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경상남도 함양군 대봉산의 산림휴양단지 조성예정지의 식물상을 분석, 보존 및 보호방안을 수립하기 위하여 2015년 4월부터 10월까지 수행되었다. 전체적인 식물상은 80과 172속 212종 3아종 26 변종 5품종으로 총 246분류군이 확인되었고, 양치식물계수는 0.71로 분석되었다. 과별 분포현황은 국화 과, 백합과, 장미과, 벼과 순으로 높게 나타났고, 종/속 비율은 1.23으로 나타났다. 특산식물은 은꿩의 다리, 노각나무, 흰괭이눈, 고광나무, 병꽃나무 등 총 5분류군이 나타났고, 희귀식물은 측백나무, 태백 제비꽃, 말나리, 꽃창포 등 총 4분류군이 나타났다. 귀화식물은 애기수영, 미국자리공 등 총 12분류군 으로 귀화율은 4.9%였다. 식물구계학적 특정식물은 총 20분류군으로써, Ⅳ등급 측백나무, 고로쇠나무 등 총 2분류군, Ⅲ등급 흰진범, 노각나무 등 총 3분류군, Ⅱ등급 털괭이눈, 돌양지꽃 등 총 6분류군, Ⅰ등급 개비자나무, 물박달나무 등 총 9분류군이 나타났다. 본 연구에서 도출한 결과를 이용하여 조성 예정지의 생태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보전과 활용방안 수립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것이다.
본 연구는 함양 상림 천연기념물의 식생구조, 환경피해도 등 환경생태적 구조를 분석하여 생태적 관리방안을 제시하고자 수행되었다. 식생구조에서 현존식생은 22개 유형으로 분류되었고 졸참나무-개서어나무군집(31.8%), 졸참나무군집(14.5%)이 넓게 분포하였다 주요 식물군집은 졸참나무군집, 졸참나무-개서어나무군집, 갈참나무군집, 상수리나무군집, 개서어나무군집, 개서어나무-졸참나무군집, 느티나무-졸참나무군집, 조경수식재지 등 8개 유형이었고, 층위발달 정도에 따라 13개 식물군집으로 세분되었으며, 대경목의 수령은 61∼77년생이었다. 환경피해도에서는 등급 3이 51,950m2(32.8%), 등급 4는 5,583m2(3.5%), 등급 5는 4,086m2(2.6%)로 인위적 복원이 필요한 등급 3∼5의 총면적은 61.619m2(38.9%)이었다. 현존식생, 식물군집구조, 환경피해도를 고려하여 비오톱을 유형화한 결과 총 14개 비오톱 유형으로 구분되었으며 이 중 관목층이 훼손된 참나무류 장령림(51,246m2, 32.4%), 단층구조의 낙엽활엽수 장령림(19,906m2, 12.6%)의 분포면적이 넓은 반면, 다층구조의 낙엽활엽수 장령림(2,085m2, 1.3%)과 참나무류 장령림(14,943m2, 9.4%)은 합계 10.7%에 불과하였다. 장기적으로 함양 상림 자연생태계의 안정화를 위하여 다층구조의 낙엽활엽수 장령림 및 참나무류 장령림은 보존대상으로서 이용객 통제와 아울러 보호 관리해 나가야 할 것이며, 관목층훼손 식생지와 단층구조 식생지는 소극적 복원지로서 군집유형별로 상림내 안정된 다층구조의 자연식생구조를 모델로 하여 생태적 천이발달을 유도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잔디광장과 조경수식 재지는 적극적 복원지로서 다층구조의 참나무류군집과 낙엽활엽수군집 (개서어나무 우점)을 모델로 하여 관리해야 할 것이다.
