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메소포타미아의 여신 인안나의 도상과 정체성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 수메르의 도시국가시대에서 인안나는 풍요와 대지의 여신이자 하늘의 여신으로 섬겨졌다. 이후 아카드 의 제국기에 인안나는 전쟁과 파괴의 여신인 이슈타르와 결합한다. 인안나가 이슈타르의 속 성을 지니게 되면서 인안나의 도상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우루크의 주식인 보리 혹은 보리 단으로 상징화되는 등 대지의 여신으로 표현되던 인안나는 어깨에서 무기가 자라고, 사자를 제압하는 무시무시한 전쟁신의 모습으로 변화한다. 인안나가 이슈타르와 결합한 데에는 아카 드의 사르곤대왕과 그의 딸 에헨두안나의 역할이 크다. 수메르와의 종교적 제의를 표준화하 고 종교사상을 통합함으로서 수메르의 여신 인안나와 셈족의 여신 이슈타르의 속성은 완전히 융합되어 동화된다. 바빌로니아시대의 미술에서 인안나/이슈타르는 사랑과 성, 금성의 속성이 강조된다. 풍요 의 여신과 목축의 신 두무지와의 신성한 결혼은 아키투 축제에서 왕과 인안나 신전의 사제와 의 결혼으로 재현되기도 하였다. 신성한 결혼과 성행위는 풍요와 연관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이슈타르 여신의 모습도 점차 여성성을 강조하거나 가슴과 엉덩이, 음부를 강조한 지모신의 면모를 보이게 된다. 한편 고 바빌로니아시대 점성술이 발전하면서 달과 금성, 태양의 신은 최상위 신으로 섬겨지면서 천체의 상징을 부각시키는 표현도 등장한다. 수메르의 여신인 인안나는 자신의 본질적인 속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끊임없이 변화하였 다. 그 정체성의 변화는 명멸하는 국가의 역사와 문화와 만나 인안나의 도상에 투영되었다. 인안나는 다른 어떤 여신보다 생명력이 강하다. 그 생명력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흡 수성과 포용성일 것이다. 인안나는 타지역의 문화와 신화를 흡수하며 확산되었고, 서아시아 여신의 모체라고 할 정도로 다른 지역 여신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라 통일기 월지(月池)의 조영은 통일의 위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왕경 도시 체계를 일신 (一新)하는 작업이었다. 또한 유적에서 출토된 3만여 점의 유물은 문헌 자료만으로는 파악 하기 어려운 신라 왕실 문화의 단면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에 이 글에서는 그간 축적된 연 구 성과를 토대로 월지에서 출토된 금동판불 10구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시도하였다. 먼저 현황 분석을 통해 판불 일괄의 출토 정황, 제작기법과 구조, 조성 시기에서 유사점 을 확인하였다. 월지 발굴조사 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보고서 雁鴨池에 따르면 보살 판불 1구는 서편 1건물지, 나머지 9구는 남쪽섬과 동편 사이에서 출토되었다. 이 글에서는 발굴 당시 작성된 야장 기록을 활용하여 이 중 5구의 판불이 월지 내 R12구역에서 발견되는 정황을 확인하였다. 모든 판불은 공통적으로 밀랍주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투조문의 광배와 하단에 촉이 확인된다. 유물은 삼존판불 2구와 보살판불 8구로 구성되는데, 세부 조형 차이 에 따라 두 계열로 나눌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조형 차이가 드러나지만, 시 기 분석을 바탕으로 유물들이 동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다음으로 판불의 존명을 추정하기 위해 유물과 전체적인 도상이 유사한 7~8세기 사례를 거시적으로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 시기 전법륜인은 통인(通印) 양상이 확인되어 수인만으로 삼존판불의 존명을 확정할 수 없었다. 다만 ‘전법륜인상 양협시보살입상’의 삼존 구성은 아미타불에서 다수 확인됨을 근거로 삼존판불의 주존은 기존 인식대로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내렸다. 보살판불은 주요 표식 없이 합장을 한 채 결가부좌하며 여러 구가 현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존을 공양하는 일반 권속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상기한 판불 현황의 유사점을 근거로 유물이 서로 연관되었을 가능성, 도상 분석을 근거 로 아미타삼존판불을 공양하는 보살판불 권속을 상정할 수 있다. 이에 유물 일괄이 함께 특 정 조형물을 구현하였음을 전제로 봉안 양상을 새롭게 추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월지에서 함 께 출토된 금동화불에 주목하였다. 