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중국 향촌진흥(鄕村振興) 전략은 제도적 틀과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다. 지역 적 이해관계, 비효율적인 감독 또는 공무원의 정책 이행 실패 등으로 인해 정책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본 연구는 중국 농촌 지역 주민이 한국의 새마 을운동과 글로벌새마을운동에 대한 수용성을 검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UTAUT 모델을 이용하였으며, 10개의 연구 가설을 제시했다.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마을에 서 374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했고, Smart-PLS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조사 결과를 검증하였다. 연구 결과는 새마을운동(새마을운동 1.0)의 세 가지 정신이 중국 농촌 지역 주민의 행동 의도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았고, 글로벌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 2.0)이 새마을운동 1.0보다 더욱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여주었다.
본 연구는 와첩 구성경관에 관한 이론정립과 와첩 관련 경관의 설계와 연출 근거를 제공할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이를 위해 중국 하남성 신양시 향촌경관을 사례로 SBE-SD법을 결합하여 와첩 경관에 대 한 경관미를 평가하고 선호요인을 규명한 것이다. 연구결과 와첩 구성경관에 대한 반응은 대부분 인 구통계학적 특성에 관계없이 일관적인 심미성을 보였지만 거주지 속성에는 차이를 보였다. 예술과 문화가치는 와첩 구성경관의 경관미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반면에 평면구성 및 색채구성의 복잡도 는 오히려 경관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중회귀분석을 통한 와첩 구성경관에 대한 선호요인 을 추적한 결과 지역의 장소성 구현이 와첩 경관 연출의 우선적 고려사항임이 밝혀졌다. 또한 주변 경 관요소에 부합되는 척도 구성은 와첩 구성경관에 대한 결정적 선호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와 첩 구성경관이 대부분 근경의 경관요소로 작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기와(瓦) 자체의 질감은 긍정적 선 호요인으로 드러났으나 색채의 풍부도나 다양한 색상의 경관 연출은 경관미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향촌진흥은 중국 19대 공산당대회의 중요한 의사 결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아 소강사회(小康社會)를 전면적으로 건설하는 중대한 임무라고 할 수 있다. 향촌진흥은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경제적 기반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또한 정신문화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중국향촌진흥 전략기획(鄉村振興戰略規劃: 2018-2022)>에서는 ‘향촌 특화 문화산업 발전을 통해 특화 문화산업마을과 문화산업단지를 조성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문화산업으로 향촌을 진흥·발전시키는 것은 갈수록 늘어나는 물질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 해결’에서 벗어나 점차 ‘다양한 정신적 추구’를 전환하는 수요도 만족시킬 수 있다. 향후 일정기간 동안, 문화산업을 통해 향촌진흥을 촉진하는 것은 중국의 농촌현대화를 실현하는 것이며, 수입증대의 주요한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본 연구는 우선 문헌연구를 중심으로 문화산업과 향촌진흥의 이론적 관계를 정리하고, 해외 선진국의 사례연구를 통해 문화산업을 통한 농촌진흥·발전 방법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리고 최근 중국문화 산업의 발전현황과 문화산업을 통한 향촌진흥·발전의 문제점에 대해 분석하였다. 이상과 같은 연구를 바탕으로 중국경제사회발전의 현실을 고려하고, 해외 대표적인 사례 연구를 바탕으로 중국문화산업이 향촌진흥·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효과적인 경로와 정책에 대해 제시하였다.
As China enters the 21st century, China is strengthening its position as a world power in an international position. However, there are still problems with Three Agricultural(Agricultural, Rural, Farmer) and unbalanced urban and rural villages. China, as one of the largest and most populous nations, values the development of three farms. Strategies such as “The Construction Of New Socialist Countryside” were a policy to solve rural problems, But they were not enough to achieve breakthrough results. In order to achieve more effective results,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STATE COUNCIL proposed The Document No.1 of “Opinion on the Implementation of The Rural Revitalization Strategy” in February 4, 2018 and published “The Rural Revitalization Strategy (2018-2022 )”. The Yanbian region, which is the subject of this study, is the home of Korean-Chinese tribes and the Korean autonomous region. As a minority of Chinese ethnic minorities, the Korean-Chinese has their own unique culture, and Yanbian has distinct regional characteristics. As The Rural Revitalization Strategy was raised, Villages is showing positive change in accordance with policy implementation in Yanbian. This study analyzed the current status of policy implementation of The Rural Revitalization Strategy in Yanbian area and analyzed the policy contents and performances based on the of Yanbian Daily News. Based on the results of the analysis, I would like to help in suggesting a more rational development direction and building the villages.