곤충병원성 선충 Steinernema carpocapsae 포천 계통(ScP)과 Heterorhabditis bacteriophora함양 계통(HbH)을 이용한 밤 종실해충의 실용적인 방제를 위하여 밤나무 재배농가 에서 취하는 여러 가지 종실처리법과 관련하여 알아보았다. 수확 후의 밤 종실에는 밤바구미, 복숭아명나방, 밤애기잎말이나방 유충이 발견되었으며, 한 종실에 한 종류의 해충이 발견된 것은 58%로 밤바구미가 18%,복숭아명나방이 27.7%, 밤애기잎말이나방이 12.3%였다. 반면, 밤바구미와 복숭아명나방이 함께 발견된 종실은 3.3%, 밤바구미와 밤애기잎말이나방이 함께 발견된 종실은 5.0%,복숭아명나방과 밤애기잎말이나방이 함께 발견된 종실은 7.7%, 밤바구미와 복숭아명나방, 밤애기잎말이나방 등 3종의 해충이 함께 발견된 종실이 5.0%였다. ScP와 HbH는 모든 종류의 종 실해충에 효과가 있었고, 밤애기잎말이나방보다는 밤바구미와 복숭아명나방에 더 효과적이었다. ScP의 값은 밤바구미 유충이 14.6마리, 복숭아명나방 유충이 4.6마리, 밤애기잎말이나방 유충 이 5.6마리 였고, HbH의 LC 값은 밤바구미 가 49.2마리 . 복숭아명나방이 5.8마리 , 밤애기잎말이나방 이 13.9마리였다. ScP을 pot내의 종실에 4,813마리/pot마리1ha)의 농도로 처리한 것에서도 종실내의 밤바구미 유충은 85.3%,복숭아명나방 유충은 96.9%, 밤애기 잎말이나방 유충은 68.1%가 치사되었고, HbH의 처리에서는 각각 60.7%, 96.5%, 66.8%의 치사율을 보였다. 두 선충을 단독 처 리의 반수 농도로 혼합 처리하였을 때는 ScP에 의한 치사가 Hb보에 의한 치사보다 모든 농도에서 높았다. 그리고 ScP현탁액에 종실을 처리하여도 침지시간과 농도에 관계없이 종실내의 밤바구미, 복숭아명나방, 밤애기 잎말이나방 유충은 높은 비율로 치사되었다.
이 글은 조선 중·후기 介坪里의 역사 변천을 일두 정여창과 사회·경제적 변화 에 초점을 맞추어 구명한 것이다. 먼저 개평리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인 정 여창의 증조부 정지의, 조부 정복주, 아버지 정육을의 행력을 고증하여 가전 자 료의 오류나 윤색 부분을 구명하였다. 정여창의 행력은 조카 정희삼이 행장으 로 정리하였으나 1550년의 시점에서도 그에 대한 자세한 행적이 널리 알려지 지 않았음을 구명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1552년에 개암 강익이 주도한 사우 창 건은 의미가 크다. 그리고 1570년 5월에 이르러 정여창에 대한 국가의 포증은 대체로 마무리 되었다. 이와 함께 정수민이 수집하여 정구를 통해 찬집한 文獻 實紀는 사림세력의 구심점으로서의 정여창의 위상 정립과 제고의 근거였다는 점에서 개평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다. 다음으로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으로 시행되고, 山郡인 함양도 1662년(현종 3)에 그 대상이 되었다. 이로써 개평리의 상민들은 호세로서 대동세를 포목으로 납부하였다. 개평리의 사족과 상민들은 17세기 중 엽의 庚辛大飢饉과 전염병의 유행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악화, 1728년 정 희량 사건에 의한 정치적 혼란 등으로 불안정한 형편에 처하였다. 더구나 18세 기 중엽 이후 환곡의 폐단은 개평리를 비롯한 함양지역 상민들의 삶을 매우 열 악한 상태로 밀어 넣었다. 대체로 1790년대를 기점으로 극심한 환곡의 폐단에 서 벗어났으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나치게 높게 책정한 田稅木價로 인한 농 민의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개평리에 위치하였던 北倉, 場市, 介坪店 등 은 조선 후기 개평리의 사회·경제적 변동의 양상을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며, 육 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지역 내 거점의 증거이다. 이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사 설의 介坪店이 생겨나고 운영되었다. 개평 장시는 조선 후기 5·10일장으로 개 평리가 주변 마을과의 관계에서 사회·경제·문화의 구심점의 역할을 했으며, 개 평리 사족과 상민들의 다양한 삶의 조건들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산업의 발달과 농촌의 도시화로 인하여 각종 농기계가 도입되면서 혼자서도 농사지을 수 있게 되었고, 들녘을 가로지르던 농부들의 노랫 가락은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온갖 이야기를 풀어내던 사랑방 대신 마을회관에 모여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화면이 시키는 대로 웃고 울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더 이상은 과거와 같은 자연적이고 역동적인 구비문학의 전승현장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남아있는 구비문학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채록하여 지역민의 정서 표출 욕구를 풀어내야 하겠지만 이야기판이나 노래판을 벌이기에 여건이 마땅치도 않고 몇몇 사람의 노래나 이야기만으로 마을을 대표한다고 할 수도 없다. 따라서 가장 최근에 조사된 『한국구비문학대계』 개정, 증보판의 내용이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기에 대계의 자료를 중심으로 개평마을의 설화와 민 요를 살펴보았다. 