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瓷器)는 조선의 중요한 대외 교역 물품이 아니었다. 조선은 전국에 걸쳐 자리하는 가마에서 필요한 백자를 생산했으므로 자기를 만들지 못한 나라들과는 수입해서 사용하는 그 릇의 종류와 크기, 수량이 달랐다. 유럽 등지에서는 새롭고 이국적인 동아시아의 자기가 여 러 왕실과 귀족들의 수집품이 되었지만 조선은 자기 자체를 이미 수 세기 동안 일상의 그릇 으로 사용해왔으므로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 일부 청화백자나 오채자기 위주로 중국과 일본의 자기를 들여왔다. 서울 시내 출토양상을 보자면 조선 후기 한양도성에 유입된 외국 자기의 수량은 조선 전 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모양새다.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유상채 자기의 증가 현상 이 추가되지만 청화백자로 만든 발과 접시 등 반상기가 외국 자기의 주류를 이루는 특징은 조선 전기 이래로 계속 이어졌다. 조선시대 해외 교역이 사행이나 일부 상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중국과 일본의 물 산은 자연스럽게 왕실과 사행에 직접 참여하는 관리, 역관 혹은 상인 계층을 시작으로 소비 의 흐름이 마련되었다. 서울 시내에서 조선 후기 외국 자기들이 출토되는 유적이 궁궐이나 그 주변 혹은 시전행랑이 자리하는 종로대로 일대에 주로 위치하는 것도 이러한 상황이 반영 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재원은 조세로 거둔 곡물이며 이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는 주로 산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당시 금석문과 산성에서 출토된 목간 내용으로 볼 때, 사찰 안에 창고가 존재했고, 산성 내 창고에는 보리와 같은 곡물을 60섬(石) 단위로 일정하게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경주 성건동 500-18번지 유적에서 조사된 다 수의 대호를 매납한 대형 건물지는 삼랑사 안에 마련된 창고로 장류와 같은 액상식품과 쌀 등을 보관하던 창고로 추정된다. 성건동 창고유적에서 확인된 대형 창고는 <매호식 건물>로 구분되며 건물 안에 대호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서 일정한 높이로 흙을 성토한 부분이 존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성토부에서는 대호를 절반 정도 묻어둔 모습과 파손된 대호를 수시로 교체한 모습이 확인되며, 대호 위에 토제 뚜껑을 사용한 점은 저장물에 대한 보관관리가 상시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알려준다. 창고 유적에서 출토된 국자는 청동제와 목제 또는 조개껍질로 만들어 사용했는데, 보관중인 저장품이 변질되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해서 필요에 따라서 다른 재질의 국자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호 안에서 출토된 숯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장류를 담글 때 백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당시 식생활 모습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당시 창고유적과 비교한 결과 경주 성건동 500-18번지 유적의 창고건 물은 삼랑사와 관련된 저장시설로 생각되며, 당시 황룡사, 실상사 등 당대 사찰 내 위치한 창고 모습을 알려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이러한 창고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국가나 관청의 관리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므로, 향후 조사가 확대된다면 창고의 구조에 따른 차이가 확인될 것으로 판단된다.
무덤은 피장자의 사회적 위치를 함축하고 있어 취락연구와 함께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에 따 라 부장유물의 형식편년이 아닌 양식편년을 통해 무덤 편년 체계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부장유물의 형식편년을 통해 무덤의 편년을 했다면, 본고에서는 양식의 편년방법인 석촉과 석검의 순서배열보충법을 통해 동일문화권으로 평가하고 있는 대구지역 무덤 유구의 시간성을 검토하였다.
대구지역 청동기시대 무덤은 석촉·석검의 새로운 형식이 많이 출현하는 단계를 기점으로 하여 총 Ⅰ·Ⅱ·Ⅲ·Ⅳ기로 구분되어진다. 이를 통해 무덤의 변천을 살펴 획기에 따른 양상을 살폈다.