판불과 화불의 도상은 동시기 아미타정토도의 요소와 대응 하며, 동일한 판불 구성이 두 유형으로 현전하는 현상은 특정 석굴이나 불당 공간을 복수(複 數)의 아미타정토도로 장엄하는 양상과 비교되었다. 이에 판불이 화불과 함께 아미타정토를 구현하며 월지 주변 내불당 공간을 장엄하는 목적으로 일괄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간 판불의 조형과 직접적으로 비교되는 예를 찾기 어려워 원 봉안 양상은 난제로 파악 되었고, 유물은 대체로 개별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0구의 판불을 함께 바라보면 아미 타정토를 구현하며 공간을 장엄하는 당시 국제적 흐름과 맞닿는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앞으로 심층적인 분석과 함께 유물 간 연관관계를 고찰하여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왕 궁 내 불교 신앙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나한신앙은 나말여초 시기 중국 절강성 천태산에서 유입되어 고려시대 성행한 불교신앙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나한이 천태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나한재 를 통해 祈雨, 國難克服, 長壽 등 현세와 관련 깊은 소원을 빌었다. 고려시대의 나한상은 천태종이 발원한 중국 절강성 지역 나한상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자 세로, 다양한 지물과 함께 조성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동시기 중국의 나한상에선 볼 수 없는 ‘두건’을 쓴 나한도상도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도상은 승가대사상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 으로 생각된다. 이 영향에는 천태종단의 배경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천태종의 본산인 국청사에서는 북송시기 지자대사, 승가대사, 그리고 나한을 함께 모셨다는 기록이 전한다. 관음신행을 중시한 천태종단에서는 관음의 화신인 승가대사를 수용 하였으며, 나한과 관음을 동일시하였기에 세 존상을 함께 모신 것으로 보인다. 국청사를 방 문하였던 고려의 승려들은 두건을 쓴 승가대사와 지자대사를 보았을 것이다. 지자와 승가 모 두 두건을 쓴 신이한 승려이므로, 신이한 승려인 나한에게도 이 이미지가 적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본 논문은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과 영산전에 봉안된 제석천상 도상의 기원을 고찰한 것으로, 특히 조선시대 제석천이 나한전에 봉안된 기원을 간다라 ‘제석 굴 설법’ 불전 도상에서 찾고자 하였다. 제석천이 우리나라 불교미술에 등장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석굴암 주실(主 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태안사 적인선사 승탑 등에 범천과 쌍으로 표현되 었다. 고려시대에는 제석천 단독으로 등장하며 왕의 모습과 보살 도상이 융합 된 형태로 조각 및 회화로 조성되었다. 고려시대에 유행한 제석천 도상은 조선 시대에도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제석천은 상원사 문수전 제석천상처럼 왕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단독으로 제석전(帝釋殿)에 봉안되었거나 석가삼존 및 16나한과 함께 영산전 [나한전]에 모셔졌다. 이 공간은 석가여래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장 면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독존으로 안치되다가 후기에는 좌우 2위로 봉안되었다. ‘제석굴 설법’의 장소인 제석굴은 석가여래께서 법화경을 설 한 영축산 근처에 있고, 간다라의 모하메드 나리(Mohamed Nari)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대승설법 장면에도 제석굴 설법으로 해석되는 도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예를 통해 본 논문에서는 조선시대 영산전[나한전]에 제석천이 봉안된 것은, 제석천이 석가여래께 법을 청한 ‘제석굴 설법’ 불전 도상의 영향으로 추론 하였다.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 목조제석천상은 1466년에 조성되었고, 영산전 소조제 석천상은 15세기 말~16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16나한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 다. 