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ared to Early Chosun Dynasty, the spatial structure of most local Eupseongs of Korea had a standardized change with the expansion and spread of the Rye-hak(禮學:a study of confucius Rite). Meanwhile in the process of rebuilding Eupseongs there was a tendency of relocation of the local government offices(官衙) and its attached facilities in terms of functions and use. Although it was PyeongSanseong Miryang Eupseong had an unreasonable spatial structure locating Gaeksa(客舍; accommodation house for visitors) in the middle of the local government office complex, and Dongheon(東軒;main office building) in the east of it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owever with the reorganization of spatial Structure of local Eupseongs after the Japanese invasion Gaeksa was moved to the foot of Adongsan where commanded a fine view of river. Dongheon was moved to the center of Eupseong for the effective management of its auxiliary organizations. It was because road system and administrative efficiency had a serious effect on deciding the location of the local government office and its attached facilities. After the Japanese invasion Hyangchoeng(鄕廳), having been out of Eupseong, also was moved to the independent location within Eupseong separate from Dongheon and Gaeksa. It seemed to take into account the autonomy of Hyangchoeng. Dongheon, Gaeksa, and Hyangchoeng which are the crucial facilities of Milyang Eupseong were arranged at each angular point of big triangle. In order to enhance the administative efficiency, the attached administrative facilities were arranged surrounding Dongheon and Hyangchoeng. The spatial structure of Milyang Eupseong in the late Choseon dynasty was of great difference from that of uniformly organized system of early Choseon Period. It was because the development of administrative function, the pursuit of efficiency, and commercial progress had a great impact on the change of urban space.
Periodically, the Japanese Castle was created in the domestic of Japan and then 2 invasions into Chosun was started. The Japanese Castle in the domestic of Japan was repaired several times by the building boom of castle before & after 2 invasions and so the initially-built type of castles was changed. Accordingly, there are much difficulties to understand the original shape of Japanese Castle. Through the Japanese Castle within Korea called as the fossil of Japanese Castle, I would like to examine & consider its building period and characteristics. The terminology called as [Two Side Stone's Wall] is that of castle which is not acknowledged in the Japanese Academic Circles. However, it means the two-fold wall of Japanese Castle which was widely applied to the fortification way in the Age of Japan Edo. The terminology of [Sori] says the stonework curve in the corner of Japanese Castle which is indicated best in the Japanese Castle. It calls the curve as like the fan frame. [Curb Stone's Wall] says the type of castle wall constructed with over 1 face in wall body of Japanese Castle. (1) About classifying the construction period of Japanese Castle, the curb stone's wall and the castle having no two side stone's wall must consider the building period as that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If there was [Sori], the two-side stone's wall was used and the place which supported the documentary data, in particular, the place having the record of contraction is considered to be confirmed as the castle constructed in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7. (2) The two-side-type stone's wall shown in the Modern Japanese Stone Castle is difficultly considered to be generated from the Japanese Castle at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in 1597. (3) The beautiful [Sori] shown in the Modern Japanese Stone Castle was started from the Japanese Castle of Korea at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7. It is difficultly considered which its indication was firstly generated by the Chaesung-Folded Segment Structure.
