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의 목적은 백수 정완영(白水 鄭椀永, 1919~2016, 이하 백수) 의 시조 문학에 나타난 고향의식과 불교적 사유 기반의 생명존중의 의미 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데 있다. 백수는 이병기, 이은상, 김상옥, 이호우, 이영도와 함께 1960년대 대표적인 시조시인이다. 그는 말과 말의 행간에 침묵을 더 많이 심어두면 서 단아하고 잘 정제된 시상과 한국의 정한의 주제와 자유로운 율격을 담아냄으로써 현대시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백수의 문학적 사유 와 토양을 깊게 해 준 배경에는 고향상실과 민족전통을 관류하는 정한(情 恨)의 미학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시조 문학 작품에는 전통적 인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관조의 미학을 탐구하면서, 상실한 조국과 고 향의 회복, 연기적 생명 존재에 대한 사랑의 뜨거운 시혼이 잘 담지되어 있다. 결국 백수가 그토록 끊임없이 또 간절하게 고향과 불연(佛緣)을 노 래한 것은 역사관과 인생관을 매개로 한 자기정체성의 확인이라 할 수 있다.
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은 구한말의 승려이자 지식인으로서, 1, 000여수의 시를 남기고 있다. 그는 송광사를 중심으로 전라도 지방에 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적극적인 사회활동보다 절에서 글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그의 시 속에는 시대상황을 반영 한 것들도 많이 존재하는데,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삼일독립운 동 뒤에 감옥에 갇힌 것을 안타까워하는 시나 동경대지진(東京大地震) 을 묘사한 시 등이 그것이다.
그는 대단한 문필가이자 승려들을 가르친 강사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글을 짓고 경전을 읽는 것을 주로 하였다. 하지만 그의 시 속에는 승려로 서 수행에 몰두하지 않고 시와 글을 짓는 것에 대한 자괴감 등도 엿보인 다. 그의 삶의 모델은 유마거사(維摩居士)인데, 그의 시 속에는 유마거사 에 대한 시도 종종 보인다. 한편 그는 당시의 한국승려들과 마찬가지로 간경(看經), 참선(參禪), 염불(念佛)을 동시에 닦고 있었는데, 이를 삼문 수업(三門授業)이라고 한다. 그는 참선에 있어서는 무자화두(無字話頭) 를 참구하고 있었으며, 무자화두에 대해 읊은 시도 존재한다.
나아가 그는 평소 염불을 닦아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하고자 하였는데, 특히 말년에 이르러서는 열심히 염불수행을 하였다. 또 장편 염불가요(念佛歌謠)인 『정토찬백영(淨土讚百詠)』을 남기고 있는데, 이 는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의 『백암정토찬(栢庵淨土讚)』을 본 뜬 것이다. 『정토찬백영』은 한국의 정토가요(淨土歌謠)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은 작품이다.
불교는 세상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사유한다. 카메라의 눈으로 세계의 만물을 기록하는 영화의 이미지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사유를 가장 잘 구 현한다. 프랑스의 영화이론가 앙드레 바쟁은 영화이미지의 주술적 본성에 대해 주목했다. 본래 이미지에는 모방적 본성과 주술적 본성이 존재하고 있 었다. 바쟁은 르네상스시대에 이르러 이미지가 정신성과 무관하게 사물의 외양을 충실히 모방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철저한 기 술적 연마 없이 사물의 외양을 재현하는 사진과 영화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미지는 모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에서 해방된다. 장 엡스탱 역시 바쟁처 럼 영화 이미지의 정신성을 강조한다. 장 엡스탱은 영화의 움직이는 이미지 가 부동성의 세계의 정신성을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했다. 자끄 랑시에르는 19세기 문학의 수동적 작법과 영화의 등장을 같은 경향으로 파악했다. 랑시 에르가 언급하는 영화의 수동적 작법은 불교적 무아(無我)의 경지와 비교될 수 있다. 가장 기계적이라 여겨지는 영화라는 매체의 이미지는 세계의 사물 에 깃든 불성과 끊임없는 변화, 무아의 경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이다. 세계의 이어짐을 주제로 삼는 태국의 불교신자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 쿤의 전위적인 영화 세계는 불교의 연기(緣起)사상과 공성(空性)을 관객에게 경험하게 한다.
본 논문은 19세기 조선의 詩壇 및 淸朝와의 교유사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했던 작가인 홍현주 작품세계의 일단을 살펴보는 하나의 방법으로 그의 시에 나타나는 불교적 사유의 흐름을 검토하고자 한다. 청년기의 홍현주는 부마라는 개인적 처지로 인한 심리적 갈등을 운명에 대한 관조라는 방식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申緯와의 교유는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홍현주는 30대에 幻에 대한 관심과 깨달음을 통해 불교의 교리에 접근해 갔다. 이것은 인생무상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고, 그는 空 사상을 통해 이러한 무상감을 극복하고자 했다. 40대에는 공 사상을 체화하여 그러한 法悅이 형상화된 작품들을 다수 창작했다. 50대 이후, 특히 60대의 시에서는 空과 色의 경계를 넘어 자신이 있는 곳을 바로 서방정토로 여기는 자득의 경지로 나아갔음이 발견된다. 요컨대 홍현주 시 세계의 한 특징으로서 젊은 시절 싹튼 심적 갈등을 불교적 깨달음을 통해 극복하고 자족적인 삶의 태도를 획득해가는 과정이 나타난다는 점을 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은 홍현주 작품세계의 주요한 국면을 드러내는 동시에 19세기 경화세족이 불교를 수용하고 작품 창작에 활용하는 방식의 하나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