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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2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나카네 기요시는 陸軍(省)參謀局 등에 근무하면서 『兵要日本地理小誌』 등 일본지리교과서를 출판하였다. 그가 육군참모국 재직 중 집필했던 『병요일본지리소지』는 최초의 官撰 全國地理書로 군인용 교재뿐 아니라 일본지리교과서로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따라서 당시 최신의 정보를 근거로 편찬된 『병요일본지리소지』에는 육군참모국의 일본 영토 인식이 잘 반영 되어 있다. 『병요일본지리소지』의 본문에는 일본의 극단에 위치한 섬들이 소개되고 「日本國全圖」와 「山陰道之圖」 등에 일본 영토가 표시되었지만, 울릉도와 독도는 거론되지 않았다. 따라서 나카네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獨學日本地理書』에는 일본 영토의 변동 상황이 정확히 반영되었음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문과 지도에서 모두 나타나지 않았다. 나카네는 『日本地理小誌』에서 비로소 竹島와 松島를 조선 영토가 되었다고 확실하게 밝혔다. 山陰道總論에서 오키의 서북쪽에 松島⋅竹島가 있음을 소개하고 울릉도쟁계와 竹島 渡海禁止令을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막부가 竹島를 포기한다고 명령했다고 서술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지리교과서 가운데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사례이며, 「日本國全圖」와 「山 陰道之圖」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日本地理小學』에는 松島⋅竹島가 조선 영토라는 나카네의 인식이 유지⋅계승되고 있다. 『일본지리소학』의 본문에는 竹島⋅松島가 거론되지 않지만, 「日本總圖」에는 竹島⋅松 島로 여겨지는 두 섬이 그려져 있다. 「山陰道之圖」는 『일본지리소지』의 것과 동일한데, 『訂 正日本地理小學』의 「山陰道之圖」는 경위도의 범주가 줄어들면서 松島가 표시되지 않았다. 『정정일본지리소학』의 「日本總圖」와 「山陰道之圖」에서 松島⋅竹島 모두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점은 더욱 확실해졌던 것이다.
        22.
        2018.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東國詩話彙成』은 18세기에 저술된 인물중심의 총집류로 시화사적 면에서 의미 있는 저작이다. 현재 22권 7책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고려 뒷부분과 조선 앞부분에 권수의 숫자가 중복되기도 하고, 異本 중 비교 적 체재를 갖춘 『詩話彙成』과『詩話彙編』조차 결락본이거나 불분권 상태이다. 세 필사본의 간행 시기는 『동국시화휘성』이 洪重寅에 의해 먼저 편 찬되었고 그 얼마 뒤인 1734년에 洪重徵 혹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초기『시화휘성』으로 정리되었다고 보여진다.『시화휘편』은 1817년 沈魯 崇이 홍중인의 손자 집에 보관되어있던 『시화휘성』을 傳寫해두었다가 1821년 『대동패림』편찬 시 최종 수록하였다. 필사본의 한계로 인해 체재가 정밀하지 못하고 결락된 부분도 많으며, 편찬시기에 시간차가 있어서인지 선입된 조목에 있어서 서로 출입이 발견되었다. 이에 본고는 가장 처음 편찬되었고 비교적 체계가 갖추어진 『동국시화휘성』을 기준으로 3종의 편찬체재를 대조하고 그 결과를 표로 정리 한 후, 그 가시적인 차이점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동국시화휘성』·『시화휘성』·『시화휘편』의 선입조목을 비교하여 그 현황을 살펴보았다. 『시화휘성』은 앞서 편찬된 『동국시화휘성』을 기준으로 인물 및 시 일화를 가감하였고, 다른 부분은 기존의 체재를 크게 건드리지 않았지만 조선조에서 왕들을 별도 조목으로 분류해둔 현상을 가장 큰 특징으로 제시하였다.『시화휘편』은 심노숭이 말한 필사경위나 편찬시기 및 조목의 1차적 인물선입 양상만을 염두에 두고 보았을 때는 『시화휘성』을 저본으로 편찬되었을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 3종에 공통으로 선입된 조목의 기사를 서로 비교해본 결과 후대에 필사된 『시화휘편』이 체재 면에 서는 오히려 『동국시화휘성』과 유사한 면모를 지녔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시화휘편』은 선행 저작된 두 필사본을 함께 참고하였거나 적어도 심노숭이 저본으로 삼았던 시화휘성』은 현존본과는 다른 『동국시화휘성』의 모습을 많이 간직한 초기 형태의 『시화휘성』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본고는 3종을 종합하여 『동국시화휘성』의 완전한 면모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동국시화휘성』이 갖는 독자적 의미를 도출하기 위한 선행연구로서의 기초 작업임을 밝힌다.