그 결과 Ⅰ기는 무경식석촉과 유구식석검, 유절식석검이 공반하며 재지계 계통 무덤이 축조되었다. Ⅱ기는 무덤에 송국리문화가 유입되는 시기로 송국리형묘제와 함께 무경식석촉과 유구식석검의 부장 은 소멸되고 평근이단경식석촉, 첨근이단경식석촉, 일단병식석검의 부장이 확인된다. 또한 혼축조평 수적식 석관묘와 구획묘가 등장하면서 후기의 사회로 진입한다. Ⅲ기에는 첨근일단경식석촉의 부장이 확인되기 시작하고 판석조평수적식 석관묘가 축조되기 시작한다. 또한 연접된 구획묘의 축조가 증가 하면서 피장자 간의 위계 차이가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Ⅳ기에는 이전시기 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무덤의 축조가 대폭 증가한다. 특히 혼축조평수적식 석관묘의 증가와 함께 석촉 제작의 단순화가 극대화된 능형식석촉이 공반하고 석검은 석검이 가지는 위신재로서의 성격이 가장 잘 반영된 석검 일단병식 Ⅳ식이 공반된다.
따라서 대구지역의 청동기시대 무덤 사회는 Ⅱ기에 송국리문화가 유입되지만, 재지계 무덤의 강한 전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증평 이성산성은 남성과 북성 등 2성이 유기적으로 기능한 토성으로, 산성에서 출토된 철기와 철기 생산 유물의 검토를 통하여 남성과 북성에서 모두 철기제작이 이루어졌으나 제철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산성 내에서는 단조철기 위주의 철기제작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남성과 북성 출토 철기는 대부분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의 시기에 수렴되어 이 시기에 취락 형성 및 토성 축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철기의 변화상과 성벽과 주거지와의 중복관계를 통하여 원삼국시대후기부터 취락을 형성하고 있던 바탕위에 축성이 이루어졌으며, 축성된 이후에도 성내의 여러 시설들을 지속적으로 구축하면서 늦어도 5세기 중엽까지는 성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철기 중 大型鐵釘과 주조철부는 풍납토성 등 백제 중앙으로부터 공급된 것이 있는 반면에, 鐵鋌과 무경삼각형철촉, 릉형철촉 등 동남부지역의 김해․부산지역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철소재 또는 화폐로서 철 및 철기의 교역과 유통과정을 잘 보여주는 철정의 경우 미호천과 금강 수계 및 서해안을 따라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이 시기에 변한 및 가야와 밀접한 교류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大河川수계를 이용한 교역과 교류, 철기 및 철소재의 유통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교역․교류는 원삼국시대 전기부터 있었으며, 원삼국시대 후기에는 한강 하류역까지 교류가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기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북내륙지역과 주로 교류하였으나, 3세기경부터는 김해․부산지역으로 교류 대상이 변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성산성 출토 동남부지역 계통의 철기들은 후자와의 교류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교류 및 교역은 주로 철제품 및 철의 확보를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 이후 4~5세기에 들어서도 백제와 가야간의 교류와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다만 5세기 중후엽 이후에는 김해․부산지역에서 합천․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로 교류의 주 대상이 바뀌어 갔다. 이러한 철 및 철기의 교역․교류과정에는 철제품의 교역과 제철기술자의 이주․정착 단계, 철제품과 철소재(철정)의 교역과 신․구의 이주․정착 제철기술자들의 기술이전 및 현지화 단계, 제철 및 철기의 백제적 정형화와 확산 단계 등 3단계의 변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부모산성에서는 건축부재류, 농공구, 무기, 마구 등 다수의 철제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철제유물의 특징과 계통, 사용 시기에 대하여 검토해본 결과, 백제계․고구려계․신라(통일신라)계 등으로 변별되었다. 