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paper studied Lee Han-Choel’s career who was known as the first Korean who had participated in several survey and repair projects of Korean historic buildings as a field engineer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This paper investigated documents and drawings to find out what he had done specifically in the field, and distinguished the records he had written by handwriting comparison method. In addition, the author analyzed the contents of the articles he published and clarified their significance in Korean architectural history. Through this study, the author expected to clarify Lee’s historical status as the first Korean modern expert in the field of historic building conservation, and to supplement the research for the history of Kore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최술은 韓愈의 「原道」에 나오는 道統論을 인용하여, ‘공자가 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로 이어지는 道統의 전수자’라는 절대적인 위상을 설정하고 있다. 맹자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며 亂世로 접어드는 혼란 속에서 孔子이후의 道統의 전수자로 孟子를 설정한 것이다. 최술은 ‘孔子를 존재할 수 있게 한’ 孔子의 弟子들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그는 공자의 弟子24人을 德과 功勞에 따라 顔子부터 子思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배치하여 이들의 행적을 상세하게 고증하였다. 공자제자들의 위상을 순차적으로 설정하면서, 최술은 기존의 이른바 ‘孔門十哲’을 과감히 해체했다. 현재 成均館文廟配享順位에 포함된 孔門十哲중에서 12. 子游, 13. 子夏, 14. 子張, 15. 宰我, 16. 冉有5인이 10위권 밖으로 빼고, 8. 有子, 9. 原思, 10. 公西華, 11. 子賤4人을 이들보다 훨씬 앞선 순위에 배치시킨 것이다. 또한 최술은 『孟子』의 내용을 정치하게 분석하여 『孟子』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공과를 분류하였다. 그는 이들을 樂正子․公都子․屋廬子, 萬章․公孫丑․充虞과 같은 “수준 높은 제자[高第弟子]” 두 그룹, 陳臻․徐辟과 같은 “차등의 제자그룹”, 그리고 陳代․彭更․咸丘蒙․桃應과 같은 “제자의 여부를 단정할 수 없는 그룹”까지 4등급으로 나누어 철저하게 고증하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Western perspective on the food and food culture of Modern Times in Korea (from the late of Joseon Dynasty until Japanese colonial era). Literature and written records were analyzed. This analysis revealed that the heart of the mill in this period involved rice, and that a common beverage was sungnyung made from boiled scorched rice (in contrast to tea as the common beverage in Japan or China). The most important subsidiary food in Joseon was vegetables, especially Kimchi. Westerners viewed Kimchi as a smell symbolizing Joseon and their meal times. Even though both Kimchi and cheese are fermented food, just like Westerners could not stand the smell of Kimchi, Koreans viewed the smell of cheese unpleasant. Westerners viewed German sauerkraut as Western food counterpart to Kimchi, as sauerkraut is also fermented food made of cabbage. Regarding the eating of dog meat in Joseon, most Westerners viewed it as brutal; however some interpreted it as a difference in food culture. In addition, the eating of raw fish and its intestines felt crude to Westerners. The biggest difference between Joseon's food and Western food was that Joseon had no dairy products and no sugar. The most highly preferred fruit for Westerners was the persimmon, and ginseng was already widely recognized and recorded as a medicinal plant. Joseon's desserts were also favorably evaluated. In contrast, the excessive gluttony, heavy drinking, and unsanitary conditions in Joseon were problems pointed out in many records.
미술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로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새로운 접근방법에서는 후원자들과 그들의 성별, 사회적인 지위가 작품제작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또는 미술이 특정집단의 사람이 살아온 환경 속에서 어떻게 소통과 자기표현 수단으로 사용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은 조선시대 예술가들을 단순히 중국 수입품에 의존하는 이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당시의 미술을 볼 수 있게 하였고 이를 통해 그들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표현하기 위한 영감으로써 중국미술의 경향을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보여준다. 조선 초기 회화 특히 안견의 <몽유도원도, 1447년> 와 신숙주의 「화기」는 조선전기 문인들이 아직 사회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한 시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중국의 이론적 담론, 도상 및 양식들을 사용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몽유도원도>는중국의시인인 도잠(연명, 365-427)이쓴 「도화원기」 에서 비롯되었으나 도잠의 시와 중국 도상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고 있다. 「도화원기」의 현실도피적 측면은 안평대군이 당시 처해있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해석할 수 있다. 양식적으로는 <몽유도원도>에서중국 북송대의 화파인 이곽파의특징을 찾을 수 있다.「화기」서론 부분의 한유와 백낙천에 대한 언급과, 소식을 상기시키는 「화기」끝부분의 철학적 담론은 안평대군의 골동수집 취향, 안견의 회화 양식과 당대의 지적 문화적 경향과 잘 부합된다. 곽희 양식에 대한 인식, 도화원기의 도상학, 한유의 미술품 수집에 대한 저술과 소식과 동시대인들의 미학적 문학활동은 고려 왕조의 어느 시기엔가 한국의 학자와 화가들에게 전달되었다. 조선초기까지 이러한 인식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적 정치적 위치를 확고히 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었던 학식 있는 문인 집단에게 있어서 실질적이고 이론적인 소재가 되었다.
