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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지리산둘레길 주변의 딱정벌레류의 분포 및 다양성을 분석하였다. 2014년 5월부터 10월 초순 까지 조 사된 딱정벌레종수는 13과 38종이다. 가장 많이 채집된 종은 Harpalidae로 12종이며 다음으로 Carabidae가 10종으로 조사되었다. 개체수가 가장 많이 발견된 종은 Brachinidae로 1,059개체였다. 월 별 개체수는 5월이 332개체, 6월이 560개체, 7월이 501개체, 8월에는 955개체로 가장 많았으며, 9~10 월에는 736개체로 채집되었다. 고도별은 300m에서 474개체, 400m에서 975개체, 500m에서 657개체, 600m 이상에서는 978개체로 채집되었다. 사면별 분포는 남서사면에서 9과 26종 1530개체, 북동사면에 서는 11과 33종 1554개체가 채집되었다. 남서 사면 다양도 지수 2.224(0.966) 균재도 0.683 우점도 0.156이며 북동 사면 다양도 지수 2.079(0.903) 균재도 0.595 우점도 0.240이었다. 남서 사면에서 월 별 다양도 지수는 6월 2.141(0.930), 균재도 6월 0.791 우점도 는 8월 0.324로 가장 높다 북동 사면에 서 월별 다양도 지수는 5월 2.098(0.911), 균재도 5월 0.818 우점도 는 7월 0.451로 가장 높았다. 숲가 꾸기 지역에서 400m, 600m이상 지역의 대조구가 각각 368, 342개체로 많이 채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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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987.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지리산지역(智異山地域)에 분포(分布)하는 개미의 종류(種類)와 수직분포(垂直分布)를 1984년(年)부터 3개년간(個年間) 15회(回)에 걸쳐 42개소(個所)에서 채집조사(採集調査)한 결과(結果)는 다음과 같다. 1. 지리산지역(智異山地域)에 분포(分布)하는 개미의 종류(種類)는 3아과(亞科) 16속(屬) 31종(種)이었다. 2. 우세종(優勢種)은 곰개미(Formica japonica), 레만개미(Formica lemani), 고동털개미(Lasius niger), 누운털개미(Lasius alienus), 극동혹개미(Pheidole fervida) 및 빗개미(Myrmica ruginodis) 등 6종(種)이고, 희소종(稀少種)은 긴호리가슴개미(Leptothurax congruus), 혹개미(Pheidole nodus), 일본장다리개미(Aphaenogaster japonira), 에메리개미(Vollenhovia emeryi), 제주왕개미(Camponotus tokioensis), 가시개미(Polyrhachis lamellidens), 만주잘록개미(Plagiolepsis mandjurica), 북방뿔개미(Myrmica yessensis) 및 홈개미(Myrmica sulcinodis) 등 9종(種)으로 나타났다. 3. 아과별(亞科別) 종구성(種構成)은 불개미아과(亞科)(Formicinae) 16종(種), 두마디개미아과(亞科)(Myrmicinae) 13종(種), 침개미아과(亞科)(Ponerinae) 2종(種)으로 구성(構成)되어 있었다. 4. 침개미류(類)는 저지대(低地帶)에서 1,800m까지, 두마디개미류(類)와 불개미류(類)는 저지대(低地帶)에서 1,915m까지 분포(分布)하고 있었다. 천왕봉(天王峰)에는 빗개미(Myrmica ruginodis), 굽은자루뿔개미(Myrmica sp.), 북방뿔개미(Myrmica yessensis), 홈개미(Myrmica sulcinodis), 북방호리가슴개미(Leptothorax acevorum), 곰개미(Formica japonic), 레만개미(Formica lemani), 및 일본왕개미(Camponotus japonicus) 등 8종(種)만 분포(分布)하고 있었다. 한국홍가슴개미(Camponotus trox)의 수직적분포범위(垂直的分布範圍)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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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8.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Step의 높이는 하상재료 입경의 크기와 거의 같은 상관관계가 있으며, 하도경사에 따라 증가하고, 하도 폭과 step 파장은 거의 같은 크기로서 하도경사가 증가하면 step 파장은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하도 폭과 step 폭은 뚜렷한 상관관계가 있으며, 하도 폭의 증가에 따라 step 폭도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또한, step 파장은 하도 폭에 의하여 규모가 정해지고, step 높이는 step을 형성하는 암석의 크기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step-pool의 종단면의 하상구조는 하도경사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Pool의 규모는 하도 폭, 입경 및 하도경사와 상관성이 큰 것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하천의 step-pool 구조 특성은 다양한 인자들의 영향을 받지만 대표적으로 입경, 하도 폭 및 하도경사로서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4.