삼가지역 사족들이 전쟁 발발을 알게 된 것은 4월 14일 무렵으로 생각된다. 이후 전황은 학맥과 혼맥을 통해 속속 삼가 사족들에게 전해 졌을 것이다. 4월 27일 쯤 삼가현의 兎洞은 왜군 40여 기의 기습 침략 을 받았다. 삼가 읍치에 주둔하던 우병사 조대곤은 가회의 晦山書院으 로 물러가 숨었으며, 곧 이어 삼가현감 張翎도 황계로 도피했다. 결국 삼가현의 읍치와 주변 지역은 무인지경에 놓였다. 다만 회산서원 이웃의 구평리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초유사 金誠一 의 부임으로 말미암아 삼가지역 사족들의 전쟁 대응에도 변화가 일어 났다. 삼가지역의 의병 창의에는 초유사 김성일과 소모관 李魯 등의 외부적 요인만이 아니라 구평리 尹彦孝 가문의 주체적 역량이 결정적인 한 몫을 했다. 윤언효는 삼가지역의 의병 창의에서 주체적 역량으로 家僮을 징발하고 家財를 기울여 군비로 삼았으며, 이를 朴思謙·朴思齊· 盧錞·曺繼明에게 통고하였다. 다만 노쇠한 윤언효는 구평리의 윤탁, 백동리의 박사겸·박사제·박엽·정진철, 판현동의 조계명 등이 의병 소모·군량과 군수 마련, 대외 접촉 등과 같은 실무를 주관하도록 했다고 본다. 경상우도 사족들의 공론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 단계에서 제기한 경상우도 사족들의 공론은 축성을 비롯한 수령들의 가혹한 정사와 탐학을 응징하자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단계에서 사족들이 제기한 공론은 퇴주만 거듭하여 경상도를 적의 소굴로 만든 김수를 논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특정 고을이나 가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경상우도 차원의 공론이라고 봐 야 할 것이다. 특히 진사 尹彦禮는 의병장 곽재우를 모함하는 감사 김수 의 두 번에 걸친 격문을 반론하는 통유문을 주도하는 등 경상우도 사족 들의 공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윤탁의 삼가 의병은 곽재우의 의령 의병과 느슨한 연합 형태의 동맹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두 의병은 하나의 통솔체계 아래 적절하게 군무를 분장한 조직을 갖추었지만 때로 독자적인 의병 활동을 펼쳤다. 물론 윤탁은 곽재우 의병군단의 영장으로서 의병장 곽재우의 통솔 아래 경상 좌도의 현풍·창녕·영산의 수복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삼가 의병장 윤탁은 1592년 진주성 전투 때 다른 남명학파 의병장들과 함께 진주성을 外援하여 대첩에 일조하였 다. 1593년 진주성 전투 때 곽재우의 의령 의병과 달리 삼가 의병장 윤탁은 승패가 예견되던 고립무원의 진주성에 입성하였다가 성이 함락 되면서 순절하였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특정한 시공간이 지시하는 특정한 상황 속에 존재 한다. 흔히 소설의 3요소 중 하나인 배경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논문은 <최척전>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작품 속의 인물들이 존재 한 작중 배경, 즉 몇 년, 몇 월, 며칠에 어떤 장소에 있었는가를 작품 속 증거를 찾아내어 고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물이 존재하는 시간과 장소 곧 특정 한 상황이 전제되면 그때 그 곳에 있었던 인물과 사건은 그때 그 곳의 상황과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리라고 기대한다. 연구방법으로 따지 면 문학지리학의 맥을 잇고 있고 소설배경론에도 속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최척전>을 보면 <최척전>의 첫들머리에서 최척이 정상사 에게 공부를 하러 가는 시기는 1592년 5월경이고, 옥영이 남원 정상사 집에 오는 시간은 1592년 8월경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시점은 1593년 1월 말경이다. 최척이 변사정 의병부대에 종군하는 시점은 1593년 2월경이고, 두 사람이 다 시 만나는 시점은 1593년 10월 말이다. 옥영의 억지혼사의 뒷배경에는 제2차 진주성 전투 후 남원 남쪽까지 쳐들어왔다 물러간 일본군의 약탈이 있었다. 정 유재란 시기에 구례 피아골 연곡사로 피난을 간 최척 일가는 불과 하루 이틀 사 이로 엇갈리면서 동아시아 세 나라로 흩어지고 있다.
이렇게 따져놓고 보면 <최척전>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 즉 인물들이 존재 하고 있던 정확한 날짜와 장소를 거의 재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작품 속 인물 들의 형상이나 주제의식 등에 대한 좀 더 진전된 형태의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 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에는 당파적 성향이 강하다. 전란이 일어나기 9년 전 (1583)에 栗谷 李珥가 10만 양병을 주장한 것, 1590-91년 通信使 일행의 보고 가 正使, 副使 간에 서로 달랐던 것에 대한 논란이 대표적이다. 두 가지는 이 시 대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데도 객관적 분석, 판단보다도 분쟁 적 측면이 필요이상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당시 사대부들은 心性 도야를 중시하는 性理學者들이었다. 따라서 공과 사를 분명히 가리고, 강한 是非之心 을 가졌다. 조정에 나아와서는 聖聰, 곧 군주의 옳은 판단을 이끄는 데 기여하 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정사를 논할 때 자신의 견해를 엄정하게 표현하는 한편, 동료의 진언에 잘못이 보이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논척하였다. 그러나 상대 의 논변이 설득력이 있거나 실제의 사세에서 자신의 견해가 잘못된 것을 발견 하면 이를 인정하기를 미덕으로 삼았다. 10만 양병설이나 통신사 보고 건에 관 한 오늘날의 대척적 인식은 사실은 당대 관련자들 사이의 인식보다도 더 과장 된 면이 없지 않다. 이 글은 당대의 관련 기록에 근거하여 후대의 부정적 윤색을 걷어내어 바른 지식과 인식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栗谷 李珥의 10 만 양병제안, 鶴峰 金誠一의 의병 招諭의 역할, 西厓 柳成龍의 관군 재건의 공 로를 주요 논제로 한다.
이 논문은 慶尙右道 義兵 봉기의 배경, 金誠一이 작성한 招諭文의 역사적 특징, 招諭 활동의 정치적 함의와 기여를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재고찰한 연구이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 初戰의 무력한 패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한 경상도 지역 민 심 이반의 근본적 원인은 수령들의 무능과 비겁 때문이라기보다는 전쟁 이 전 적극적 군비 확충을 시도한 중앙 朝廷에 대한 지역민의 반발 때문이었다. 초반 전황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 조정은 탄탄한 지역 기반을 가진 재 지 사족층(在地士族層)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었던 것 은, 조정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한 경상도 재지 사족층의 잠재력에는 그 들이 불법으로 탈점한 토지, 노비로 위장하여 거느린 농민, 마땅히 수행해야 할 軍役을 회피하는 데 성공한 사족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 한 것들은 임진왜란 敗因의 하나로 흔히 언급되는 軍政 문란을 포함한 失政 의 결과물이었다. 둘째, 김성일의 초유문은 지역민을 결집하고 의병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초유의 대상인 경상도 지역의 士와 民을 가장 적절하게 설득하기 위한 논리와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階序的 신분 구조와 華夷觀과 같은 당대인들의 특징적인 心性이 반영되어 있었다. 초유문은 크게 보아 義理와 利害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지역민을 설득하고 자 하였다. 셋째, 중앙 조정은 안동 출신의 명망 있는 前職 高官이자 南冥學派와 긴밀 한 유대가 있는 김성일에게 招諭使의 職名을 제수하여 경상우도에 파견하였 다. 김성일은 의병의 봉기를 장려·보장함으로써 武裝 起義할 경우 반란 세력 으로 오인 받을 수 있다는 재지 사족의 우려를 拂拭시켰고, 도주·관망 상태 에 있던 지방관과 지역민을 결집하여 저항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 였다. 나아가, 그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누적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던 관 군과 의병의 충돌을 적절히 타협·조정하였다. 경상우도 의병의 봉기는 지역 의 방어뿐만 아니라, 이반된 민심을 돌이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일본군의 宣撫 공작과 원활한 현지 조달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 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