본고는 영조대의 하동 안계 마을의 학자 하대관의 가문계승의식과 향촌사회활동을 알아 본 것이다. 시기는 1748년부터 1758년까지 10년에 걸친 기간이다. 하대관의 글이 오로지 이 시기에 걸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 시기의 그의 활동이 1759년 가을부터 전개되는 종천서원 시비의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문집의 분석을 통해 볼 때, 하대관은 부친으로부터의 가학을 통해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업적을 알게 되어, 그의 학문은 선조들의 전통과 남명학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그의 학문은 향당에서 충절과 효행, 경의를 중시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는 영남남인 외에도 기호 남인과의 교류를 강화하여 자신의 가문과 진주 사족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겸재집』 간행, 족보편찬, 교육과 교화활동, 부당한 조세징수 반대, 『진양지』 간행 등은 모두 이러한 그의 사상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본고는 서부경남지역의 저명한 학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조성가의 ..월고일기..를 통해 서부경남지역의 동학의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을 살핀 것이다. 서부경남지역은 관리들의 탐학과 혹심한 가뭄으로 자주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호남지역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다. 1894년 4월 산청 덕산에서 백낙도 등의 동학교도들이 처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월부터 호남지역의 지원을 받아 덕산의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다시 활발하게 재개되었다. 동학농민군은 8월 19일부터 곤명의 봉계와 진주의 마동 일대에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동학농민군에 비판적인 사족들을 체 포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9월 초 섬진강을 건너온 순천, 광양의 영호도회소나 구례 등지를 거쳐 남원 등에서 온 호남지역 농민군과 함께 하동,진주, 사천, 곤양 등지를 동학농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과 왜적의 침 입을 막아낸다는 명분하에 대규모로 집결하였기 때문에, 진주 병영이나 관아에 서도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서부경남지역 동학농민군을 공 격하게 하였다. 그 중 가장 큰 전투는 10월 14일 전개된 하동의 고성산성 전투 였다. 동학농민군은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무기와 전투기술 에 눌려 끝내 동학농민군은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이곳에 관군이 진격하 고 진주 우병영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종식되게 되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맞서 경상 우병영에서는 각 지역의 사족들을 군무 참모관으로 임명하고, 지역별로 성첩을 수리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각 지역별로 요호(饒戶)를 대상으로 군무참모관을 뽑아 향회를 개최하고, 성첩 을 수리하고, 군기를 보수하였으며, 군량을 확보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당시 사족들은 경상우병영의 대책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으나, 어쩔 수 없이 자금을 제공하고, 군무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다. 각 마을에서는 오가작통제를 강화하고 산에 보를 축조하였다. 오가작통제는 경상감영의 지시로 실시되었는데, 각 洞에 오고가는 자를 살펴서 수상한 자취 가 발견되면 통수→두령→통장→영수→관아→감영으로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 었다. 보는 진주 우병영의 지시로 단성이나 옥종면 일대의 산에 많이 축조되었다. 월횡리에서 축조한 사림산 보의 경우, 보의 축조에 마을 사람 전체가 동원되었 다. 마을 사람들은 산의 정상에 성문을 축조하고 보 안에는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집을 지었다. 그리고 식수원과 연결하는 길을 내었다. 그러나 이 보는 땅 이 좁아서 마을 사람들이 거주하기 불편하였고, 동학농민군의 신속한 공격에 맞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오가작통이나 보의 축조에도 불구하고, 마을에서는 동학농민 군에 가담한 인물이 점차 늘었다. 월횡리에는 최소한 두 개 이상 동학농민군 조 직이 있었으며, 10월 초 일본군이 진격해옴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동학농민군 에 강제 징집되었다. 대부분 탈출하였으나, 상당수가 동학농민군을 따라 백곡, 수곡, 북평을 거쳐 이동하였으며, 고성산성 싸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고성산성에서 패배함에 따라 전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죽거 나 피신하였으며, 월횡리에는 도인과 속인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동학농민혁명 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