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tudy aims to examine how the Gyeongseong Hokuk Shrine established the natural environment in Yongs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Chosen Hokuk Shrines. In the colonies, the establishment of shrines strongly tended to symbolize Imperial Japan and visually represent its ruling logic. The Gyeongseong Hokuk Shrine holds historical significance as a place to commemorate soldiers who died for the Emperor and as a tool of colonial rule, but further discussion is needed on how it was organized within the Yongsan. This study focuses on Hokuk Shrine planning under which the Shrine Bureau of Home Ministry constructed similar shrines across Japan by the Ministry of Home Affairs Ordinance No. 12 of 1939. As a result, this study examines the environment and architectural styles of Hokuk Shrines through examples from Japan and uses this analysis to explore the characteristics of Gyeongseong Hokuk Shrine and its relationship with the Yongsan. The significance of this research lies in highlighting the historical urban significance of Yongsan during the modern period.
This study diagnosed difference of preference about demand performance with design of men's suit according to demographic characteristic and figured out Needs of adult man consumers for men's suit. This study is survey research. In order to collect data, a questionnaire was used. To analyze the collected data, fact analysis, χ2 test, ANOVA, Duncan's multiple comparisons and the rest were carried out with using SPSS 14.0. Result of this study could get as following. According to silhouette and color, there was difference to age, attainments in scholarship and preference according to job. Also young people preferred fitted-silhouette and in occasion of color, all of them preferred best black. It was no difference according to demographic characteristic in preferring pattern but preferred best solid on the whole. Demand performance of men's suit appeared by five main causes of design, practicality, comfort, appearance appropriateness, another person awareness and functional materials. And most main causes showed difference according to demographic characteristic.
담산신사(談山神社)의 전신(前身)은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불교(佛敎)전래 이후 불교문화(佛敎文化)가 번성하던 7세기에 건립된 묘악사(妙樂寺)이다. 근세(近世)에 들어와서 국가적인 폐불훼석(?佛毁?)으로 신사(神社)로 바뀌었으므로 고대(古代)로부터의 1200년간 절의 불공(佛供)양식이 그대로 답습되어 전승되어 왔다. 신찬(神饌)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고대불교문화(古代佛敎文化)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의 교류가 빈번했던 한국고대의 식문화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되리라 본다. 1) 고배(高排) 음식의 형태는 본신사(本神社)와 동시대(同時代) 동계통(同系統)의 춘일대사(春日大社)나 법륭사(法隆寺) 등 고대(古代)의 절이나 신사(神社)에 남아 있어서 현존하는 한국 고배차림과 상통하는 점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단지 일본은 현재로는 사자(死者)나 신(神)에게 대한 제사에만 남아 있다는 점이 한국은 경사스런 행사에도 널리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또 한가지는 본신사(本神社)의 고배형태가 단순한 원주형(圓柱型)에서상부가 지붕 같이 넓어지는 형태로 변형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고배음식은 실제로 행사가 끝나면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비해 「백미어식(百味御食)」은 형태만을 화려하게 만든 상징적인 것이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외관상의 모양만을 만든 것이라 보고 신인공식(神人供食)의 사상으로 볼 때 고대(古代)에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였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고배음식은 원래 불교, 도교, 유교, 샤마니즘 등의 복합적인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아 인도와 중국에 근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뒷바침이 될만한 것이 없어서 앞으로 뿌리와 유래 그리고 변천과정 등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2) 고배음식 위의 장식은 고추나 꽈리 등의 열매를 죽곶(竹串)(대나무 꽂이)에 꽂아서 더욱 화려하게 만든 점이 특징이다. 이는 이조(李朝)시대 궁중연회행사에서 고배음식에 상화(床花)로 꽂는데 까지의 발전과정에서 극히 시초단계의 형태로 본다. 생열매나 꽃이 보였고 다음이 떡으로 새나 꽃모양을 만들어 장식했고(사진 10) 그 다음이 계절과 관계없이 실크나 종이로 조화(造花)를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3) 화도(和稻)의 문양(紋樣)은 매년 다르나 만형(卍型)은 필히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다양한 종류중에서 선택한 것으로 보아 문양이 고대로부터 다양하게 발전했었음을 알 수 있고 만(卍)자를 필히 넣는 것은 본신사(本神社)가 절이였고 절형식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4) 황도(荒稻) 본(本) 제사에서는 현재의 벼보다 대가 수십센치나 긴 흑(黑), 백(白), 적(赤)등 3종류의 고대미(古代米)를 쓰고 있다. 적미(赤米)와 흑미(黑米)는 현미(玄米)의 일종으로서 품종(品種)과 계통(系統)에 따라서 종피(種皮)의 색이 적색계(赤色系)는 적미(赤米), 흑자색(黑紫色)인 것을 흑미(黑米)로 칭하여 사용했다. 백미(白米)는 현재의 도정된 쌀이라고 본다. 이도 원래는 대가 긴 고대미(古代米)였다. 춘일대사(春日大社) 제사에도 흑미반(黑米飯)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개량된 쌀이 되기 이전의 형태는 물론 최초에는 현미를 식용했던 점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술이 달린 벼의 대를 그대로 장식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쌀을 귀중한 식량으로 꼽았던 것으로 본다. 5) 과실어공(果實御供)의 과일은 각종 야생열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우리가 식용하지 않는 과일, 채소, 구근류가 보인다. 고대식용(古代食用)식물의 재연구조사가 필요하다. 6) 고대(古代)제사나 현재 고배음식에서 보이는 오색(五色)은 오행설(五行說)에 근거를 두나 고대(古代) 신앙부터 다수의 종교의 부합적인 사상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본다.
