’apgol Park on March 1,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