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된 당빌의 「조선왕국도」 초안 지도의 내용과 지도학적 특성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각 지도가 가지는 자료적 가치와 의미를 조사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헌조사를 통해 이들 초안 지도는 중국 예수회의 고빌 선교사가 파리에 보냈고, 이를 근거로 「조선왕국도」가 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둘째, 지도 주기를 분석한 결과 한양의 위도는 37° 38′ 20″인 것을 확인했다. 셋째, 도별 경계가 그려진 초안 지도에 수록된 지명을 비정하여 지명 목록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지명 비정을 통해 목판본 「조선도」의 전라도 남해안 지명 표기가 잘못된 것을 확인했다. 넷째, 로마자 표기 방식을 조사했는데, 전자법을 사용한 것을 확인했다. 또한 포르투갈식 표기 방식에서 프랑스식 방식으로 변화하 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구는 우산 명칭의 소멸과 석도 명칭의 등장 사이에서 실체(독섬1))와 명칭(우산, 석도)간 불일치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고, 조선 후기에 제작된 지도와 사료에 등장하는 독섬의 이미지, 그리고 우산, 석도 명칭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독섬의 실체, 그리고 우산과 석도 명칭에 얽힌 의문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17세기 무렵, 조선왕실은 독도의 실체를 분명하게 인식하였으며,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독도는 지도에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공도정책으로 독도에 관한 지리정보는 현저하게 퇴보되었고, 이러한 문제는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오류는 김정호의 「청구도」와 「대동여지도」 초기 버전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나, 김정호의 치밀한 고증으로 그때까지 반복되었던 표현상의 오류는 1861년 무렵에 이르러 완벽하게 시정되었다. 요컨대, 김정호가 제작한 조선 후기 전국지도인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 독도는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본 연구의 목적은 황명직방지도라는 지도집에 수록된 조선에 대한 지리정보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 지도집에 수록된 조선과 관련된 지도들은 당시 중국인들의 조선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보여준다. 지도집에 수록된 조선지도의 지리적 내용은 광여도의 조선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 지명은 수정하여 표시하였다. 그리고 백두산을 중국인들이 하나의 산이 아닌 산맥으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지도에서 확인하였다. 지도에 표기된 지명은 위치 및 표기 오류가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충분히 비정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 지도집은 우리에게 아직 소개되지 않은 조선과 관련된 지도를 포함하고 있어서, 본 논문은 역사지리학적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조선시대의 고지도는 당시의 자연인식, 문화와 경제, 정치‧행정과 국방, 지명 및 지리정보 등을 총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경관텍스트이다. 이 글은 남해안 및 진주를 사례로 조선후기의 지도상에 재현된 지역경관에 관해 역사지리적인 관점으로 살펴보았다. 본 연구는 고지도를 지리정보의 사실적 표현 및 시간단 면의 누적이라는 차원을 넘어 사회관계의 재현물이자 해석적 텍스트로 까지 포 괄적인 스케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관이 주도하여 제작한 조선 시대의 고지도는 왕조의 권위와 권력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왕조의 정치사회적 통치 질서를 구현, 강화하는 목적과 기능을 띠고 있다. 조선시대의 남해안 지도 에는 지정학적인 중요성과 사회경제적인 비중이 시대적으로 달리 반영되어 있 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남해안이 갖는 군사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경제적인 비중의 증대로 지도 표현이 정밀해지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국토공간적 중요성 에 대한 조선왕조의 정치사회적인 인식이 달라진데 연유한 것이다. 조선후기의 진주 지도에는 위계적 산수체계의 인식, 중앙집권적 통치체계의 구현, 행정중 심지적 도로체계의 형태, 이데올로기적 교육종교경관이 재현되어 있다. 현존하 는 진주의 고지도는 대체로 18세기와 19세기에 제작되었는데, 특히 진주성도 및 군현지도첩의 지도는 지역경관의 복원 자료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