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祖反正(1623)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남명학파는 戊申亂(1728) 이후 강우지역 에 대한 경계와 불신이 짙어지면서 더욱 위축되더니, 끝내 과거의 영광을 회복 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야 했다. 눌암 박지서가 한창 활 동하던 시기는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으로, 남명학의 쇠퇴가 150년 이상 지 속되고 나아질 기미조차 없던 시기였다.
눌암은 가계·학문·지역적 연원으로 보아 남명학적 성향이 다분히 드러날 수밖 에 없는 여건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배제된 지역의 在地士族으로서 문중을 살리기 위해서는 현실적 대세를 비켜갈 수 없었다. 이에 진주지역에 세거한 눌암의 문중도 증조부 때부터 南人化 성향을 드러냈고, 눌암에 이르러 더욱 폭넓은 교유를 통한 남인화가 이루어졌다. 그에게서 보이는 退溪 중심의 治學 방법이나 문학작품에서 남명학 관련 언급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점 등이 이러한 문중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눌암이 강우지역 남명학파적 성향을 버리고 남인으로서의 특성 만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가계·학문·지역적 여건에 의해 계승된 남명학파적 성 향 위에 남인화 성향이 보태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눌암이 평생 이룩한 수많은 지적활동은 강우지역에 집중되어 나타났다. 강우지식인의 오랜 염원 인 南冥의 文廟從祀 請願을 주도하였고, 침체된 진주지역의 鄕學風 쇄신을 위해 향교와 서원 등의 교육시설 중건에 앞장섰으며, 남명학파의 시련과 함께 역사에 묻혀버린 지역 선현의 삶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들이 이를 증빙하고 있 다. 적어도 그의 생애에 드러난 활동으로 평가한다면, 눌암은 남명학파적 성향 을 지닌 江右學者였다고 하겠다.
恩津林氏 가문은 16세기 葛川 林薰과 瞻慕堂 林芸이 나와 학문과 덕행으로 重望을 얻어 儒林社會에서 家門의 聲價를 높였다. 瞻慕堂의 손자 林谷 林眞怤가 외조부 立齋 盧欽, 蘆坡 李屹 등의 南冥學派 계통의 학문을 계승하여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루었다. 임곡은 三嘉로 옮겨와 활동하였는데, 鄭桐溪, 許眉叟, 趙澗松 등과 교유를 통해 학문의 폭을 넓히고 활동범위도 넓혔다. 특히 허미수와의 교유를 통해서 近畿南人의 학자들의 학문 경향도 접하게 되었다. 임곡은 慶尙右道 학자 가운데서는 문집의 양이 비교적 많은 편이고 많은 제자를 길렀다. 특히 그가 大君師傅에 제수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학문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임곡 이후 이 가문의 학문이 끊어진 것이 아니고 20세기까지 면면히 계속되었다. 임곡의 아들 虛齋 林如松과 反求堂 林如栢도 모두 家學의 전통을 계승하여 학문을 갖춘 인물이었다. 반구당은 龜溪書院 원장에 추대될 정도로 학문과 명망이 있었다. 구계서원 원장으로서 龜巖 李楨 의 弘揚과 龜溪書院 중건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허재와 반구당의 아들들도 학문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허재의 아들 述齋 林東遠, 反求堂의 아들 錦岡 林東茂, 梅軒 任東說, 潤叟 林東迪 등이 학문 활동을 크게 했다. 林谷의 손자 시대가 임곡 후손들의 학문 활동이 가장 왕성하던 시기이고 유림의 推重도 가장 크게 받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집안 외적인 상황으로는 1623년 仁祖反正 이후 慶尙右道 지방의 南冥學派 침체와 西人들의 회유 등으로 경상우도의 학문 전체가 떨치지 못하던 시대가 계속되었고, 집안 내적으로는 가난과 단명 등으로 家運이 번창 하지 못하여 학문 활동이 점차 위축되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도 이 집안은 慶尙右道에서는 오랜 기간 대대로 孝悌를 중심으로 실천 위주의 학문과 저서를 중시해 온 가문으로 江右 地方의 대표적인 學者家門으로 손꼽을 수 있다.
