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6

        1.
        2021.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경상우도에 연고를 둔 조선 후기 노론⋅호론계의 재야 유학자인 함인재 정국채가 선보인 사서경학의 세계를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정국채가 남긴 문집인 『함인재유고(단)』에 수록된 『논어』⋅『맹자』⋅『대학』⋅『중용』 방면의 기록들을 대상으로 한 검토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국 채의 경우 문자 학습과 병행된 가학적 연원에서 출발한 끝에, 차츰 논맹과 용학으로 이뤄진 사서경학의 세계로 진입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정국채가 선보인 사서경학은 정치한 담론들을 결집시킨 경전 해석학의 세계와는 대조를 연출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국채가 남긴 사서경학의 경우, 논의 전개가 극히 간략하면서도 일회성 수준에 그친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자주에 대한 비판적 언술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본격 적인 경전 해석학과는 분명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함인재유고(단)』에는 『시경』⋅『서경』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할뿐더러, 여타의 경전들에 대해서도 극히 간략한 기록만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사서경학 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의 언술을 남겼는데, 이는 정국채가 추구했 던 학문세계에서 사서가 차지하는 비중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준다. 특히 정국채는 『중용』에 큰 의미를 부여한 특징이 발견되며, 『논어』⋅『맹자』⋅『대학』의 경우는 그가 착지했던 사상적 입각점이 원시유학이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한편 정국채의 사서경학이 다소 단조로웠던 이면에는, 주자의 경전 해석학에 반기를 들기 어려웠던 노론계 학풍과도 무관하지 않았 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노론 호론계 유자였던 정국채가 선보인 사서 경학의 세계는 상대적으로 연구 성과가 미미한 향반 계층의 지식인이 이룩한 경학적 수준의 한 실태를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연구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기존 한국유학사상사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 추이란, 이미 그 존재가 드러나 잘 알려진 중량감 있는 인물들에 국한된 경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7,000원
        2.
        2011.01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李二曲(1627-1705),名顒,或 稱呼容,字 中孚,普通叫二曲先生。陝西省 盩厔 出身,平生沒有過應試科舉。從以學問傳名聲開始,多次推薦過仕宦,不應平生過貧寒的生活,熱烈地研究學問。當時,同二曲繼續在一起學問的交流的顧炎武(1613-1682)是評價二曲的學問,說:“在貧窮的生活,用功學問,沒有老師,完成學問,是我不如李中孚。” 這樣,二曲是在困難的家庭的生活中,沒有老師,用功學問,在這裏 母親彭氏的影響比較多了。 母親 說:“古人都是你的老師”鼓勵一下,二曲加生氣、発奮來,獨學成爲一家。 由明代(1368∼1644)終,依滿洲族建清朝,在親自看到歷史的情況中,爲學問的二曲,他的學問的特色是宋代朱子 或 明代王陽明中,不便不依的姿勢,完成爲自身的獨特的學術世界。二曲 說: “在學術,二程・朱子, 陸象山・王陽明的存在是好象在輪車左輪和右輪似的,不可能消除一點的地方。因此,一邊高來,一邊退去,都爲衡了。”這說的話,不是二曲試圖兩處都折衷,而不夠學派以爲「反身実踐」的根據,表出來了。這樣,以二曲的學問的特徵,明確表示起的話就是‘悔過自新’與‘明體適用’。‘悔過自新’就是說,覺醒自身的過錯,自身親自新地改善的,而‘明體適用’就是說,將從本生具備的本體保存好,適應現實的生活,成爲經世致用的意思。在此本稿,收集李二曲的著述與言說的『二曲集』中,以『四書反身録』(以下,『反身録』爲中心,觀察經學觀,還觀察,他的獨唱的學說的‘悔過自新說’與‘明體適用說’怎樣爲具顯的程度。『反身録』是對四書的李二曲的談論,門人 王心敬親自筆史的記錄。在「草稿」階段沒有打算刊行豫定,而把這「草稿」當時的學憲的許淝水讀下去,要表達把‘反身的 旨風’給看士林,做刊行。 關於這『反身録』 的評價中,在『欽定四庫全書總目』(巻三十七 経部三十七 四書類存目),根據對於『大學』的‘格物’的說明,李二曲的學的基盤在於王陽明。另外,他的兒子對於二曲的四書的解釋,評價說: 該當『四書集註』的‘羽翼’。可知道在這兩種的評價中,後代的人們的評價是隨著看的觀點相互不一樣的。那麽,二曲的四書解釋怎樣看的妥當吧?將對此的解釋的端緒查到出刊『李二曲』飜譯書的荒木見悟氏的如下說明。“二曲的思想 外觀是好象折衷朱子學和陽明學表示,那個從他的深刻的內省與體験,確立自身的主體,在該改革世風的祈願,自由地受容和溶解,其存的教學不構。” 即 這樣說,在悔過自新説’與‘明體適用說’ 立腳,『反身録』成爲構成。特別,弟子的王心敬是對於二曲的四書解釋 說:“一個人愉快地反身実踐,人欲改變天理,身心爲平康。人人愉快地反身実踐,人人都爲君子,世上好象堯舜時代。如此,是至極的政治的根本。集中地讀四書的人不得不忽視。” 在此說的話‘反身’與‘實踐’相當於‘悔過自新’與‘明體適用’。由此觀察『反身録』,二曲的四書理解是一邊有脫離『四書集註』的結構,一邊有結構裏爲展開。也把那個叫對於李二曲的四書理解的矛盾點。但是,二曲爲志向的儒學不滿足於理論的糾明,不斷地摸索實踐的儒學。這樣,由於他的實踐重視思想爲經學理解的本質,如當脫離實踐的時候,果敢該脫離『四書集註』的結構。李二曲在章句構,也批評把沒有走向內容的詞的學問叫俗學。而可以說他的學問是悔過自新,明白明體,適應的實踐的學問。
        3.