문수전 목조제석천상은 상원사 창건과 관련된 보천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보천이 신성굴에서 수행한 에피소드 또한 석가여래가 제석천에게 설법한 장소 인 제석굴과 상통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상원사 문수전과 영산전에 봉안 된 제석천상은 간다라 ‘제석굴 설법’ 불전 도상에서 기원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신라 금관(특히 경주 출토 5점)은 신라 최고위층이 사용한 최고 품격의 모자이다. 이들은 원형 관테의 위로 세운 장식인 입식(立飾)과 아래로 드리운 장식인 수식(垂飾)이 중심이 되는 형태이고 그 표면에는 다수의 곡옥(曲玉)과 영락(瓔珞)을 매달 고 점선문・점열문・원문・삼각문・덩굴문 등의 문양들을 점으로 표현하였다. 이 중에서 입식은 나무 모양을 도안한 세 산자 모 양<山字形. 또는 출자 모양出字形>과 두 사슴뿔 모양이다. , 필자는 이 논문에서 신라 금관의 형태(나무・사슴뿔・연꽃・곡 옥・영락・수식)과 문양(삼각문・덩굴문・원문) 모두가 기(氣・기운・ 기력)와 생장(生長) 표현이라는 주장을 거듭 주장, 강조하였다. 금관의 기와 생장 표현은 생동감・생명력・힘・성장・발전 나아가 신이와 화생(化生)까지도 아우른다. 신라 금관의 기와 생장 표현을 분석하면 첫째 입식(나무와 사슴뿔) 등의 형태를 기와 생장의 대표 주자인 연꽃 모양으로 변형한 것, 둘째 금관 표면에 우리 겨레 역사문화강역 안 신석 기・청동기시대부터 기와 생장을 대표하는 삼각문・덩굴문・원문 을 표현한 것 셋째 기와 생장 표현 모두를 연꽃으로 인식하고 상호 동격・교호(交互)・호환 관계로 표현한 점이다. 신라 금관의 대표적인 모습은 ‘산(山’)자 모양 입식이다. 이는 위로 자라는 나무의 도안에 기와 생장 표현 등을 결합한 도안 인데 이를 분석하면 첫째 기와 생장이 중앙에서 외곽으로 전개 되는 모습 중 네 방향 표현(줄기와 가지이기에 네 방향이 됨), 둘째 중앙에서 외곽으로 확산되면서 동시에 아래보다 위쪽으로 향하는 생장하는 표현(금관의 좌우 가지가 갑자기 90도(度) 꺾 여 위로 솟구친 이유) 셋째 기와 생장 표현의 초기 모습인 세 갈래 표현(중앙과 그 좌측과 우측을 함께 보여 주는 첫 모양. 좌우 균형과 안정, 간결・함축을 담고, 삼재三才사상과도 관련 된다. 금관의 형태와 문양 특히 기(기운)와 생장을 동반한 표현들 은 금관 외에도 당시 우리 겨레의 역사문화유산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다. 이웃한 원(原) 중국 역사문화강역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우리 겨레의 세계적・독보적・독창적 역사문화유산인 신 라 금관・금동관의 형태와 문양 특히 기(기운)와 생장을 동반한 표현은 고대 일본에도 전파되고 영향을 끼쳤다. 주제어: 금관, 기(氣・기운氣運), 생장(生長), 연꽃, 입식(立飾), 수식(垂飾)
동서교역에 종사하며 문화전달자 역할을 하였던 소그드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주종교로 삼았다. 소그드인들이 숭배했던 나나는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여신이 아니었지만 후대에 소그드인들의 만신전에 포함되어 널리 숭배되었다. 나나여신은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탄생한 여신으로 긴 역사동안 풍요와 다산, 미의 여신이자 도시의 수호여신, 왕권의 수여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나나여신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널리 신앙되었던 인안나-이슈타르와 동일신 혹은 그 후신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본 논고에서는 별개로 발생한 여신으로 보았다. 나나의 가족관계가 인안나-이슈타르와 다른 점, 중기 바빌로니아시대 쿠두루에서 금성의 신 이슈타르와 별도의 신격으로 표현된 점, 그리고 나나의 찬가가 별도로 존재한 점 등이 그 이유이다. 소그드의 여신 나나로서 도상이 정립되기 시작한 시기는 쿠샨왕조시기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헬레니즘 문화가 중앙아시아에 이식되면서 나나는 그리스의 아르테미스, 시벨레, 레아 등의 여신들과 동일시되며 그들의 모습을 차용하여 변모하였다. 쿠샨왕조 시기의 나나도상에는 초생달관을 머리에 쓴 아르테미스형의 나나, 사자 위에 앉은 나나 등이 존재한다. 이후 소그드인이 숭배했던 나나는 쿠샨왕조의 나나와 달리 네 팔이 있으며 성벽관을 쓰고 갑옷을 갖춰 입은 채 사자에 앉은 형상으로 변화한다. 나나는 소그드인의 도시국가인 소무구성 내에서 왕국의 수호신 혹은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 같다. 특히 초라스미아나 펜지켄트 등에서 중요한 신격으로 숭배되었다. 