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통일신라시기의 산성은 성벽이나 문지, 집수시설 등을 중심으로 발굴조사 되었 다. 그 결과 성벽의 축조기법이나 조성 시기, 구조 등에 대해선 비교적 많은 자료가 축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산성의 주체인 인간의 숙식 등과 관련된 건물지의 조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통일신라시기의 산성 내 건물지는 대체로 기단석을 갖추고 있으나 동 시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구식기단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그리고 이 시기의 주요 난방 시설인 쪽구들 의 경우도 초석 건물지에서 발견된 사례가 거의 없다. 단적으로 전면 발굴조사가 진행된 광 양 마로산성의 경우 성주나 하급 관리, 병사들이 머물 수 있는 난방시설이 턱 없이 부족함을 살필 수 있다. 아울러 전술한 기단석의 위계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당시 광양 마로산성은 치소성이나 거점성으로 인식될 정도로 중요한 산성이었다. 그러나 성주나 관리, 병사들이 상주하기 위한 온돌 건물지와 성주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 물지의 기단석 등은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산성 내 건물지가 일상생활을 영 위하기 어려운 구조였음을 알게 한다. 그런 점에서 향후 산성 외부의 건물지 조사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Bunhwangsa Stone Brick Pagoda, constructed in 634, is Korea's oldest stone pagoda. As a prototype of the Silla Stone Pagoda, the pagoda was constructed using flagstones. Since it was constructed with flagstones, it has been known to be a pagoda that replicates the brick pagoda until now. The latest research suggests that it copies the India Stupa or the Stacked Stone Pagoda more than the Brick Pagoda. However, the Bunhwangsa stone brick pagoda has a significant difference in terms of construction technique and shape compared to Brick Pagodas, India Stupas, and Stacked Stone Pagodas. Therefore, it is worth paying attention to the stone building technique used in Silla. Through this study, I would like to clarify that the Bunhwangsa stone brick pagoda is a stone pagoda that creatively reflects the existing Silla stone building techniques such as stone fortresses and stone chamber tombs.
백제 마지막 수도인 사비도성은 부여나성과 부소산성, 백마강이 도성의 경계를 이루고 그 내부에 도성 핵심시설을 구축하는 계획도시로 천도 이후부터 멸망까지 사비백제의 중심 지였다. 부여 나성의 성벽은 도성의 북동쪽에 위치한 해발 100m 전후한 산과 하천을 경유 하면서 축조되었다. 때문에 지형에 따라 축조 공정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성벽 전면 을 수직에 가깝에 석축하는 것은 성벽 전 구간에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본고에서는 부여 나성의 발굴 성과를 토대로 성벽의 입지 및 지형별 축조 기법의 양상을 살펴보고 출토된 유물과 주변 유적과의 상관관계를 통해 축조시기를 가늠해 보았다. 먼저, 입지적 특징에 따라 저습지-평지구간, 산지-평지 및 능선구간, 산지-경사구간으로 구분하 였다. 구간별 특징을 살펴보면 저습지-평지구간은 성벽을 조성할 때 하천 등의 연약 지반을 극복하는 부엽공법, 말뚝공법, 치환공법 등의 다양한 기술이 적용된다. 체성부의 축조는 넓 게 마련된 기저부 상면에 토축부와 석축부를 조성하는데 지점에 따라 선토축 후석축 혹은 선석축 후토축 공정으로 구축된다. 산지구간은 기본적으로 사면을 계단식으로 굴착하여 기 저면을 조성한 후 토축부로 체성의 대부분을 구축한 후 외면에 석축을 후축하거나 토축부와 석축부를 서로 동시에 조성하기도 한다. 석축부의 조성은 성외측 기저부에 구를 마련하여 기초석을 쌓은 뒤 그 상부는 장방형의 면석을 品자형으로 수평줄눈을 유지하면서 쌓고, 뒤 쪽은 일정 폭으로 할석으로 뒤채움석을 쌓는다. 부여 나성의 축조시점은 출토유물과 주변 유적과의 관계를 토대로 보면 6세기 초·전엽 무렵을 상한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출토 유물과 주변 유적의 연대자료가 아직까지는 소략 하기 때문에 향후 조사 성과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백제 한성기 왕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성벽 축조기법에 대하여 살 펴보았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서로 다른 지형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성벽 축조기법에서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지면 지정과 기초성토에 의한 기저부 조성방식 등에서는 축조기 법의 공통점도 확인된다. 江岸 평지에 축조된 풍납토성은 자연제방의 구지표면을 정지하고 기초성토를 한 후 그 위에 판축틀(거푸집)을 설치하여 版塊를 축조하는 방식인 판축기법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의 구조는 중심토루와 중심토루의 내·외벽면에 덧붙여진 토루로 이루어졌으며, 판괴를 순차 적으로 덧붙여가며 축조하는 分段法에 의해 성벽이 완성되었다. 반면, 구릉과 평지가 복합 된 지형에 축조된 몽촌토성은 지형에 따라 축조기법의 차이가 엿보인다. 성벽 축조구간이 평지인 경우는 풍납토성과 같은 판축기법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구릉 지 역의 경우는 구릉의 자연 경사면을 2~3단의 계단상으로 깎아내고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 였는데, 구간에 따라 다소 축조기법의 차이가 확인된다. 즉, 북서벽 구간은 판축틀을 설치 하여 축조한 양상이 확인되었고, 동벽 구간의 경우는 성토기법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판단 된다. 이렇듯 성의 입지에 따른 두 성의 축조기법상의 차이가 있지만, 축조기법상의 공통점도 확인된다. 즉, 지면과 성벽의 유동성을 억제하기 위해 성벽 기초부의 내측 혹은 외측에 해당 하는 부분의 지면을 얕게 굴착하여 끝부분이 돌출되게 지면을 지정하는 기법, 성벽 기초부 에 뻘 혹은 점질토를 이용하여 기초성토를 하는 방식, 기저부 보강 방법의 일환으로 토제를 시설한 것 등은 두 성에서 모두 확인되는 축조기법이다.
