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에서는 고전기 아테네 도기에 대한 미술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관점과 접근 방법이 ‘도기화’의 조형 양식과 주제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장 가치와 사회적 기능에 대한 문 화적 맥락 탐구로 전환되어 온 양상을 고찰한다. 20세기 초 존 D. 비즐리와 에드몬드 포티 에가 시작한 자료 집체 작업으로부터 고전기 그리스 세계에서 아테네산 적회식 도기의 시장 가격, 유통과 소비 양상, 도공과 도기화가의 제조 공방의 운영 양상 등에 대한 동시대 쟁점 들은 고대 그리스 회화 장식도기 연구에서 미술사적 패러다임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그리고 사회적 맥락에 대한 기초 자료의 필요성이 어떻게 증대되었는지 보여준다.
요나라는 동서의 교통로 중심에 있었던 지리적인 이점으로 서쪽으로는 이슬람 문명과 적 극 교류하며 상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접경국이었던 송 및 고려와 교류하며 선 진 제자 기술을 활용은 물론 개성있는 그들의 문화를 전하기도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10-12세기 동아시아의 도자는 뛰어난 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던 송과 고 려에 의해 주도되었다. 동양도자사상 최고급의 청자와 백자가 생산되며, 명실상부한 자기의 시대였다. 반면 북방에 자리 잡은 유목 민족국가였던 요나라의 도자는 저품질의 도기로 점철 된다. 비록 초원 유목국가로서 동시기 중원의 송과 접경국 고려와 비교했을 때 뛰어난 제자 기술은 없었지만, 반대로 유목민족의 특성상 자유분방한 기질을 장점 삼아 활발한 대외교류 를 통해 독자적인 도자문화를 이룩하였다. 그중 색색의 연유도기는 제자 기술이 부족했던 요의 입장에서 가장 손쉽게 일정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대상이었다. 요삼채에 보이는 이슬람 요소와 페르시아 삼채와의 관계, 고 려상형청자에 보이는 어룡형의 요소들은 요대 도자가 10-12세기 동아시아 다문화 시대 도 자 문화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본 연구는 간 담도기 이미지에서 CAIPIRINHA, 압축 센싱(CS), 딥러닝(DL) 기법을 비교하여 주관적 영상의 질과 국소병변 을 평가하였다. 후향적 연구로 간 담도기 이미지를(획득 시간, CAIPIRINHA 16초, DL 11초, CS 15초; 절편두께, 3mm, 3mm, 1.5mm) 포함한 가도세틱산 조영증강 자기공명영상을 시행한 51명의 환자에서 3개의 이미지와 국소 간 병변은 주관적 이미지 질 평가를 분석하였다. 간 가장자리 선명도는 CAIPIRINHA(3.9±0.8), DL(4.5±0.6), CS(4.5±0.8), 호흡에 의한 운동 허상은 CAIPIRINHA(4.3±0.9), DL(4.7±0.6), CS(4.5±0.8)를 보였다. 21명 환자의 48개 병변에서, 가장자리 선예 도는 CAIPIRINHA(4.3±0.7), DL(4.5±0.6), CS(4.6±0.5), 선명도는 CAIPIRINHA(4.4±0.7), DL(4.7±0.5), CS (4.7±0.5)을 보였다. DL은 검사 시간을 줄이면서 CAIPIRINHA와 비슷한 질을 보이고 호흡 허상을 줄일 수 있다. CS는 얇은 절편 영상의 획득이 가능하여 비슷한 영상의 질을 보여 선택적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당대는 축적된 연유기술을 바탕으로 화려한 삼채도기 문화를 꽃피운 시기였다. 당대의 연유도기는 이전의 단색 연유기술과 달리 다양한 색상의 구현이 가능했으며, 세 가지 색 이상을 혼용하기도 하여 시각적인 화려함이 극대화되었다. 소위 당삼채라는 당대의 대표적 연유도기는 7세기 중반 盛唐 이후 크게 유행하였다. 주로 부장품인 明器로 활용되었으나 출토 상황에 의하면 일상생활에서도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오늘날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당대의 연유도기는 화북 및 화남 등 여러 窯場에서 생산되었으며, 중국 내 소비와 함 께 동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로까지 널리 수출되어 활발한 소비가 이루어졌다. 본 연구에서 당대의 주력 생산품이었던 당대 연유도기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수출에 관한 그간 학계의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관련 논제들을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간 동아 시아에 비해 덜 주목되었던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의 출토 사례를 중심으로 해외 전파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몇 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먼저 여러 발굴 성과를 토대로 살펴보면, 당대 厚葬문화 덕에 初唐부터 이미 삼채 도용이 대규모로 생산되었고, 이는 황족묘나 고관대작 분묘 출토품을 통해 어렵지 않게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 편으로 섬서 서안의 中堡村이나 하남성의 張思忠夫婦墓 등의 출토 예를 통해, 無官職이거나 중상급의 평민계층 사이까지 폭넓게 향유되었음을 알 수 있어 이는 당대의 전형적 부장문 화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8세기 중엽 안녹산의 난(755~763) 이후, 화려한 당삼채의 생산이 종식되고 대 신 백유녹채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이는 성당기의 삼채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채유 도기로 성당시기 당삼채는 부장용 명기의 성격이 강했으나, 9세기 백유녹채도기는 실용기에 가깝다. 그런데 이 백유녹채도기의 제작을 촉구한 역사적 배경은 바로 8세기 후반 이후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진 서아시아, 즉 이슬람제국과의 교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9세기 폭발 적으로 증가한 이슬람과의 도자무역은 결과적으로 이슬람 시장과 영향력에 대한 당나라의 태도에 기인한 것이라 판단된다. 이는 단순히 동방의 연유 도기가 이슬람권에 수출된 것이 아니라 이슬람권의 기호를 중국 측이 수용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신화적 장면을 그린 고전기의 아티카 지역의 도기화 가운데 대부분의 인물들이 고전기 양식으로 표현된 것과 달리 신상만이 아르카익 양식으로 묘사된 사례들을 선별하여 이러한 도상학적 현상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 아티카 지역의 고전기 도기화에서 의도적으로 아르카익 양식을 차용한 것은 양식적인 대조를 통하여 아르카익 양식의 신상이 고전기 양식으로 표현된 신화적 인물들 보다 더 예스러운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로 사용되었다. 이들 고전기에 아티카의 도기화가들이 상대적 시간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고전적 규범’으로 아르카익 양식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고전기 미술에서 아르카익 양식이 지닌 시각적 역사성이 당대의 미술가들과 관람자들에게 공유되었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Inner ware body was manufactured using sanitary ware waste and kairome clay. The prepared body was characterized by XRD, SEM, and XRF. The plasticity of body was decreased due to increase of waste. Thus it is considered that wheel throwing is available up to CS-6 composition. The inner ware body, containing the 60wt% sanitary ware waste, showed the linear firing shrinkage of 12.2%, apparent porosity of 19.6%, 3-point bending strength value of 21.5 N/mm2, after sintering at 1150oC for 1 hr. As the content of waste was increased from 40wt% to 60wt% in the composition, bending strength was increased with increasing the amount of mullite phase. According to the microstructure, glass phase was observed with the body surface, which can explain the increased glass phase of the composition containing high content of was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