본고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慶南 宜寧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간재학파 문인인 新庵 田溶珪(1884~1962)의 학문 활동을 艮齋學 계승의 면모를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전용규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의령의 儒風과 潭陽田氏 가학을 배경으로 그 기초가 형성되고, 20대 이후 간재 문하에 입문한 이후에는 간재의 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된 만큼, 그의 학문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의령의 儒風 및 담양전씨 가학, 그리고 간재학의 중심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유의하여 본고에서는 전용규의 학문 활동을 검토하기에 앞서 그 배경으로서 의령 지역 및 담양전씨 문중의 학문적 특징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문 활동을 간재학 계승과 전개를 중심에 두고 학파를 넘나든 교유 활동, 유교 문화의 계승과 보존에 주목한 강학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추어 검토하였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전용규의 학문 활동은 지역과 문중의 개방적 학풍 및 의리 정신을 바탕으로 암울한 시대 상황 하에서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대신하여 유학의 맥을 보존하기 위해 은거 및 강학을 선택하여 전개됨으로써 유교 문화의 보존과 계승에 주안점이 두어졌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본고는 19세기 후반 이후 영남 우도지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蘆沙學 派 문인들의 학문적 연원이 되는 蘆沙 奇正鎭(1798∼1879)의 학문 활동을 韓 末 畿湖學界의 동향과 관련하여 고찰한 것이다. 門戶 分立에 따른 학파 분화, 그리고 이에 따른 다양한 학문적 입장의 대두 속에서 기정진의 主理的 학문 경 향이 가지는 위상을 검토하였으며, 특히 20세기 초반 기호학계의 논란이 되었 던 理 중심의 이기론과 호락논쟁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았다. 기정진은 호남을 중심으로 꾸준히 강학활동을 펼치면서 그 학문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계의 학문 연원이 되는 栗谷 성리설에 대한 비 판적 입장을 제시하며 자신의 학설을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당시 기호학계의 최대 논란 대상이었던 호락논쟁에 대해 인성물성동이를 중심으로 비판적 지양 의 입장을 취하였다. 리를 중심으로 한 그의 성리설은 실천적 위정척사로 현실 화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학문관은 그의 문인에게 계승되어 호남과 영남 우도 지역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그의 학문 활동을 영 남 우도의 학계 지형에 유의하여 전반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金鎭祜는 경상도 단성의 商山金氏 가문에서 1845년에 태어나 1908년까지 활동한 학자였다. 단성의 상산김씨는 조선 중기에 이미 ‘八文章家’가 배출되어 영남의 名家로 알려졌다. 19세기 중반에 상산김씨 문중 書齋인 仁智齋는 김씨 문중의 家學의 산실이자 강우학계의 학술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김진호는 인지재에 소장된 수많은 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교육환경에서 자 랐다. 김진호는 17세부터 박치복의 문하에서 詩文을 배웠고, 이어 허전의 문하에서 禮學을 익혔다. 우선 그는 스승 박치복이 운영하던 百鍊齋에서 70여명의 강우 학자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 뒤 그는 麗澤堂을 지어 박치복과 함께 講學활동 을 하였고, 박치복이 작고한 이후에는 그가 이택당을 맡아 후진을 양성하였다. 또한 그는 허전의 문하에서 禮學을 배웠는데 禮를 해석함에 있어 人情의 측면 보다는 義理의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19세기에 강우학계의 학자들은 조선이 처한 위기를 理學을 새롭게 해석하여 극복하려고 하였다. 김진호는 理氣說에 있어 스승 이진상의 학설을 계승하여 七情도 理가 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김진호는 明德을 心으로 이해하 여 명덕은 理이지 氣를 겸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김진호의 다 양한 주장은 19세기 당시 조선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禮學이나 理學을 義理중심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본고는 조선의 경학사에 일획을 그은 君王인 정조와 신하인 정약용의 학문적 만남을 詩經講義라는 텍스트를 통하여 조망한 논문이다. 이들의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통상의 經筵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군왕이 자신의 의도로 선택한 인재와 질의응답을 통하여 새로운 경학의 세계를 확장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우선 전통적 帝王敎育의 유형으로 정도전 · 권근 · 이황 · 이율곡 등의 사례를 들어 조선시대 경연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교육상을 알아보고, 이것에 대응하는 역대 왕들의 경연 참석 상황을 살펴보았다. 정조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말하면 好學의 學者적 君王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조의 유교적 이상정치와 현실의 실현이라는 점점에 정약용을 비롯한 초계문신이 위치한다. 초계문신 뿐 만 아니라, 정조의 정치적 학운 활동에는 학파 • 지역 · 신분 의 차를 초월하여 다양한 유자가 참여한다. 이러한 열린 학문 활동은 곧 당시 사회의 개방성에의 지향을 엿보게 함과 동시에 보편 문화의 성숙을 알려준다. 『시경강의』를 통하여 살펴본 두 사람의 기본적 경학관은 상당히 유사하다 양쪽 다 주자의 경학적 업적을 존중하지만, 논리상 부합하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회의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정조는 정약용만큼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조의 개방적 경학관에 힘입어 주자를 극복하는 정약용의 독창적 견해가 빛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러한 脫朱子의 경학관은 정조시대의 새로운 학 풍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시경강의』의 내용분석을 통하여 정치와 사회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 를 알아보았다. 특히 ‘賢人 ’에 있어서 정조가 유교의 전통적 賢人觀을 견지하고 있음에 비하여, 정약용은 어느 분야에서냐 기능이든 학문이든 할 수 있는 데까지 매진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그를 현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고착화된 신분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견해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安民’의 문제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시각을 노정한다. 安民의 기본조건으로 治者계층의 德化를 중요시한다. 堯舜의 至治를 정치의 이상형으로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治者는 古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想定한다. 이러한 본고의 고찰을 통하여 정조와 정약용과 갇은 군신 간의 학문적 활동은 글자그대로 敎學相長적인 만남이며, 조선경학의 실학시대를 만개 시킨 動力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