증평 이성산성은 토축산성으로 남성과 북성이 이격하여 축조되어 있어 입지적인 약점을 서로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백제산성의 특징 중에 하나인 모자성에 해당한다고 하겠으나 두 城모두 내성과 외성을 갖추고 있는 특이한 유형에 속한다고 하겠다. 북성의 전체 둘레는 내성 219m, 외성이 310m로 내외성의 공유벽 100m를 포함하여 전체 둘레는 429m이다. 南城은 이성산 정상부를 에워싼 테뫼식산성과,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산성이 부가된 복합식산성으로 테뫼식산성의 둘레는 741m이고, 포곡식의 외성은 1,052m으로 내·외성 공유벽 191m를 제외하면 전체 둘레는 1,411m에 달한다. 남성의 체성 축조기법은 성토기법을 기본으로 하되 부분적으로 유사판축기법이 채용되고 있으며, 북성은 남성 보다 유사판축기법이 좀 더 많이 채용되면서 판축기법도 관찰되고 있어 남성 보다 발전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기저부 조성에 있어서 성토층의 유동성을 억제하고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목주를 시설한 점과 암반 외벽 경사면에 성토층의 접착력 감소를 최소화시키기 위하여 길게 홈을 파서 기저부 성토층과의 밀착력을 높이기 위한 시설은 새롭게 확인된 것으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특히, 남성과 북성 모두 체성 축조에 있어서 벽심을 시설하여 이에 의지해서 축성해 나간점과, 남성 서벽에서 확인된 표토블록의 사용 사례는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토성축조기법에 있어서의 다양한 축성방법 중의 하나가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영정주와 협판을 사용하지 않고 성벽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벽심이 협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유사판축에 의한 축성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토성 축조에 있어서 판축기법이 보급되기 이전에 축성공정을 앞당길 수 있는 중요한 시설이라 하겠다. 남성 서벽에서 확인된 표토블록은 외벽 벽심을 내향하여 사직선으로 보축하여 형성한 중심토루를 보강한 것이라 하겠다. 표토블록은 유사판축이 판축기법에 준해서 목봉으로 다지기 때문에 이 압력으로 중심토루가 뭉개지거나 내려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설한 발전된 축성기술의 하나라 하겠다. 중심토루를 토괴(土塊)로 보강하고 이 중심 토루에 의지해서 유사판축으로 토성을 구축한 사례로 지탑리토성이 주목되며, 증평 이성산성 보다 선행한다고 판단되어 어느정도 계통성을 살필 수 있는 성곽유적이라고 하겠다. 앞으로도 점토괴나 표토블록을 사용한 토성의 조사사례가 축적되어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토성 조사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성토법, 삭토법, 판축법 외에도 다양한 축조기법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음에 유의하여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언양읍성 북문주변 성곽정비사업 일환으로 발굴조사한 지역에서 체성, 북문지와 옹성 1개소, 치성 2개소, 성 외측에 전체적으로 조성된 해자, 수혈유구 등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북문지와 옹성의 구조, 체성부와 치성의 축조방법, 규모 등이 명확하게 확인되었다. 특히 체성의 축조방법에 있어서 내벽의 경우 계단식 축조수법이 아닌 내탁부와 성 안쪽과 내벽 내탁부를 구분하는 경계석열이 확인된 것이 가장 큰 성과이다. 해자의 평면형태, 규모, 내부시설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으며, 또한 체성, 치성, 옹성과의 축조에 있어서 선후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즉 체성과 치성은 동시기에 축조되었으며, 북문지의 옹성은 체성보다 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사지역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북서쪽 모서리에서 암거시설 형태의 입수구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해자와 만나는 구상유구가 확인되었는데, 입지조건, 내부시설 등으로 볼 때 해자쪽으로 물을 공급하는 용도의 구로 생각된다. 언양읍성은 문헌에서 확인된 읍성(석성)의 축조시기(1500년)와 이번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자기류, 기와류)의 편년을 비교해 볼 때 연대가 비교적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번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북문주변 성곽 정비복원 시에 문헌자료와 함께 고고학 자료를 검토, 보완하여 정확한 정비복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40호로 지정되어 있는 기장읍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축조수법이 정형화된 형식으로 정리되기 이전에 축조되어 고려시대 성곽 축조수법과 조선의 읍성축조수법이 혼합되어 성곽축성사에 있어 읍성축조수법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기장읍성에서 확인되는 사직선기단의 축조는 과거 고려시대말까지 계속 축조된 판축토성(版築土城)의 기단부 축조방식을 읍성축조에 적용한 결과로 고려 판축토성에서 조선시대 석축성인 연해읍성의 축조로 이어지는 흐름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다. 기장읍성 동벽 체성부에서 확인되는 세장방형 외벽면석 축조수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읍성의 장대석 입수적 축조수법과는 차별성을 지닌다. 기장읍성 남벽과 동벽 체성부 기저부 축조수법은 김해읍성, 웅천읍성, 동래읍성, 고성읍성 등에서 확인되는 지대석 설치 이전에 바닥에 판석을 이용하여 바닥면의 수평을 맞추어 정리된 구조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축조수법이 사용되기 이전 시기에 축조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장읍성은 사직선기단축조수법, 체성부 세장방형 외벽면석의 사용과 더불어 고려시대의 성곽축조수법과 조선시대 연해읍성 축조수법이 혼용된 과도기적 읍성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history, space structures, blueprint, and techniques of the construction of Nam-hea city walls. Nam-hea city walls were relocated in 1439 from Whagumhun-Sansung(火金峴山城) to the present site, nearby Nam-hea Um.