선교 현지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피선교지 주민을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이들은 과연 하나님을 받아들일 만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타자”에 대한 초기의 질문을 제기한 사람들이 바로16세기부터 선교현장으로 파견되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초기 질문을 16세기 후반 페루에서 제기했던 호세 데 아코스타(1572-1586)와 17세기 초반 남 인도에서 제기했던 로베르토 데노빌리(1606-1656)의 저술을 통해, 이들 선교사들이 어떻게 최초로 종교적 타자를 이해하고 분류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호세 데 아코스타는 1590년에 편찬한HISTORIA란 책을 통해 페루 지역의 원주민들이 콜럼버스 이전부터 유지해 오던 토착 종교를 면밀하게분석했다. 아코스타는 이 책에서 이중적인 접근방식을 취한다. 아코스타에 의하면 페루 원주민들은 후아카스(HUACAS)라는 끔찍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져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알수있는 능력을 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중적인 타자에 대한 이해는 그의 관찰의 프레임으로 작용하고 있는 스페인 시골 주민들의 미신에 가까운 가톨릭 신앙과연관이있다. 16세기 스페인 내부의 종교재판 기록과 아코스타의 페루 주민에 대한 비판을 비교해 보면 명백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깊은 종교성과 동시에 미신적인 의식을 선호했던 스페인 시골 주민들의 신앙에 대한 평가와 페루 주민의 종교성에 대한 평가가 흡사한 이유는, 아코스타가 페루 주민에 대한 해석에 사실상 스페인 시골 주민에 대한 이해를 투영시킨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코스타에 있어서 타자에 대한 해석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내부적 이해와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활동하며 이른바 상류층 우선 접근 선교방식으로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로베르토 데노빌리의 경우에서도 같은 투영 현상이 나타난다. 데노빌리는 자신을 인도의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민과 동일시하면서, 심지어 브라민의 신 이해를 자신의 신 이해와 일치시키는 신학적 대담성을 보이는 글을 발표했다. 이는 인도 사회에서 브라민 카스트가 차지하는 학문적, 사회적 위상을 자신이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과 차별되는 귀족 및 학자의 위상을 투영시킨 결과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투영의 과정을 1613년 어간의 인도 선교 역사와 비교하면서 로베르토 데노빌리의 “타자”에 대한 이해를 분석한다. 결국 아코스타와 데노빌리와 같은 초기 선교사들은 종교적 타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자기 정체성의 이해 정도를 투영시켜 타자를 규정하게 된다는 것을 선교 역사적 경험과 남겨진 초기 선교사 문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본 연구는 율곡의 저서 중 가정의 자녀교육과 관련 깊은「동거계사(同居戒辭)」,「격몽요결(擊蒙要訣)」사친장(事親章).거가장(居家章),「성학집요(聖學輯要)」정가편(正家篇),「소아수지(小兒須知)」에 나타난 자녀교육관을 자녀교육의 목표.내용.방법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율곡의 저술에 나타난 자녀교육의 목표는 첫째, 가정의 법도를 알고 실천하며,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 기르기 둘째,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는 부모됨을 배우고 익히기, 셋째, 분수를 지키기 위하여 마음의 절제력 기르기로 나타났다. 위와 같은 목표는 자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교육,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한 방향성 있는 자녀교육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자녀교육의 내용으로는 첫째, 자애와 공경을 바탕으로 한 가정의 법도로 부모와 자녀관계의 도리로서 효, 부부 관계의 도리로서 예, 형제관계에 있어서의 우애, 장유관계로서의 예로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는 예가 나타났으며, 둘째,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는 부모됨을 준비하기 위한 내용으로 심신이 건강한 아이를 얻기 위한 부모의 정성과 노력; 태교와 교육자로서의 부모됨의 준비로서 자녀교육의 순서; 입교의차례, 자녀의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향한 부모의 관심; 기본생활습관교육이 나타났다. 셋째, 중용의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절제를 가르치기 위하여 분수를 지키기 위한 마음의 중심잡기와 의롭기 위한 절검을 찾아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율곡의 저술에 나타난 자녀교육의 방법은 수범교육, 적기.습관화 교육, 앎과 행동.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교육으로써 지행병진교육 및 표리상응교육, 마지막으로 잘못을 일깨우는 이성적 대화와 행위로써 훈계로 나타났다. 율곡의 저술에 나타난 자녀교육관은 그 모습 그대로 접목이 가능하진 않지만 교육을 통해 실현되어야 할 인간과 교육의 본질과 방향을 담고 있으므로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어떠한 의식이나 형태로든 앞으로도 이어져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함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南冥 曺植(1501–1572)의 학문에 대한 연구저술의 성과에 관한 분석”이다. 이를 위하여 이 논문에서는 다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첫째, 『남명집』과 譯註本의 종류와 그 특징. 둘째, 초기 남명학연구의 문제형성과 관련된 저술. 셋째, 남명학연구의 다양화와 심화정도. 넷째, 퇴계학과의 비교연구의 내용과 의미. 다섯째, 南冥學의 傳承에 관한 두 유형에 관한 분석이다.
