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학사에 있어 당대(唐代), 그 중에서도 중당(中唐)이라는 시기적 위치는 특 별함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는 사인(士人) 계층의 개혁 의지가 강렬해지면서, 정치, 문화, 학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가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특히 과거(科 擧)를 통해 선발된 문인 계층이 신흥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중당(中唐)을 대표하는 문인 중 문체 개혁운동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라고 한다면 한유와 백거이를 대표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양인(兩人)은 각각 문체 개혁운동에도 힘쓰면서도, 문인 집단을 이끌어간 영수(領袖)의 위치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문인 집단 내에서는 교유가 활발했던 두 문인이었지만, 오히려 두 문인 간에는 교유의 흔적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본고에서는 한유와 백거 이 양인(兩人) 간 교유시(交遊詩)에 대해 소개한 뒤, 어떠한 상황 하에서 어떠한 내 용으로 교유시를 증답하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작품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으며, 이외에도 양인(兩人)의 교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당(中唐) 시기의 환경적 특징에 는 어떠한 요소들이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 논문에서는 한유 시와 불교의 관계를 고찰하였다. 한유는 "불도를 배척한다"고 스스로 자임했지만, 그의 행위는 도리어 불교와 깊고 애매하게 유착되어, 자신의 "선언"과 "행동"이 서로 위배되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원도〉를 찬술하고 불골 맞는 일을 간언하는 등 결연히 불도를 반대하면서, 한편으로는 승려와 밀접하게 왕래하고 시를 수창하며 정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모순적 태도는 후세에 비평을 받았다. 현존하는 한유의 시 사백여수 중 불교와 관련된 시는 겨우 약 20여 수 뿐이지만, 그 영향은 대단하다. 당나라 때 불교는 정치사상면에서 국가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을 뿐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사회를 침식시키는 큰 병폐였다. 당시에 형성된 방대한 무위도식계급 및 그들의 소비경비는 심히 통절한 것이었다. 그는 시에서 이런 불교의 해악을 지적하고 불교를 적극 반대했다. 한유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불교가 백성들의 생산생활에 막대한 파괴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시에다 불교의 허망과 거짓을 풍자하였으며, 혹세우민을 폭로하였다. 시승과 진지하게 교류한 시들은 후세사람들이 한유가 변심하여 불가에 귀의했다고 여겨 질책을 받았다. 한유와 승려의 교류는 경제적 능력 때문이거나, 시문의 재능이 출중한데 불교에 입문한 것이 통탄스러웠기 때문이거나, 심지어는 그들을 유가의 문하로 끌어들여 벼슬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무본스님을 환속시킨 것은 한유의 일대공로였다. 韓愈는 불교비판에 힘을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문학창작방법에서는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 이점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는 불교경전을 익숙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시에다 화용했고, 그가 시도한 "이문위시" 역시 직접 불경과 불경번역과정에서 얻은 것이며, 시 속의 몇몇 조구방법들도 역시 불경게송의 조구방법을 모방했다. 이로 본다면 한유는 비록 불교를 배척했다지만 그는 여전히 불교경전을 열람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온갖 전적을 박람했으니, 불경도 당연한 포함될 것이다.
이 논문은 유가의 입장에서 사상을 달리하는 불가의 스님을 대하는 양상이 어떠하였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두 작품을 서로 비교한 것이다.두 작품은 中唐의 문인인 韓愈의 「送浮屠文暢師序」와 조선전기의 문인인 李陸의 「送日本僧聖津首座還國詩序」다.700여 년이라는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유가로서 불가를 바라보는 시각을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우선 한유의 작품을 전범으로 설정하여 분석한 후,이륙이 그 전범을 모의하였는지의 여부를 작품의 내용을 대비하는 방법으로 밝히고자 하였다.분석한 결과,한유는 유가로서 불가를 대하는 데에 ‘이름이 유가면서 불가의 행동을 하는 자’와 ‘이름이 불가면서 유가의 행동을 하는 자’의 두 유형으로 나누고는 전자를 배격하고 후자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고,더 나아가 후자마저도 ‘이름이 유가면서 유가의 행동을 하는 자’가 되도록 요구하였다.그것은 불가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상대인 불가의 스님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 극단적인 입장이었다.이러한 한유의 견해는 유가의 도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 「原道」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한유는 聖人의 道에 대비되는 불가의 교리가 인간을 夷狄이나 禽獸로 만드는 야만적인 것이라고 여겼기에 비판한 것이다.이러한 한유의 불가에 대한 인식은 왜구의 노략질로 골치를 썩어온 조선전기의 문인인 이륙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그 결과 이륙은 한유가 「送浮屠文暢師序」에서 유가의 聖人之道를 언급할 때 사용한 주요 용어들을 「送日本僧聖津首座還國詩序」에 그대로 차용하였고 왜구의 노략질이 남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불가의 교리에 연원하고 있다는 것도 발견해 내었다.내용도 서로 닮아 있지만 몇 군데의 형식도 한유의 작품에서 익히 본 적이 있어 낯설지 않았다.이것을 통해 이륙의 「送日本僧聖津首座還國詩序」가 한유의 「送浮屠文暢師序」를 모의하였다고 확언할 수 있다.다만 글을 시작하거나 맺는 방식에 있어서는 한유가 논쟁적인 글쓰기를 한 데 비하여 이륙은 설명하고 진술하는 글쓰기를 하는 차이를 보였다.이것은 두 사람의 개성이나 문세의 상이함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이륙이 유가로서 불가의 스님을 응대하는 양상의 전범을,시공을 초월해 중당의 한유의 글에서 찾아내어 모의하였음을 확인하였다는 데에 본고의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