(南海邑) The city walls were rebuilt after they were demolished during Japanese invasion on Korea in 1592 and their reconstruction was also done in 1757. At present, the city walls only partially remained due to the urbanization of the areas around them. A plane form of the City wall is a square, and the circumference is approximately 1.3km. According to the literature, the circumference of the castle walls is 2,876尺, the height is 13尺, and the width is 13尺 4寸. Hang-Kyo(鄕校). SaGikDan(社稷壇), YoeDan(厲壇), SunSo(船所) which is a harbor, as well as government and public offices such as Kaek-Sa(客舍) and Dong-Hun(東軒) existed inside the castle walls. Inside the castle walls were one well, five springs, one ditch, and one pond, and in the castle walls, four castle gates, three curved castle walls, and 590 battlements existed. The main government offices inside castle walls were composed of Kaek-Sa, Dong-Hun, and Hang-Chung(鄕廳) their arrangements were as follows. Kaek-Sa was situated toward North. Dong-Hun was situated in the center of the west castle walls. The main roads were constructed to connect the North and South castle gate, and subsidiary roads were constructed to connect the East and West castle gate. The measurement used in the blueprint for castle wall was Pobaek-scale(布帛尺:1尺=46.66cm), and one side of it was 700尺. South and North gate were constructed in the center of South and North castle wall, and curved castle walls was situated there. One bastion was in the west of curved castle walls and two bastions were in the east of curved castle walls. The east gate was located in the five eighths of in the east castle wall. Two bastions were situated in the north, one bastion in the south, and four bastions in the west castle wall. The castle walls were constructed in the following order: construction of castle field, construction of castle foundation, construction of castle wall, and cover the castle foundation. The techniques used in the construction of the castle walls include timber pile(friction pile), replacement method by excavation.
The wooden pagoda sites which have been confirmed in Baekjae's former territory so far have flattened surface of the earth or foundation pert made by digging up the earth. In particular, the latter is found more often in the pagoda sites of Baekjae, which is essential and absolutely necessary because of the characteristics of pagoda structure. The wooden pagoda sites with foundation part made by digging up the earth under the stylobate are found at Yongjeongli ruined temple site of Woongjin area, and at Neung-sa temple site, Wangheung-sa temple site, Geumgang-sa temple site, and Mireuk-sa temple site of Sabi period. They are also observed at Hwanglyong-sa nine-storied wooden pagoda of Shilla and at Biin five-storied stone pagoda of early Goryeo. They are important data improving that the construction technologies of Baekjae continued to be applied to build stone or wooden pagodas, transcending time and space. Recently, the site assumed as a wood pagoda site of Hanseong area was examined in Gyeongdang sect ion of Pungnap mud fortification. If this is proved to be a real wooden pagoda site, this digging-up construction technology of foundation part ann be concluded to be a traditional engineering technology of Baekjae which was frequently used from Hanseong period to Sabi period. On the other hand, this digging-up construction technology of foundation part has been found only at pagoda sites and main building sites of temple ruins, and it helps examine their symbol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