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전지구적 팬데믹의 시대에 세계와 인간의 관계가 생태적으 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사회‧문화적 요구와 학문적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본 논문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과 생태 환경을 성찰하고 개항기 한 국 생태문화의 특성을 고찰하였다. 개항을 전후해서 한국에 대한 자연탐 사가 증가한 가운데 개항기 한국의 정치, 문화, 역사 전반을 소개했던 『코리안 리포지터리』(1892-1898)는 한국의 자연기행, 지역탐사, 생태 환 경, 역사 및 인문지리에 대한 다층적인 학술기사를 소개함으로써 개항기 한국의 자연과 지역을 생태적 관점에서 검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본 논문은 『코리안 리포지터리』의 기사 가운데 개항기 한국의 자연과 생태관련 기사를 전수조사하고 목록화한 후, 개항기 근대적 관점 에서 한국의 자연과 생태 환경이 다루어지는 양상을 조망했다. 또한 『코 리안 리포지터리』가 국제적 차원에서 한국의 자연과 지역 정보를 생산, 유통하고 자연과 그를 둘러싼 생태 환경 담론을 형성하는데 기여했음을 진단하였다.
공론(公論)이라는 개념은 영어의 ‘public opinion’과 대응하는 단어로, 공론과 공론정치를 다룬 여러 연구에서 다수가 참여한 논의와 토론을 거쳐 공정성이 확보된 의견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교적 ‘공(公)’의 개념은 행위에 내재된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어, 행위의 장을 가리키는 서구의 public 개념과 다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공론 개념은 ‘다수의 토론을 통해 형성된 공정한 의견’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따르고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에 부합하는 옳은 의견이기 때문에 모두가 동의하는 의견’이라는 뜻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유교적 공론 개념이 근대적 공론 개념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하고자 개념사 방법론을 적용하여 『한성순보』·『한성주보』와 『독립신문』에 등장하는 공론 개념의 의미장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공론 개념은 유교적 공 개념에 근거하여 언론을 설명하며 정당화하거나, 만국공론처럼 유교적 에토스에 근거해 국제관계를 이해하고 상상하기도 했다. 또한 근대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유교적 공 개념과 언표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공론 개념의 의미장이 재배치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개항기에 등장하여 미술 생산자인 화가, 중개자인 거간 등의 상업적 욕망을 자극하며 근대 미술시장 형성에 영향을 끼친 서양인 미술 수요자를 다 룬다. 수교 이후 한국을 찾았던 서양인은 외교관·의사·간호사·엔지니어·선교사 등 다양했는데, 상당수가 미술시장 신규 수요자로 가세하였다. 서양인들이 구 입하고자 한 미술품은 취향, 목적, 장르에서 기존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 하나 가 한국의 삶과 풍속에 관한 정보를 담은 ‘민속적 풍속화’이며, 다른 하나가 ‘쉬느와즈리’의 영향으로 동양 도자기 애호 차원에서 수집된 고려자기이다. 서 양인 구미에 맞춰 화가들은 어떻게 새로운 풍속화를 개발하고, 중개상들은 어 떤 방식으로 도자기 도굴품까지 취급했는지를 살펴보면서 개항장과 대도시에 서 서양인 고객을 중심으로 형성된 미술시장을 고찰한다.
본고의 목적은 1870~80년대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과 「울릉도도항금지령」의 발령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주목하여 1881년 수토사에 의해 발각된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의 배경을 살펴보고 당시 우리 조정의 대응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다.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항기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은 일본의 관주도 하에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 도항한 일본인은 야마구치현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본 군함에 의해 조직적으로 파견되어 군함에 의해 철수시킨 것은 이를 대변해주는 것이다. 둘째, 이 때의 침입은 무인화 되어 있었던 울릉도에 침입하여 체류함으로써 경제적 이득 추구보다는 근대 국제법에 근거하여 새로운 섬의 ‘발견’과 ‘실효지배’라는 「무주지선점」의 논리를 적용하여 울릉도 를 침탈하려는 시도였다. 이것은 당시 검찰사 일행과 일본인 체류자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셋째, 1881년 봄 일본인의 독도 침입은 수토사에 의해 적발되어 신속히 조정에 보고되었고 당시 우리 조정의 대응은 이규원 검찰사의 파견과 「울릉도개척령」의 반포로 이어졌다. 「태정관지령」 등을 통해서 울릉도·독도의 소속이 조선에 있음을 재차 확인하면서도 ‘죽도명칭혼란’ 등의 이유로 「죽도개척원」, 「송도개간원」 등의 청원을 통해 다분히 울릉도 탈취 의도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은 신속하고 강력한 대응이었다.