개평마을의 이야기와 노래가 지니고 있는 최근의 모습은 마을 공동체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문화가 창출되고 변용되는 시공 간이 지닌 구비문학의 양상을 살피는 미시적 모델이 될 수도 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주민들의 유대와 협력을 중시한다. 여성 제보자들은 허구적이며 상상력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즐기며, 남성 제보자는 역사적 사실이나 실제성을 증명할 수 있는 이야기에 공을 들인다. 여성들의 이야기에서도 부모에 대한 효도와 며느리로서 집안을 일으키고 잘 살아야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생을 들여다보고 살피는데 있어서도 여성들의 이야기는 운명적인 데가 많다. 타고난 팔자는 피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도 행운과 불운에 대해 민감하며, 우연과 행운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 구비문학 현장에는 여성제보자들의 이야기와 노래가 많다. 남성들은 이야기판에 관심이 없거나 직접 겪은 일이 아니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감정표현에 솔직하고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여성제보자들의 이야 기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표현이라고 하겠다. 오랜 세월 여성들은 자연적이고 자발적으로 민요를 가창했을 것이며,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즐기고 만족하며 노래불렀을 것이다. 자신 들의 힘들고 고된 삶을 이야기로 풀어내기보다는 민요에 얹어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타박네가 엄마 찾아 산소 가는 사연을 노래 부르며 어머니로서보다는 딸로서 어머니를 찾고 싶은 욕망을 드러냈으며, 계모가 사위 죽이려는 노래에서는 딸이나 여자로서의 꿈과 행복이 가장 좋은 일조차 방해받을 수도 있다는 한스러움을 노래했던 것이다. 농삿일이 기계화되고 놀이조차 행사나 축제의 하나로 통합되면서 여성들이 모여서 ‘노랫가락’이나 잡가를 부르고 놀게 되었던 일까지 이제는 오래 전의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본고는 15세기 초 함양 개평마을에 정착한 풍천노씨 가문이 번창하여 발전한 과정과 가풍(家風)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것이다. 풍천노씨가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예조참판을 지낸 노숙동이 하동정씨 정복주의 사위인 김점의 딸과 혼인하여, 외손봉사를 통해 개평마을에 정착 하였다. 개평의 풍천노씨가는 공신이었던 노숙동에 이어 아들 노분과 손자 노우명을 거쳐 증손자인 노진에 이르러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노진은 이조판서로서 현달하였고, 대학자로서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지리산권 일대의 영, 호남 지식인과 후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노진 이후로도 개평마을의 풍천노씨가에서는 왜란과 호란 때에는 많 은 의병장이 배출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양반들의 명단인 향안(鄕案) 에 함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수록될 정도로 번창하였다. 특히 19세기 에 이르러서 호조참판을 지낸 노광두나,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난 노광리 를 배출하였고, 일제 시대에는 신간회에 가담하여 민족의 장래를 고민하 는 인물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평마을의 풍천노씨가가 번창한 것은 향당에서의 효제(孝 悌)와 조정에서의 충신(忠信), 그리고 매사에 예의염치를 중시하였던 가풍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개평마을의 입향조 노숙동은 성실과 신의에 바탕을 두고 수신과 출사에 걸쳐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 ‘성신염공근간화혜(誠信廉公謹簡和惠)’ 8자 유훈을 남겼고, 아들 노분 은 수신과 청렴한 관직생활을 강조한 ‘청신염결’, 손자 노우명은 일상 행활에서의 중용(中庸), 증손자인 노진의 종형인 노상은 안빈낙도(安 貧樂道)를 가훈으로 남겼다. 이러한 유훈을 이어받은 노진은 노숙동의 8자 유훈을 가문의 법도로 확정짓고 효제를 솔선수범하였으며, 중용을 강조하였다. 이어 노진의 종제 노주는 나라가 위급할 때에 거의(擧義) 하였고, 노진의 종증손 노형운은 효제충신과 예의염치를 강조하였으 며, 노진의 증손 노형필 은 정주의 격언에 따른 실천을 중시하였다. 특히 노형운이나 노형필 등은 가풍 외에도 그들이 사사(私事)하였던 한강 정구의 명체적용(明體適用)이나 예학, 여헌 장현광의 지행병진 (知行竝進)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효제를 토대로 향당과 출사의 가풍을 수립하였던 풍천노씨가 에서는 향촌사회에서 족보를 간행하고 사당과 서원향사에도 더욱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1701년 이후로는 마을의 경쟁관계에 있던 하동정씨 와 연합하여 도곡서원을 설립・운영함으로써 가문의 명성을 높이고 두 가문의 화합을 대외적으로 과시하였던 것이다.