        202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에른스트 파베르(Ernst Faber, 1839-1899, 중국명: 花之安)는 독일 선교 사로서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 중문 저서인 󰡔자서 조동󰡕(1884)과 󰡔경학불염정󰡕(1898)은 19세기 동양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서적으로 당시 유교 사회의 형식주의를 지적하며 기독교 선교의 길을 제시했다. 본 연구는 그의 이 두 저서에 기초해 어떻게 격물치지를 이해해 나가는지 고찰했다. 특히 그는 격물치지에서 사물마다 궁리하는 과정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런 궁리가 인식 주체인 인간의 마음을 추구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즉 격물은 마음을 정미하게 해 자세히 살피는 것으로, 이런 마음을 찾아 나가는 길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길이라고 보았 다. 오직 하나님만이 천하의 참 주인으로 이를 섬길 때 인간 마음의 지혜 가 격물의 길로 나갈 수 있다. 본 연구는 파베르가 격물치지에 대한 기독 교적 해석을 통해 중국 전통의 태극, 리를 하나님의 종처럼 그 창조와 주 재 시에 사용하는 도구로 보고자 함을 고찰했다. 분명, 파베르는 선교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태극, 리를 폐기하기보다 이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는 기독교적 관점을 견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를 통해 19세기 기독교와 유교의 또 다른 대화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4.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우리와 일본의 지성계에서 나타나는 中華思想은 ‘夏夷의 세계관 앞 에 받은 상처의 치유와 극복이라는 지성사적 노력’의 한 모습이라고 나는 본다. 우리와 일본은 각자가 모두 자신의 나라가 중국보다 한층 높은 수준의 학문을 축적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곧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자기 나라를 문명의 주인이라고 자임하게 만든 힘이다. 중화주의의 극복과 해체는 이렇게 중화주의의 내부로부 터 이루어졌다. 본고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 조선과 일본이 내세웠던 자부심의 실체로써 두 나라의 경학 성과의 실상을 비교해 보았다. 그 방법으로 먼저 朝日 經學界의 土壤과 雰圍氣를 살펴보고, 이어 대학의 ‘讀音’, ‘著者’, ‘明德과 新民’ 세 爭點에 대한 註釋 양상을 비교하였다. 조선은 朱子學이 經學界의 主流를 이루는 가운데 書院을 중심으로 師說을 繼承·深化하였고, 일본은 자유로운 藩校와 私塾의 분위기 속에 自家의 見解를 제출한 경우가 많았다. 朝鮮 經學家들은 朱子學 內的 論理의 精緻한 分析을 통해 獨自的인 철학 논쟁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논제를 만들어가며 獨自的인 학문 체계 를 구축하였다. 일본의 경학가들은 학자마다 이전의 성과를 모두 부정 하고 처음부터 각자의 학문의 체계를 새로이 쌓는 듯한 보습을 보였다. 知性의 浪費라는 측면이 문제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양성과 비판의 자유 위에서 거둔 무수한 獨創的인 견해들이야 말로 일본 학계 를 풍성하게 한 힘이었다. 요컨대 朝日 양국의 특색 있는 경학적 성과는 ‘中華主意 克復과 解體’ 의 바탕이 되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 성과를 밑거름으로 한 양국의 ‘中華主意 克復과 解體’ 과정의 구체적인 진행 양상은 이후의 연구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5.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곽종석(1846-1919)은 조선이 멸망할 즈음에 살았던 문장가이자 사상가이며 또한 애국지사였다. 곽종석은 사서오경에 대한 경학적 견해를 다양하게 남겨놓 았는데, 특히 그의 논어학은 주목할 만하다. 곽종석 논어학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주자학파의 주석 에 대한 정밀한 검토이며, 둘째는 경문의 독자적 해석, 셋째는 ‘心卽理’사상에 의거한 『논어』 해석 등이다. 곽종석 논어학의 이러한 세 층위는 그의 논어학이 가지는 특징인 동시에 조선논어학사에서 일정한 위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 중 첫 번째 특징인 주자학파의 주석에 대한 정밀한 검토는 조선주자학파 논어학의 보편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경문에 대한 독자적 이해와 심즉리 사상에 의거한 『논어』 해석은 퇴계학파의 경학적 전통안에서 충분하게 논의될 수 있는 지점이다. 퇴계는 주자 경학의 충실한 계승자였지만 동시에 독자적으로 경문을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곽종석의 스승인 이진상은 심즉리설을 주장하면서 『논어』 해석에서 이를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곽종석의 독자적 경 문해석과 심즉리설에 의거한 『논어』 해석은 모두 그가 스승으로 삼은 퇴계와 이진상의 󰡔논어󰡕 해석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곽종석의 논 어학을 조선주자학파, 더 좁게는 퇴계학파 논어학의 계승자적 지점에서 그 위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