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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9

        1.
        2024.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의 연구목적은 20세기 초 조선인 여자 일본유학생들의 도일실 천을 피에르 부르디외의 '장' 이론에 입각하여 재해석 해보고자 함에 있 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를 다양한 사회적 '장'들로 이루어진 유기체 로 해석하였는데, 각각의 장들에서는 행위자들의 행위적 실천이 발생하 고 있고, 행위적 주체들은 여러 사회적 '장'에 동시에 소속되어 있다. 이 러한 시각에서 바라볼 때, 근대 조선의 지식인 사회 역시 여러 '장'들로 분화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장'들은 본 연구의 연구대상인 15명의 조선인 여자 일본유학생들의 '도일유학' 행위의 실천 영역으로서, 각 '장'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상호작용하며 연결되어 있었고, 이들 여자 유학생들은 동시에 이러한 '장'들에 몸담고 있었다. 20세기 초 조선 인 여자 일본유학생들은 도일 실천에 있어서 어떠한 '장'들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도일'이라는 행위적 실천 양상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교육사회학적·교육인류학 적인 시각에서 부르디외의 '장' 이론을 적용하여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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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3.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연구는 한일 간 경제 문화적 관계가 정치적 관계를 극복하고 한류와 혐한 류의 공존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대해 BTS 활동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개선방안을 도출하는 데 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혐한류의 원조 는 전후 일본의 재일조선인 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인에 대해 식민지 시 대부터 취해온 일본인의 인식으로 볼 수 있다. 둘째, 한국의 문화정책은 1987 년 민주화 선언 이후 1998년 대중문화개방정책으로 이어졌으며 대일관계 개선 수단과 외교적 위기에서 민단 단체나 자치단체의 교류 증가 등의 긍정적인 측 면을 가져왔다. 셋째, 일본에서 BTS 현상은 한류 문화의 획기적인 확대로 정치 적 관계와 무관하게 민간단체나 자치단체의 가교역할을 초월하여 일본인 수용 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와 문화적 교류의 확대를 가져왔다 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넷째, 일본에서 한류와 혐한류의 현상은 극단적으로 상 호 대립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러한 두 흐름은 상호 유사성과 함께 동시에 진행 되고 있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BTS 현상은 이러한 흐름을 초월하였다 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일본 사회에서 한류와 혐한류의 동 시적 존재 현상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정확한 인식, 공교육의 활용과 매스컴의 홍보, 시민사회의 수용과 교양강좌 등을 통한 지속적인 개선과 실천 노력이 필 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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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3.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1959년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한송환(북송) 발표 직후인 2월 부터 6월까지 한일 양국의 국회에서는 재일조선인 북송에 대해 어떻게 논의를 전개하였는지 분석하였다. 즉, 본 연구의 질문은 ‘1959년 초반 한국 국회와 일본 국회는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에 대해 어떠한 논의를 했는가?’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본 연구는 한국 국회와 일본 국회의 1959년 회의록을 분석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의 국회는 북한을 주권국가가 아니라고 보며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송 계획에 반대 하는 논의를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회 내의 의견 차이로 한 국 국회가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논의 를 진행하는 것은 어려웠다. 반면 일본의 국회는 한국 정부와의 관계 악 화를 우려해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를 한일회담과 구분하여 처리하는 방 안을 논의했다. 또한, 일본 국회는 일본 정부가 북송 문제에 직접 관여하 지 않도록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를 주도하여 해결해 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며, 동시에 북송 실행을 위해 북한적십자사와의 회담에서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논의를 확장하였다. 그러므로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에 대한 1959년 2월부터 6월까지의 한국과 일본의 양국 국회 의 논의를 비교하면, 일본 국회의 논의가 한국의 국회 논의보다 구체적 이고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1959년 12월 재일조선인 의 북송은 결국 실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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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2.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냉전기 1959년부터 재일조선인 북한송환 후의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비정부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어 NGO ‘모두 모이자’의 설립자인 가와사키 대표의 활동을 분석하였다. 본 연구는 ‘모두 모이자’ 설립 후 2015년부터 현재까지의 가와사키 대표의 활동을 신문 기사 등의 1차 자 료를 통해 냉전기 재일조선인 북한송환 이후의 인권 문제에 대한 구체적 인 분석을 하여 기존연구의 공백을 보완하였다. 본 논문은 다음의 두 가 지 점을 제시한다. 첫째, 1959년에 시작되었던 재일조선인 북송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며, 여전히 우리가 계속 풀어야만 하는 역사적 문제이다. 