울릉도, 독도를 다루는 책이나 논문의 경우 독도영유권을 고려해서 울릉도의 개척사를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초대 군수 배계주와 4대 군수 심흥택의 경우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본 필자는 ‘개항기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과 순종, 대원군과 민비(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보고, 대한제국의 조정 관리들과 울도 군수롤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개항기의 경우 울도군수의 행적은 한계성이 많았다. 첫째, 울도군수 제1대 배계주·제2대 강영우·제3대 배계주·제4대 구연수·제5대 심흥택·제6대 심능익·제7대 전태흥은 사료상으로 보건대 독도에 가지 않았다. 1905년 3월 28일 시마네현 관리가 도동에 있는 군청을 방문하여 심흥택 군수를 만나면서 “독도가 이번에 일본의 영지가 되었기에 시찰차 나온 것이다”라고 하여 반드시 관할구역인 독도에 가야 한다. 그러나 자료상 심흥택 울도군수의 경우 독도에 간 일이 없다. 또 심흥택은 일본에 의해 울릉도 2개의 망루를 설치하고 죽변과 울릉도 사이에 해저전선을 부설하여 연결하였다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심흥택 울도군수는 자료상 중앙정부에 보고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新高號도 울릉도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중앙 정부에 보고하지 못하였다.
둘째, 전 울도군수와 신임 울도군수의 직접 업무 인계를 하지 못하였다. 1대 군수 배계주는 최병린이 창룡호에 편승하여 본토로 편승하여 도주하였다. 제2대 울도군수 姜泳禹가 1901년 12월 30일에 울릉도에 도착하였다보니 직접 인수인계가 안 되었다. 제3대 군수 배계주는 1901년 3월 7일에 울도군수로 임용되었지만 1902년 9월 15일까지 울도군에 부임하지 못하였다. 제2대 강영우 울도군수와 제3대 배계주 울도군수는 직접 업무 인계를 하지 못하였다. 배계주와 관련된 소송이 1903년 1월 5일까지 지속되었다보니 1902년 12 월 28일에 제4대 울도군수 심흥택이 임명되었다. 배계주와 심흥택이 직접 업무 인계를 하지 못하였다. 구연수는 1907년 6월 26일자로 5대 울도군수에 임명되었고, 25일 만에 7월 21일자로 警務使에 임명되었다보니 25일 만에 경무사로 임명된 것으로 보아 실제 도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능익은 1907년 8월 울도군수에 임명되었는데, 전 군수 였던 심흥택이 3월 횡성군수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직접 업무 인계를 받지는 않았 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 군수와 신임 군수와 직접 업무 인수를 안받았다보니 울릉도에 파악하는 것이 늦다.
개항기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이다. 대한제국에 임명한 울도군수는 울릉도 업무에 몰랐고, 무능하였다. 그 이유 때문에 현재의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한다.
부산은 18세기말 서양에게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후 19세기말 조선이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국제 열강들에게 개항되었을 때에도 중요한 국제적인 개항장이었다. 국제 선박들의 왕래가 늘면서 부산항의 항만시설과 등대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등대의 설치와 관리는 부산 해관원들이 담당하였다. 개항기 해관의 작업들은 봉건사회에서 근대국가로 변천하는 조선의 역사적 기원이 된다. 이처럼 소중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개항기 해관문서들이 상당부분 소실되어 정확한 역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내부문서와 외교문서 그리고 국내외 언론들 에 의해 작성된 기록들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최근 출간된 자료들과 수집된 고지도들을 바탕으로 조선말 개항기 부산항에 설치된 근대식 등대를 확인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하여 대한민국 근대사의 올바른 정립에 객관적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