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한반도 연안 측량이 최초로 이루어진 1787년부터 국권피탈이 일어난 1910년 이전까지 한반도 인근 해역을 측량한 서양 국가가 해양지형을 인식하고 지명을 명명한 특성을 고유지명의 특징을 통해 파악하였다. 이를 위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에서 간행한 항해기 11권, 측량 보고서 5권, 해도 45점, 지명집 3권을 수집해 한반도 연안 해양 측량의 시·공간적 특색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수집된 자료들로부터 118개의 해양지명을 추출하고 유래를 조사하여, 지명 명명 유형을 묘사, 감정평, 차용, 기념(인물, 선박, 일반명사) 등 크게 4개 유형으로 나누어 국가별·시기별 명명 유형을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첫째, 한반도 연안 해양 측량은 1787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영국, 미국, 러시아에 의해 활발하게 이뤄졌다. 해안별로 살펴보면 동해안의 경우 러시아에 의해 상세한 탐사가 이루어졌으며, 남해안은 영국을 중심으로, 서해안은 프랑스·영국·미국 등 여러 국가에 의해 측량되었다. 둘째, 명명 유형의 경우 인물과 선박을 기념하는 사례가 각각 46개(39%), 25개(21%)로 주요 명명 유형으로 나타났으며, 뒤이어 묘사 15개(13%), 차용 13개(11%), 일반명사 기념 9개(8%), 감정평 유형 5개(4%) 순으로 나타났다. 셋째, 서양 국가는 지명 명명에 있어 기념 유형을 선호하며, 특히 러시아와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와 비교하면 기념 유형을 이용한 지명 명명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넷째, 강화도 조약 이전 시기에서 강화도 조약 이후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국과 러시아는 해양지명의 명명 사례 수가 증가하는 경향인 반면, 프랑스, 미국은 지명의 명명 사례 수가 줄어드는 추세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모더니즘을 "새로운 것"과 동일시한다. 1910년에, 혹 그보다 10년 전 혹은 후, 시 혹은 다른 문화와 지적 영역에 있어, 전통과 다른 중요한 새로운 것들의 출발이 되는 시점이었다. 미국에서, 에즈라 파운드, 왈러스 스티븐스, 그리고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같은 시인들이 족적을 남기고, 『시』, 『대중』, 그리고 『새로운나라』로 대변하는 작은 문예지의 문화가 등장하고, 그리고 그리니치 빌리지는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1차대전 참전은 이 운동에 제동을 걸고, 전후 시기는 여려 면에서 달라졌다. 반면, 아프리카계 작가와 예술가는 할렘 르네상스의 결과로 그 전보다 1920년대에 더 큰 인정을 받는다.
In the time of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Japanese style official residence played major role at the implantation of modern dwellings into Korea and its influences on Korean modern dwellings are distinguishable. This study focuses on the Japanese style official residence implanted into Korea before 1910. Before 1910 Japanese civilians in Korea builded just a traditional Japanese dwellings at the Japanese settlement in the ports opened. But Japanese engineers engaged in governmental organization of construction in the Old-Korean Empire builded a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s as official residence.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 was an urban dwelling compromised between Japanese style and western style and distinguished by an outer-court type plan, Japanese entrance hall, central corridor and western style reception room. It is certified that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 was implanted into Korea before 1910 and this was the first time an urban dwelling to be implanted and spread through the whole Korea.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 implanted into Korea took in On-Dol and transformed to Korea-Japanese eclectic style.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s implanted into Korea in the time of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makes function as a precedent of a modern urban dwelling to Korean and makes Korean dwellings transform from the rural inner court type into the urban outer court type.
본 연구의 목적은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 무속신앙을 어떻게 이해 했는지를 보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몇몇 연구자들이 선교사들의 한국 무속 이해를 간략하게 언급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를 다룬 연구도 있었다. 그러나 무속신앙에 초점을 맞추어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초기 선교사들이 무속신앙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을 제공한다.
본 연구는 선교사들이 인식한 한국 종교 체계 속에서 무속신앙의 위치를 다룬다. 한국인들이 무속신앙을 어떻게 느꼈다고 선교사들이 인식했는지도 다룬다. 한국인들의 무속신앙 인식에 따른 다양한 행동들도 분석한다. 한국인들의 무속신앙 속에서 선교사들이 기복주의를 발견했음도 살펴본다. 악귀와 관련된 다양한 무속신앙의 치유방법들이 선교사들에게 목격되었음도 살펴본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무속신앙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며 대결의 대상으로 삼았음도 확인한다.
본 연구의 방법론은 문헌연구이다.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 경험을 토대로 책을 저술하였고, 편지, 잡지, 일기를 통해 그들의 무속신앙에 대한 견해를 드러냈다. 이러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선교사들의 이해를 분석하여 정리하게 될 것이다.
The relationship between mission and imperialism has been one of the central themes which recur throughout missiology, in particular, mission history. In the case of the Korean Church, this theme also has particular significance for church history in that it was related to the origin of the Korean Church, especially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This study attempts to examine this theme,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 in Edinburgh, 1910. It is because, first, the Korean Church was established in the context of imperialism; second, in Korea did arise an irregular case of the relationship between mission and imperialism, namely, western mission versus non-western imperialism rathallthan normal one, namely, western mission versus western imperialism; and third, the abovementioned Edinburgh Conference was held at the peak period of imperialism, from the late nineteenth century to the early twentieth century.
Since the last year was the centennial of the Edinburgh Conference, the Conference was almost thoroughly investigated. In this context, it may also be well worth exploring the Conferenc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relationship between mission and imperialism. In particular, this study tries to grasp the reality of the Korean Church at the period under consideration, through unearthing archival material, that is, the draft reports to the Commissions of the Edinburgh Conference, which have rarely been utilized in the hitherto studies.
In conclusion, this study makes it clear that the western mission, including the western mission working in the non-western imperial context, in the pre-World War Ⅱ period was largely under the influence of the ideology of imperialism, although mission could not totally identify with imperialism. It is against this backdrop that arises a question of whether the end of imperialism means the end of mission. This is why the post-colonial period exacts a new paradigm of mission.
일본의 독도에 대한 완강한 영토권 주장의 직접적인 근거는 다름 아닌 바로 이 ‘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다. 이 조약 무효 원인 이분 론(二分論)과 조약법상 강박의 개념에 관련된 법리들에 관한 한국 학자들의 법적 논의가 하루 빨리 정확하고 정연한 법적 정론(正論) 으로 확립되지 않는 한 한 · 일 간의 독도문제는 영구 미제(永久未濟)의 영유권 분쟁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좀 더 종합적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부폰재’가 한 · 일 간에 더 이상 다툼이 없는 법적인 명제로 수 용되지 않는다면, 한 · 일간 과거사 인식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 이며 따라서 양국 간의 정상적인 협력과 화해는 근원적으로 불가 능하게 될 것이다.
1965년 ‘한일기본관계조약’을 당장 폐기하고 대등한 한 • 일관계 를 정립할 수 있는 새로운 조약을 ‘명확한 합의로써’ 다시 제정하 라는 필자의 결론은 부담스럽고 반갑지 않은 ‘편협한 소수 의견’ 으로 i렴하되고 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