둘째, 재일조선인 북송사업 이후 관련자들의 인권 증진을 위하여 ‘모두 모이자’는 국가 행위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계속하여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모두 모이자’의 가와사키 대표 의 재일조선인 북한송환 피해자들의 인권 증진을 위한 여러 활동은 한국 과 일본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재일조선인 북한송환의 피해를 알리는 계 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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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7.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대만 스이린(施懿琳) 교수는 대만 문사에 대한 초탐 ― 1919-1923년 대만문예총지를 대 상으로(台灣文社初探―以1919-1923台灣文藝叢誌為對象) 라는 글에서 “대만문예총지(1921. 03.15.) 제3년 제3호에 게재된 堅忍論(二) 와 史前人類論(續) 이라는 두 편의 글을 쓴 사람 은 박윤원인데, 그는 아마도 한국 사람인 듯하다.”라고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스이린 교수 가 추정한데로 박윤원(朴潤元)은 한국 사람이다. 박윤원은 기자 출신이다. 그는 1919년부터 1 921년까지 약 3년간 대만에 체류한 바 있다. 박윤원은 대만에 있을 때 대만 ‘문사(文社)’ 잡지 인 대만문예총지(台灣文藝叢誌)와 숭문사문집(崇文社文集)에 세 편의 글을 기고했다. 또 한 그는 조선 계몽잡지인 개벽과 동아일보에 대만과 관련된 글을 기고하였다. 이 글의 목적은 1920년대 조선과 대만을 무대로 창작 활동을 전개한 박윤원이라는 인물 발굴과 그가 조선에서 기고한 글에 나타난 대만에 관한 인식을 고찰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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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2.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Mission ist die Auslegung der von der Kirchen gefuehrten Taten”. Das bedeutet: die von der Kirche gefuehrten Taten sind Mission, aber alle Taten der Kirche koennten nicht als Mission bestaetigt werden. Das heisst, es gab Mission, die in der Kirchegeschichte falsch oder ungerecht gefuehrt worden sind, obwohl man eigentlich keine boese Absicht gehabt haette. Es wird dadurch ein falsches Bild von der Mission entstanden. Das ist eine Gefahr fuer Kirche und dere Mission. Was koennte ein Missionstheologer tun, um dies Gegafahr zu vermildern oder sogar beseitigen. Es koennte durch die Bibel und dein richtjge Tradition der Mission korrigiert werden. Aus dieser Ueberlegung moechte ich hier ein beispienhaftes Missionstat in der koreanischen Kirche und dessen biblischer Begrundung herauszustellen versuchen. Das ist eine Missionsgeschichte von William Benton Scranton, der erste Missionar der methodistischen Kirche in Korea. Das ist eine biblische Untersuchung vom Gleichnis vom barmherzigen Samariter (Lk 10, 2537). Scranton ist ein ArztMissionar, der sich seine Arbeit als “ein good samaritan hospital projekt” bezeichnet hat. Das Ergebnis dieser Missionsarbeit gibt der koreanischen Kirche ein erstaunliches Bild. die drei wichtigen Gemeinde: Ahyun Gemeine, Sangdong Gemeinde und Dongdaemun Gemeinde, deren Anfang Scranton aus einer “Apotheke” fuer die armen, kranken und zum Tode verschobene Untereschichten gemacht hat. Problem ist es, dass die koreaniche Kirche (Methodisten!) eine solche gute Tradition von Scranton heut zu Tage nicht mehr besezt zu haben und sogar nicht mehr daran interessiert zu haben erscheint. Diese Arbeit versucht deshalb die Missionsgeschichte von W.B. Scranton darzustellen und eine Auslegung vom Gleichnis vom barmherzigen Samariter (Lk 10, 2537) zu machen. Dies soll dahin zufuehren, dass die Kirche und deren Mission von der richtigen Tradition vom Gotteswort und Missionstaten sich bewusst sein sollen und dazu gerechte Richtlinien verschaffen sollen. Die Arbeit beschaeftigt sich besonders an einen Begriff von “ChingChingu Mission”. Das ist ein missionstheologischer Begriff, der eine Auslegung vom Gleichnis vom barmherzigen Samariter entstanden ist. Es geht bei der Mission darum, dass eine richtge Mission, die bei dem eine Mission treibende Missionar ein ewiges Leben verschenkt weren soll, liegt an folgendes: Ein Urteil von der richtig gefuehrte Mission liegt nicht daran, was der Mission treibende Person sich selbst behauptet, sondern daran, was der Mission betroffene Person besagt. Das heisst. das von einer Schriftgelehrter befragte ewige Leben wird gegeben dem barmherzigen Samaritaer, der durch den von den Raeubern ueberfallenen Menschen als sein Freund besagt worden ist, aber nicht dem Schriftgelehrter, der sich selbst als ein Freund fuer die von den Raeubern ueberfallenen Menschen behauf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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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3.