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출처관을 중심으로 <허생전>에 구현된 전통적 가치관의 의미를 검토한 것이다. 동아시아 유가지식인의 핵심적 윤리관인 출처관은 기본적으로는 士階層의 계층적 이익을 바탕으로 출현하 였지만 그 내용의 公共的 성격으로 인해 동아시아 유가지식인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었다. 특히 출처의 의리에 철저하기 위해서는 생활의 유지가 어려울 수도 있었기에, 출처관은 한 편으로 생존과 관련된 실존적 결단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허생전>에 형상화된 허생의 삶은 출처의 의리에 철저한 삶이었다. 허생은 변화한 시대에 걸맞은 실질적인 능력을 갖춘 점에서 높이 평가되지만, 한편으로 현실 개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하지만 허생의 이러한 면모는 전통적 가치관인 출처관에 철저한 면모이다. 그는 출처의 의리에 철저하였기에 개인의 도덕성이 이익 때문에 훼손되지 않을 수 있었고, 개인의 능력이 권력의 도구로 활용되지 않을 수 있었다. 나아가 불의한 현실 세계를 비판할 수 있었다. 이익과 효용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한문과 교육은 무엇보다도 출처의 의리에 철저한 허생의 면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초등학교 과학교과서에 나오는 지구과학 지식에 대한 질문을 분석하는 것이다. 교육대학교 교과목 수업에서 과학교과서에 나오는 지구과학 지식에 대한 교사로서의 질문을 조별 활동을 통해 추출하였다. 질문의 종류와 빈도, 그리고 질문의 인지적 배경 출처를 조사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지구과학 부문별 질문의 종류와 집중 정도, 그리고 질문의 인지적 배경 출처에 차이가 있었다. 특히 천문관련 부문에서는 다른 부문과는 달리 개별 차시별로 질문 빈도와 집중이 다른 경향을 보이므로 이를 고려한 교수 설계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인지적 배경 출처로서 '학교' 비율이 가장 높으며, '친구'도 매우 중요한 출처이므로 동료 간 상호작용을 유도하는 협력이 학습에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인터넷'과 'TV' 같은 대중매체가 '학교'와 비슷한 높은 수준으로 인지적 배경 지식의 출처임을 보여 주고 있어서 이들을 이용한 과학 수업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셋째, 차시에 따라 질문의 집중과 종류, 빈도가 다르므로 교사 교육에서 단원별 학습주제에 대한 교육적 접근에서 이를 활용하는 교수방략이 요청된다.
儒學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됨에 주목하고, 그 실현에 진력하는 학문이다. 19세기 한말의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기타 모든 분야에 걸쳐서 미중유의 혼란과 위기에 놓여 있었다. 艮齋 田愚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난세에 처하여 견디기 어려운 고뇌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그의 출처는 그렇게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것일까? 그는 끝까지 ‘守道’로써 일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비난이 일어났는데, 간재가 외연의 행적과는 달리 후세 사람들로부터 정당하게 평가 받고자 했던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그에 대한 儒學思想史的 자리매김은 이런 논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오류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상의 관점으로 간재의 ‘去之守義의 守道意識’과 ‘自靖의 出處觀’을 살펴보았다. 간재의 ‘去之守義의 守道意識’에서는 그는 단순히 난세를 피하여 자기 한 몸 깨끗이 살겠다고 숨어 지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더라도 수도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그는 유학자의 본분은 도의 수호와 실천으로 여겼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自靖의 출처관’에서는 도를 지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사회 기강 확립을 위한 근간으로 생각하였음을 확인 하였다. 본고의 이러한 말이 간재의 학문과 의리를 억지로 정당화 한다거나 굳이 옹호하고 과대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한 사람의 학행과 인간을 이해하고 평가함에 있어서는 편협하거나 일면적인 것만을 기준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出處는 儒學에서 선비들에게 요구한 중요한 덕목이며, 많은 유학자들이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남명 조식은 출처를 君子의 큰 절조로 보았으며, 평생 ‘處士’로 실천했다.