        23.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 헌종조에 편찬된 三朝寶鑑의 편찬 사례를 통하여 국조 보감의 편찬 과정과 편찬 의례에 대해 고찰한 것으로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조보감의 편찬 과정은 찬집청이 설치되어 활동하는 시기와 감인청 이 설치되어 활동하는 두 시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삼조보감을 편찬 할 때 찬집청은 대략 1년 6개월 동안 존속하였다. 찬집청에서는 우선 1차로 日省錄과 承政院日記를 통하여 보감의 내용에 적합한 기록을 발췌하여 찬집본을 만드는 일을 진행하였다. 찬집 작업은 정조보감부 터 시작해 순조보감과 익종보감의 차례로 진행하였고 찬집을 시작한지 8개월이 지난 무신년(1848) 11월에 이르러 완료되었다. 이후 교정 작 업은 교정 대신과 참정 대신으로 임명된 고위 관료에 의해 수행되었고 이는 정조 때의 관례를 따라 在家 작업으로 행해졌다. 삼조보감 편찬 때의 감인청은 찬집본이 완성되어 교정 작업을 진행 하는 중에 설치되었다. 삼조보감 편찬 때에는 감인청 설치 이후에도 찬집청이 한 동안 유지되었다. 이 시기 찬집청의 주요 업무는 삼조보감 찬집 초본의 교정에 관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御製 序文을 받아 이를 교열하는 일과 箋文과 跋文의 작성에 관한 일, 삼조보감의 속찬에 따른 국조보감 총목, 총서, 범례의 수정, 보완에 관한 일이었다. 삼조보감 편찬 때의 감인청은 무신년 2월에 설치되지만 인출 작업이 개시되는 것은 이로부터 6개월이 지난 뒤였다. 開印에 앞서 이루어진 감인청의 활동으로 중요한 것은 刊板 작업에 동원될 刻手를 확보하는 일이었으나 실제 각판 작업에 동원된 각수를 물색하게 되는 것은 印役 이 개시되는 일자에 거의 임박해서였다. 삼조보감의 刊板 작업에는 교 서관 소속의 각수와 외방에서 차출된 각수를 합쳐 도합 42명의 각수가 동원되었다. 이는 정조조 국조보감의 편찬 사업에 동원된 144명의 각 수와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기는 하나 각수를 제외한 나머지 각색 공장의 수는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감인청에서 주관한 삼조보감의 인역은 우선 활자판을 만들어 몇 건 의 활자본 삼조보감을 인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출 된 활자본 가운데 한 건은 각판용으로 사용하였고 한 건은 종묘에 봉안 하고 한 건은 왕에게 진상하였다. 보감은 다른 편찬물과는 달리 이를 종묘의 當室(해당 국왕의 廟室)에 봉안하였기 때문에 종묘 봉안건 보 감의 제작은 특히 중요하였다. 삼조보감의 경우 종묘에 봉안한 보감은 활판으로 인출한 3건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본 연구를 통해 처음으 로 밝혀진 것이다. 보감을 종묘 당실에 봉안하기 까지에는 새로 편찬된 보감을 국왕에 게 진헌하는 의식이 있고, 다음으로 종묘 봉안에 앞서 예정된 장소에 임시로 봉안하는 의식이 있으며, 그런 다음 마침내 종묘에 봉안하는 의식을 행하게 된다. 삼조보감의 편찬에 따른 의례적 행사에는 정조조 국조보감 편찬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행사에 국왕이 친림하였다. 다만 정조조 국조보감 편찬 때와는 달리 삼조보감 편찬 때에는 보감을 왕에 게 진헌하는 행사장이었던 仁政殿을 임시 봉안처로 하게 됨에 따라 종묘 봉안을 앞두고 왕이 부근의 摛文院으로 이동하여 齋宿하는 절차 가 있었다. 또한 삼조에 대한 봉안 의례가 종묘 당실에 대해서만 행해졌 기 때문에 영녕전에 대해서는 전알례만을 행하였다.