펜지켄트에서 나나는 심판장면, 지옥장면 등과 함께 표현되어 있어 조로아스터교의 신들의 판테온에 유입되면서 내세와 관련된 정체성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네팔을 가진 나나의 형상은 6세기 이후 소그드인들이 인도의 힌두문화를 적극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개념화되고 추상화된 조로아스터교의 신들은 신상으로 제작되지 않았었는데 소그드인들은 인도의 힌두신 도상을 차용하여 새로운 신들의 모습을 창출하였다. 소그드인들은 동서교역의 주역으로 개방적이고 실리를 추구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성향은 그들의 문화 속에도 반영되어 타 지역의 문화적 자극을 적극 수용하여 자신들의 전통과 결합시켜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었다. 나나는 이러한 소그드인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경향을 보여주는 특별한 여신이다.
이 글에서는 예이츠의 후기극 『큰 시계탑의 왕』과 『삼월의 보름달』을 탄트라 도상학과 철학으로 살펴본다. 두 극에 나타나는 참수와 춤의 이미지는 칼리, 친나마스타 같은 힌두 여신의 도상과 놀라운 유사점을 보이며, 몸을 긍정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탄트라 철학은 상반의 융합의 상징으로서 성적 결합을 찬미하는 예이츠의 존재의 통합 개념과 유사하다. 탄트라는 근본적으로 신과의 합일이라는 목표를 가진 영적인 수행법으로, 탄트라 도상학에서 참수된 머리는 에고 의식의 초월을 상징한다. 참수가 역설적으로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예이츠의 두 극은 존재의 합일이라는 시인의 비전을 표현한다.
Sosaewon and Villa D’este were built in the early of 16th and mid-of 16th each. Sosaewon was built based on the accommodation of topography of the surroundings whilst Villa D’este highlights the distinction of terrace and axis existed on the configuration of the grounds and natures. Both gardens have reflected the social and political influence in that period of constructing tat the builders had been through. These factors have been analyzed by iconological methodology to interpret the inherent meaning of the garden in philosophical, mythological, religious and Feng-shui context and discovered the interconnected relations between two gardens. The characteristic of Sosaewon’s space is based on the Mu-yi-gu-gok, which is derived from a Taoist, due to a builder’s Neo-Confucianism value. Hence Sosaewon contains the adaption of the nature itself based on the values of Mu-yi-gu-gok, which are expressed by visual, auditory and literary elements, brining about the poetic beauty of waiting. The structures of Villa D’este reveal the combination of nature and art whilst it also connotes the theme of ‘The Choice of Hercules’, indicating the builder’s philosophy and will symbolically. Each space of Villa D’este has diverse space for various interpretations followed by this theme. For the interpretation of meaning of Sosaewon and Villa D’este, Sosaewon has adapted the nature of surroundings which contain a view of nature, on the other hand, Villa D’este borrowed the nature of surroundings to build and decorate the garden, using natural terrace and axis for the variation, and drag the river near the garden artificially to fit into the axis of the garden. Villa D’este contains significant mythological and iconological factor intended to highlight the builder’s dignity, status and pos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