그런데 문제는 조정의 계속된 출사요구를 거부한 남명을 퇴계와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아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학문적 體認의 결과가 아닌 개인적 기질의 결과로 이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기절’이나 ‘기상’, ‘절개’등 개인적 차원의 의미만을 강조하여, ‘정치를 외면하지 않았다’며 정치적 의미에 대해선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남명의 처사적 삶과 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남명의 ‘처’ 즉 ‘물러남’이 가지는 국가권력과의 ‘거리감’에 주목한다. 유학은 현실정치를 긍정하여 ‘나아가감(出)’을 강조했지만, ‘處-물러남’ 또한 강조했다. 이러한 ‘처’는 유학자들이 현실의 정치권력과 적절한 거리를 둠으로써 견제와 긴장을 만들어낸 요소이기도 했다.
남명은 이러한 ‘물러남의 정치학’을 잘 이해했으며, 그의 출처사상과 처사로서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남명의 處는 개인적 기절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대한 ‘경계’와 ‘비판’ ‘저항’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나아가 ‘폭력적 국가권력’을 ‘공공의 국가권력’으로 변화 시키려는 문제제기도 담고 있었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른다’는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남명의 비판과 그가 실천한 ‘물러남의 정치학’은 현대의 정치현실에 있어서도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정신으로 계승될 수 있으며, 나아가 권력의 성격을 보다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나가 현대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도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회의 80년 삶과 그것을 반영한 문학은 개인의 삶이자 격변기의 조선 지식인의 삶과 문학의 한 전형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연구의 당위 성을 획득한다. 청년 급제자인 자신을 잠룡으로 표현하며 자부심을 나타낸 만회는 ‘國計民憂’ 즉,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하고 백성의 근심을 걱정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큰 포부를 품고 출사에 나선다. 그러나 조선 말기의 지속적인 정쟁과 보수와 개혁의 격렬한 엇갈림은 수차례의 정 변을 야기하였다. 위태롭고 혼란한 시대에 그와 같은 지방 출신의 지지 기반이 없는 젊은 급제자는 포부를 펼칠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이 때문 에 요로의 재상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능력을 소개하고 본격적인 출사를 위한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기대하던 답을 얻지 못하 였다. 그러자 그는 ‘遯世無悶’을 삶의 참된 비결로 설정한다. 세속을 등지고 은둔하며 지내더라도 괴로워하지 않겠다는 뜻의 이 말은, 환로 에서 외면 받고 승진에서 제외되는 자신을 위한 만회의 자기방어적인 태도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는 조선의 몰락과 일제 강점 하의 삼십 년 동안에 더욱 경화되어, 세상의 외면에 번민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두고 세상을 살면서도 살아있지 않은 ‘不敢生世人’ 또는 ‘세상 속의 하나의 幣物’로 정의한다. 만회의 작품들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견지했던 문학적 기록이자 역 사의 격변기를 관통하는 한 유가 지식인의 삶을 형상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증거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Phosphorus (P) is an essential and major nutrient for both plants and animals. However, anthropogenic P in the environment may cause severe problems such as the deterioration of water quality. Therefore, it is essential for the Korean government to manage P in the agricultural sector. The annual P budget for Korea was 46 kg P ha-1 in 2013, placing Korea in second among Organic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countries. P surplus and deficiency in agricultural lands can be estimated according to the P budget, which is one of the OECD agri-environment indicators. In the P budget, it is important to ensure consistency in the input-output data sources, in order to apply national and regional policies for the environmentally sound management of agricultural P. This study examines the impacts on the input-output data sources in the regional P budget in Korea. P budgets were between 99-145 kg-P/ha, depending on different data sources. We suggest two recommended data combinations (DC 1 and DC 2) for reliability of the data. P budgets calculated using DC 1 and DC 2 were 128 kg-P/ha and 97 kg-P/ha, respectively. According to the results, one of the core factors affecting P budgets was crop production. In this study, DC 2 was recommended rather than DC 1 in order to consider the cultivated areas for various crops. It is also necessary to analyze the sensitivity of the coefficients used in P budget in the future.