        24.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大學類義』는 정조가 『대학』을 토대로 편찬한 군주 聖學의 교재로서 『聖學輯 要』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정조는 세손 시절 『성학집요』 강독과 함께 抄出 작업 을 진행하였으며, 이것은 정조 5년 『聖學輯略』으로 완성되었다. 『성학집요』에 대한 이해는 『大學衍義補』로 확대되었고, 이것이 『대학유의』 편찬으로 귀결된 것이다. 『대학유의』의 편찬은 『大學衍義』와 『大學衍義補』의 내용을 초출하여 재편집 한 것이지만, 나아가 국왕의 입장에서 『大學』의 정신을 체득하고 스스로 聖學 교재를 편찬하려는 것이었다. 『대학연의』의 내용 중 「帝王爲學之本」에서 三代 이후 군주의 학문에 대한 3개 세목을 삭제하였는데, 이는 君師로 평가받는 삼대 의 군주만을 학문의 모범으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治國・平天下의 구체 적인 통치술은 그대로 수용되었다. 이는 삼대 군사의 이념도 구체적인 통치 과 정과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대학』이 추구한 全體大用의 학문체계로 완성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지향은 앞서 『성학집요』에서 모색된 것이었다. 이이는 『대학연의』의 시각을 계승하면서 통치 과정에 대한 내용을 수용하여 『대학』의 이념을 재구성 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대학연의보』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에 담긴 통치술 을 대폭 수용하였다. 이이는 『성학집요』를 통해 군주와 신료를 포함하는 보편 적 관점에서 효능을 말하고 군주에게 수신을 강제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 는 『대학유의』를 통해 太平의 임무를 가진 국왕을 중심으로 놓고 여기에 신료 들의 보좌 역할을 규정함으로써 『성학집요』의 성학론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25.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의궤는 조선전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지만, 현존하는 의궤 중 가 장 오래된 것이 선조대 후반에 제작된 것들이다. 따라서 광해군대에 제작된 의 궤는 현존 의궤 중에는 상당히 시기가 오래된 것으로 분류된다. 광해군대에 제 작된 주요 의궤는, 1) 선조의 국장, 부묘, 묘호 개상, 존호와 관련 의궤, 2) 명나 라 사신을 영접한 의궤, 3) 생모인 공성왕후의 추숭에 관계된 의궤, 4) 화약무기 를 제작한 과정인 󰡔화기도감의궤󰡕, 5) 천문관측기구를 보관하는 흠경각과 보루 각 건축 의궤, 6) 제기 제작에 관한 의궤, 7) 󰡔삼강행실도󰡕를 새로 펴낸 과정을 정리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등이다. 이 중 󰡔화기도감의궤󰡕와 󰡔흠경 각영건의궤󰡕, 󰡔보루각영건의궤󰡕, 󰡔영접도감도청의궤󰡕는 광해군대에만 특별히 제작된 의궤들로서, 국방과 외교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룬 광해군 정권의 성격 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광해군 재위 16년간 27종의 의궤가 편찬되었 다. 그런데 그 중에 6종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외교와 관련되는 의궤라는 점이 우선 주목이 된다. 광해군은 국방이나 외교, 과학에서만은 탁월한 군주임 에는 분명하였다. 명과 청의 세력교체라는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 탕으로 실리외교를 수행한 것이나 화기제작을 통해 국방 강화에 주력함으로써, ‘예견된 전쟁’을 슬기롭게 막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과학 중시의 사고가 그 바탕 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의 시대에 제작된 󰡔영접도감의궤󰡕과 󰡔화기도감의궤󰡕, 󰡔흠경각영건의궤󰡕 등은 그 능력을 축소판처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광해군 정 권의 주역인 북인인 점을 고려하면, 북인의 학문적 원류가 되었던 남명학파나 화담학파의 博學, 실천 중시의 사상적 흐름이 광해군대의 국방, 외교, 과학적 분 위기와도 일정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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