이와 같이 계통 분류된 철제유물들을 연대 추정이 가능한 타 유적 출토 철기들과 대비하고, 함께 출토된 토기류의 편년과 대비해본 결과 크게 다섯 개의 획기로 나누어지며, Ⅴ기 이후에도 다시 2개의 획기로 구분될 가능성이 상정되었다. Ⅰ기는 백제 한성기 후기의 철기와 토기 등의 유물들과 이와 관련된 주거지․저장수혈 등이 나타나는 시기로서, 5세기 중후엽 이전부터 백제 세력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Ⅱ기는 5세기 중후엽으로 편년되는 고구려계 유엽형․착두형 철촉 몇 점과 토기편들이 미미하게 나타나는 시기로, 이 시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고구려 세력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城內에는 고구려 세력이 직접 주둔하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Ⅲ기는 6세기 중엽~후엽, 신라계 무기류와 농공구류가 신라후기양식토기들이 급격히 돌출하는 시기로서 6세기 중엽부터 신라세력에 의해 석축산성이 축성된 후, 6세기 후반까지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Ⅳ기는 백제 사비양식 무기, 농공구류와 토기와 기와가 돌출하는 시기로서 부모산성을 백제가 다시 탈환하여 일정 기간 점유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Ⅴ기는 6세기후반~7세기 3/4분기 이전으로 편년되는 장경식의 신라계 무기류, 농공구류, 건축부재류 등 대다수의 신라계 철기들이 다시 집중되는 시기로서 부모산성이 신라세력에 의해 다시 탈환되어 그 이후 지속적으로 점유되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Ⅴ기 이후인 7세기 3/4분기 이후에는 신라토기와 철제유물은 잘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7세기 중후반경, 백제(660)와 고구려(668)의 멸망과 삼국통일, 서원소경의 설치(685)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종전에 비해 부모산성의 위상과 중요성이 약화되었거나 새로운 편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상정되었다. 그 후 8세기중엽 이후 전형적인 통일신라 토기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어, 기존에 청주지역에 설치된 서원소경을 서원경으로 개칭되면서 행정개편이 이루어진 것과 연동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와 같이 부모산성은 5세기 중엽 ~ 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백제․고구려․신라가 수 차례에 걸쳐 서로 뺏고 뺏기는 각축장으로서 행정․군사․물류 거점 역할을 하였던 중요한 관방시설로서, 부모산성과 청주지역 뿐만 아니라 시기에 따라 삼국간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관방유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에 위치한 황산진지 유물산포지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대상지로 자건거 공원 건설이 예정된 곳이다. 이에 한국물물연구원에서는 2009년 2월~4월 동안 지표조사를 거쳐 2009년 9월~2010년 2월까지 표본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석축유구는 남북으로 총 연장 2.8㎞에 달하였고 이에 2010년 4월~8월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본 연구는 이 석축유구의 축조수법과 구조 그리고 성격 규명을 위해 기획되었다. 석축유구가 발견된 지역은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일원으로 낙동강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형성된 사주로 활주사면에 해당한다. 조사지역의 동쪽은 경부선 철도 너머 배후습지가 발달해 있으며 대규모 시설작물을 재배하는 밭과 논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총 길이가 2.8km에 달하는 석축은 대략 해발 1.6~2.2m 내외의 지형을 편평하게 정지한 갈색 사질점토층 위에 모래를 성토한 후 조성하였으며 1구역에서는 모래성토층 없이 갈색 사질점토충 위에 바로 축조하였다. 잔존하고 있는 석축은 폭 3m 내외, 높이 1.5~1.8m 내외이다. 석축은 증산과 오봉산의 암반을 절개한 할석을 사용하여 축조되었는데 수법은 협축의 허튼층쌓기이다. 석축의 외부 면석에 사용된 돌은 크고 내부는 적심석과 흙을 섞어 쌓았다. 석축유구의 기반부에서 출토된 순청자편과 AD920±} 30년으로 판명된 석축유구의 기반층인 갈색 점질사토층에 대한 OSL 연대측정결과를 참고할 때 석축유구는 대략 11~12세기 즈음에 축조되었다. 단면조사 결과 석축은 한차례 수축을 거쳤으며 14세기 즈음 폐기되었다. 석축유구의 성격은 강변을 따라 일직선으로 뻗어 있고 3구역에서 하도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시설이 추가된 점을 근거로 고려시대 석축제언일 가능성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문헌에 나타나는 물금지역의 군사적 중요성,『동여비고』에 그려진 ‘고장성’의 위치 등을 고려하면 방어시설일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방어의 효율성 등을 고려하면 석축유구를 방어시설로 간주하는 데에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석축의 정확한 기능은 향후 남겨진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