일본(日本) 내량시대(奈良時代)를 대표(代表)하는 춘일대사(春日大社) 약궁제(若宮祭)는 한반도(韓半島)와 종교적, 문화적 문류(文流)가 빈번하던 시대에 형성된 등원가(藤原家)의 씨사(氏社)로서의 제사이며 역사적(歷史的)으로도 백제인(百濟人)과의 관계가 밀접하여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식생활(食生活)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리라 보아 조사한 것이다. 1. 좌속신(坐俗神), 불교(佛敎), 유교식(儒敎式) 제사(祭祀) 및 경사스런 축하연에 쓰이는 종이, 실크, 떡으로 만든 조화(造花)장식은 최초에는 계절에 맞는 생화(生花)를 쓰다가 차츰 다양하게 변화했음이 보인다. 본(本) 약궁제(若宮祭)에서의 도라지꽃은 한반도에서 쓰여진 흔적이 없으나 일본(日本)에서는 제사(祭祀)로 쓰였다. 2. 소(小), 대어반(大御飯)은 시루떡의 시작이였고 백미(白米) 이전에는 현미(玄米)로 만들었다. 다시 쌀 외에 찹쌀, 팥 등 여러가지 곡물을 가미하게 됐다. 3. 채소의 종류는 근채류(根菜類)가 귀중한 채소로 꼽혔고 극히 단순한 조리법이였으리라 본다. 4. 당과자(唐菓子)는 쌀가루를 여러가지 형을 만들어 쪄서 튀겨서 먹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의 과자와 전병의 원조임을 알 수 있다. 5. 8의 어과자(御菓子)에서 둥근 메떡은 현재의 절편이나 가래떡의 시작이였으며 일본(日本)은 기호상 찰떡으로 변했다고 본다. 6. 제사에 최근에도 쓰여지는 곶감, 밤은 고대(古代)부터 이어온 식품으로 밤은 그 껍질채로 쓰여졌고 그 외의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갖가지 과일이 쓰여진 것으로 본다. 7. 염분(染分)과 사색(四色)은 적(赤), 황(黃), 청(靑), 백색(白色)을 말하며 그 색채가 원시적인 선명한 색깔로 본제(本祭)의 상징이며 대표적인 제물이다. 한반도에서는 과자, 사탕, 떡, 과일 등을 주로 이 4가지 색깔로 물들여 제사뿐만 아니라 경사스런 잔치에도 높이 고여서 축하의 뜻으로 차렸다. 8. 성물(盛物)에서는 검은콩, 흰콩, 팥, 비자로서 그 당시 중요한 곡물로서 나타났다. 9. 술은 청주(淸酒)를 쓴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시대의 고도(高度)의 제조법이 백제로부터 전해져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신찬(神饌)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사진 1, 2, 3에서 보여주듯이 직접 본(本) 행사(行事)에 참여하면서 제단형태, 의상, 절차, 그 외의 음악과 무용, 장식 등이 현존하는 한국의 전통적 풍물과 그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본 제사를 통하여 고대식(古代食)을 추정하는데 간접적인 뒷받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