이상의 문제에 대한 연구결과 첫째, 『남명집』에 대한 판본정리와 定本化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남명학의 학문적 사상적 특성을 정리할 때 틀에 박힌 類型化를 지양해야 한다. 셋째, 단순한 비교보다는 남명학의 독창적 성격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한다. 넷째, 南冥評傳의 저술이 꼭 필요하다. 다섯째, 남명학파와 門 人등 남명학 전반에 관한 체계적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동안 남명학 연구저술은 대부분 개인이 이미 발표하였던 연구논문을 주제별로 엮어서 출판하였거나, 기획된 목적에 따라 전문연구자들의 개별적 연구논문을 모아서 편집한 책들이다. 이러한 상황은 남명학의 정확한 정체성을 밝히거나, 남명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미흡함을 말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鄭逑(寒岡, 1543-1620)가 무흘정사를 건립하게 된 이유와 과정, 무흘정사에서의 저술활동, 무흘정사의 연혁 등을 두루 고찰한 것이다. 무흘정 사에는 정구의 유품뿐만 아니라 그가 수집·편찬한 수 천권의 서적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영남의 선비들은 이곳에서 책을 열람하고 강학활동을 하는 등 일련 의 ‘무흘 아카데미’를 형성하였다. 최근에는 무흘정사의 書目 일부가 고문서의 형태로 발견되기도 했다. 사정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학계나 지방자치단체에 서는 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한 것이 실정이다. 본고는 여기에 일정한 문 제를 제기하면서 무흘정사를 중심으로 한 무흘의 본격적인 생활문화 연구의 단 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기획된 것이다. 무흘동천에 대한 정구의 관심은 이른 시기부터 있어왔는데, 그가 만년에 무흘 행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避地意識에 기반한 독서양성이었다. 평소 친분이 두텁던 벗의 방문까지 정중히 사양하면서 독서를 통한 養性을 실천하고자 하였 던 것이다. 정구는 安東大都護府使 등의 관직을 맡기도 하지만 7-8년동안 이곳 에서 보내면서 다양한 분야의 저술활동을 전개한다. 성리학 분야의 염락갱장 록·수사언인록·곡산동암지, 역사전기 분야의 경현속록·와룡암지·치 란제요·고금인물지·유선속록, 지방지 분야의 복주지 등이 바로 그것이 다. 이 같은 저술활동을 통해 그는 공자의 仁思想에 근간을 둔 주자학의 연원과 그 조선적 계승을 道脈에 입각하여 명확히 하고자 했다. 무흘정사 건립에는 정구가 직접 공사감독을 할 만큼 많은 정성을 기울인다. 그 위치는 무흘구곡 가운데 와룡암과 만월담 사이에 있었으나 만월담에 더욱 밀착되어 있었다. 1604년 건립 당시에는 초가 3간으로 된 서운암을 중심으로 하여 2간의 산천암, 비설교와 자이헌 등 다양한 부속시설들이 있었다. 정구가 세상을 뜬 후 무흘정사는 위치를 달리하여 36간의 무흘정사와 3동의 장서각으 로 규모가 확대되기도 하였고, 여러 곡절을 거치면서 현재 1922년에 세운 4간 의 정사와 庖舍 약간 동이 남아 있다. 특히 1784년(갑진, 정조8)에는 후손이 중 심이 되어 무흘정사를 새로 짓고 무흘구곡 전체에 대한 정비작업을 하였다. 이 를 기념하기 위하여 「무흘구곡도」를 그리고 다양한 시를 짓기도 한다. 무흘정사는 정구가 활동할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탐방 하면서 무흘 문화를 만들어갔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정구 당대에는 사승관계 를 형성하는 제자들이 이곳을 주로 찾았고, 정구가 세상을 뜬 후에는 정구를 추 모하는 많은 선비들이 답사객이 되어 심방하였다. 무엇보다도 무흘에는 정구가 수집하고 저술한 이른바 鄭氏藏書가 장서각 서운암에 보관되어 있어 영남 선비 들의 독서와 강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