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objects of this study are to find out (1) real situation of the food supply in prison under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more cleary (historical meaning) and (2) which might help in understanding wrong present food consumption patterns in Korea which causes environmental as well as health problems. It is generally known that the length of the Japanese occupation for Korea is 36 years. However, it is concluded in this study that it was longer (70 years ; from 1875 to 1945 from when Japanese Army attacked and occupied Yungjongdo and Kanghwado island to e time when they were defeated on World War II.) Korea was annexed by Japan in 1910 then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dismissed the Korea Army, controlled the Office of Justice and the management of prison by force. Since then about 50% of all land was fell into Japanese Government ownership and 80% of Korean farmers became as tenant. After this change, Korea farmers were forced to pay extremely high rent (up to 80% of its harvest). Forced immigration, low price procurement of grain by Japanese government up to more than 30%of their production, was practiced. Accordingly, the food situation of Korean farmers became miserable, which may caused more violations of Imperial Japanese Law. Malnutrition, epidemic diseases, mortality rate of infants soared and average life expectancy shortened to 20-30 years old. This was the period of World Economic Crises and Food Crises in Japan. It was said then that if one Japanese comes to Korea then 200 Koreans will starved to death. Meanwhile, Proconsul Bureau of Chosun requested to the Department of Medicine, the Imperial University of Kyungsung to survey food supply situation of Koreans in prison throughout Korea. Objectives of the survey then was not only to find out scientifically whether it is agreeable in maintaining prisoner's health and also find out the possibility to save food during food crisis. Survey was started from 1923 and ended in 1945, and it focussed on prisoners in the Seodaemoon Prison. This report is the outcome of the first survey. They concluded that the food supplied was nutritionally (had) no problem, in compare with those of workers in the factory, students in the dormitory in Japan and with those of prisoners in Taiwan, France and Germany. Amount of grain supplied were different according to their work lord and was divided into 9 different levels. Total grain was consisted of 50% millet, 30% soybean and 20% indica rice(variety). However, there were no difference in the amount of supply of side dishes between work groups. For the highest working group, 3280g of boiled grain per day was supplied to make stomach full but as a side dishes, salty fermented bean paste, fermented fish and salty soups, etc. was supplied. Deficiency of animal protein were observed, however, high intake of soybean may possibly caused animal protein deficiency problem. On the contrary, the intake of water soluble vitamins were insufficient but the level of calcium and iron intake seems to be sufficient, however, imbalance of intake of nutrition may caused low absorbtion rate which might caused malnutrition. High intake of dietary fiber and low intake of cholesterol may possibly prohibited them from so called modem disease but may caused the defect in disease resistancy againist epidemics and other traditional disease. Over intake of salt(20-30g per day) was observed. Surveyors who attended in this survey, mentioned that the amount of food intake may nutritionally be sufficient enough but the quality of food(and possibly, the taste of food) were like that of animal feed. For the officials who received this report might consider that considering the war situation and food crisis, the supply situation of food in the prison may considered to be good enough(because they are not starving). But as a Korean who studied this report, one feel extremely pity about those situation because (situation of) those period were very harsh under the Imp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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