본고는 17세기 후반에 黨爭의 와중에 평생을 살다간 農嚴金昌協(1651-1708) 의 삶속에 잠재되어 있는 出處와 去就에 대한 문제와 그의 한시 작품에 나타난 은자적 삶의 경향과 변화, 그리고 의미를 살펴본 글이다. 그는 農嚴家와 직접 연루된 己亥禮訟, 甲寅禮訟, 康申大黜陸, 己巳換局, 甲戌換局등의 浮沈을 몸소 체험하면서, 생애에서 9년간(1680-1689년)의 환로를 제외하고는 주로 강호에 은거 하며 도학과 창작저술, 그리고 후학 양성에 몰두하며 생을 마쳤다 그는 聖賢의 出處를 크게 두 가지로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伊尹과 太公과 같이 때를 얻어 자신의 도를 천하에 행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 행할 수 있으면 행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공자와 같이 미미한 관직으로도 천하를 주유하면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유형화한 출처의 원칙은 바로 명분있는 時中의 得失에 있다. 한 걸음 나아가 그는 출처란 단순히 강호에 은거하거나 세상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만약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게 된다면 나라플를 위해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出爲], 물러나 은거하게 된다면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處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 인식한 진정한 은자의 삶은 劉癡之와 같이 많은 작록으로도 은자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 진정한 은자의 삶을 선호하였다. 농암은 20대 이후 약 40년간 자신의 出處와 去就에 대한 엽장과 은자적 삶에서 느끼는 감회를 주어진 현실 공간에서 다양한 詩語와 用事를 통하여 진솔하게 시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시 세계를 살펴보면, 몇 차례의 당쟁으로 인한 그의 규정된 삶으로 인한 좌절과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 주변을 배회하면서 겪는 갖가지 고뇌와 갈등 등을 한시라는 문학적 표현 도구를 통하여 형상화한 작품이 다수를 이 루고 있다. 작품에서 그는 이미 20대 초에 世士의 일반적인 선비이기보다는 達士 의 삶을 갈망하는 귀은적 의지를 피력하였다. 특히 그는 己巳換局이후에 창작한 작품에서는 이러한 정서가 더욱 짙게 배여있다 그는 ‘五憶’ · ‘梁鴻’ · ‘九辯’ · ‘宋玉’ · ‘飯牛’ 등의 고사를 인용하거나 屈原 · 梁鴻 · 甯戚 그리고 商山에 은거 했던 四晧·康樂公등에 비유하여 주어진 현실을 작품에 투영함으로써 자신의 의지와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농암의 평생 이력과 시 세계를 살펴볼 때, 그는 젊어서부터 去就의 문제 에서 出보다는 處에 뜻을 두였기 때문에 환로에 나아갈 수 있는 많은 가회와 공간이 주어졌지만 그는 9년간의 환로를 제외하고 주로 강호에 은거하며 창작과 저술,그리고 후학 양성으로 생을 마쳤다.
Dong-gang Kim, U-ong (1540-1603) who was born in Sung-ju, Kyungsang-bukdo, studied under the guidance of Namm-yung Jo, sik as well as Toe-gye Yi, whang. However, as he himself professed, his main influence was from Mam-myung, for he often attended his seminars for Chinese Classics from the age of 24 to 33, before he went into politics. He complied and wrote Nam-myung's Lessons and Anecdotes(言行錄), and Biography(行狀), which attested to his status as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Nam-myung school. Before attending Nam-myung's lectures, Kim, U-ong was well acquainted through his father with the study of Kyung(敬), the cultivation of self as the center of the universe, and also had the Confucianist principle of employing himself in politics(出處). He advanced these studies under Nam-myung's instruction. He received a bell called Sungsung-za(惺惺子), which Nam-myung had always carried with himself as a reminder of constant awakening, and established the discipline and the practice of the study of his own mind. All of these experiences became an important qualification in the field of politics, and he clearly showed this discipline in deciding when he should go into or out of a political world, accept or decline government services. His study of Kyong, which was consistent in his achievements, characteristically put an emphasis on the study that preserves the clarity of mind, and it was a succession to Nam-myung's study of mind. It also was a little different from the study of Kyung conducted by Toe-gye school, in that Toe-gye focused on the maintenance of reverent and cautious state of mind. Kim, U-ong read books in neo-Confucianism, such as The Reflections on Things at Hands(近思綠), as well as Ju-hi's Epistle Anthology(朱書節要) edited by Yi, whang. On the basis of his interpretation of neo-Confucianism, he developed his own unique perspective in seminars of Chinese classics at the royal palace, and won a reputation as one of the best scholars of the time. Especially, his theory on the right and the wrong(辨異端) differed from that of Nam-myung, and it showed that he was influenced rather by Toe-gye. In conclusion, U-ong Kim established his own philosophical perspective through harmoniously integrating both Nam-myung's view and Toe-g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