본 연구는 강희맹의 함양시절 시작활동이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 보는 데 있다. 현전하는 문집에 가운데 17권 4책으로 이루어진 甲辰字본 사숙 재집에 이 시기의 시가 실려 있다. 강희맹은 양부 강순덕의 상을 당해 벼슬에 서 물러난 51세 전후의 2, 3년간 함양에 머물렀다.
짧은 시기였으나 이곳에서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였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당시 함양군수로 부임해 있던 김종직과의 교유이다. 어릴 때 교분이 있었던 이들은, 강희맹이 함양에 있는 동안 자주 오가면서 친분 을 나누었다. 중앙 관계를 떠나있는 문인관료로서의 공감대 위에 창화시가 오 가고 시의 영역은 주변 생활을 읊는 것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들의 창화는 함양 시절을 관통해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둘째는 함양의 경물과 소소한 전원생활의 경험이 시적 영감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번잡한 서울을 떠나 직접 채소를 재배하고 약초를 캐면서 농사를 연구하던 강희맹은, 생활 속에 보 이는 가축과 식물을 시재의 하나로 활용하였고 그림으로도 그려냈다.
강희맹에게 있어 함양은 벼슬살이를 하면서 지냈던 경기지역의 전원과 다른 차원에서 온전히 농사 현장을 향유하면서 시를 창작하는 문학적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초기 사림의 종사이다. 그가 조선조 도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것은 그 자신이 문학과 학문에 있어서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을 통하여 인륜 도덕을 숭상하는 사회 기풍을 일으키는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고, 그 문하에 도학의 이념을 실천하는데 앞장선 훌륭한 후학들을 양성해내었기 때문이다. 점필재의 도학 이념에 입각한 정치 교화와 교육의 실천 모범은 그가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던 10년 동안에 가장 잘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봉직하였던 5년 동안의 시문 가운데 정사를 임하는 태도와, 풍교의 대책과 강학 및 유상의 정서를 추적하여, 점필재의 평소 학문 사상과 정치 교육의 성과가 조선전기 도학의 선구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점필재는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 수시로 관내를 순시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물산, 홍수의 재해, 조세와 부역 등, 民生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고, 함양읍성 나각을 보수하고 다원을 경영하는 등 조선초기 지방관원으로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을 주민의 편익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여 시행하였다. 그는 또한 향교를 보수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향음 향사 양로의 의식을 거행하여 인륜 도덕으로 풍속을 순화한다는 風敎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한편으로 많은 문생들을 받아들이고, 그 문생들과 고을 주변의 산천을 다니면서 수시로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도학과 심학의 단서를 열어주었다. 점필재는 함양군에서 시행한 시정과 풍교 강학의 규범은 이 시대 학자들에게 도학 정치 실현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조정의 관료나 재야의 문인 학자로서 그의 모범과 신념을 널리 확산함으로써 한 시대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다. 그런 점에서 함양은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 사상과 경륜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조선조 도학의 본류를 형성하는 전환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