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지리산유람록에 나타난 지리산지 주민생활사의 자료 가치에 주목하여 역사지리적인 재구성을 시도한 것이다. 지리산유람록은 지리산지 주민의 생활사에 대한 풍부한 1차적 자료를 시계열적으로 제공한다. 지리산유람록이 여타 유산록과 다른 특징은 이 점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 연구는 지리산유람록에 수록된 주민들의 생활사를 정리하여 재구성함으로써, 지리산유람록에 어떤 내용적 특색이 있는지를 드러낸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지리산유람록에 나타난 주민생활사는 환경과 생태, 취락과 주거, 토지이용과 농경, 생업과 산물, 시장과 유통, 신앙 풍속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리산유람록에서는 지리산지의 기후 조건이 주민들의 거주와 생활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실을 적었다. 겨울철 산지 기후는 산간 주민들의 주거와 이동 패턴도 규정했다. 지형 및 토양 조건에 관해서는 수질, 토양, 비옥도 등이 경작 조건을 관련해 언급됐고, 관련하여 토지생산성, 장수요인, 사회적 피난지대 등이 표현됐다. 삼림식생의 수직 분포와 경관에 대한 표현도 있었고, 천연림과 인공림을 포함한 수종들 및 장소 정보가 많이 나타났다. 지리산유람록에서 읍취락의 주거생활사는 하동의 입지지형과 가구 수, 주민생활사에 대한 약간의 정보가 언급되었다. 마을의 경우에는, 지리산권 산촌의 형성 및 사회적 변동과 관련한 자연적·사회적 배경, 변동의 역사적 계기, 인구의 유입과 유출, 지리산권 주거지역 평가 등의 언급이 다수 있었다. 마을의 자연적·지형적 입지유형, 마을경관, 마을 형태와 규모 등에 대한 표현들도 나타났다. 지리산유람록에서는 주민들의 토지 이용과 농지 개간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나왔다. 고도대에 따른 토지이용, 화전 개간 및 일제강점기의 사회적 축소, 벼농사와 관련한 관개 기술 및 모내기 등의 내용이 있었고, 주요 농업지역에 대한 표현도 나타났다. 주민들의 생업과 산물로서 임산물 채취, 농작물 및 닥나무 재배, 기타 공산품 제조와 관에 바치는 공물 등이 있었다. 화개장터의 장날 풍경도 생생하게 묘사되었고, 매매 품목, 물산의 규모와 유통 범위 등이 기록됐다. 지리산유람록에는 지리산의 여러 민간신앙소와 풍속이 기록되었는데, 이를 통해 조선후기까지 지리산지의 민간신앙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앙소의 지리적 위치 및 모습, 신당의 관리 및 운영주체 사실 등도 기록되었고, 특히 천왕봉에 있었던 성모사의 시계열적 변화 모습도 파악할 수 있었다.
        5.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지리산과 한라산의 명산문화를 이루는 요소를, 산천제, 명산·진산, 삼신산, 여신설화, 풍수문화와 백두산래맥설의 주제를 들어 역사지리적으로 비교하여 특색과 정체성을 도출한 것이다. 지리산은 신라 때부터 남악으로서 국가적 제의 대상이었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다. 반면에 한라산 제의는 17세기 후반에 본격화되고 18세기 초에나 祀典에 등재되어, 지리산에 비해 시기도 늦었을 뿐더러 格도 고을 제의로서 낮았다. 지리산은 조선초·중기에 도(전라·경상)의 명산이자 고을(구례)의 진산으로 지정된 바 있었다. 상대적으로 한라산은 줄곧 고을의 명산이자 진산이었다. 한라산은 제주목의 진산에서부터 주변 고을의 진산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에게 지리산과 한라산은 공히 동국의 명산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조선후기에 와서 한라산이 나라의 명산으로 격상된 것은 국가·사회적으로 고양된 영토·영역 의식, 중앙정부의 통치지배력 강화, 그리고 삼신산으로의 위상 변화 등과 관련이 있다. 삼신산으로서 지리산과 한라산도 시기와 대상에서 차이가 났다. 방장산은 조선초기부터 거의 단일하게 지리산으로 지칭되었으나, 영주산은 조선초기에는 변산으로 지칭되다가 17세기 초반 무렵부터 한라산으로 굳어졌다. 한라산이 삼신산의 하나로 알려지면서 명산으로서 위상은 크게 제고되었다. 지리산의 성모천왕과 노구, 한라산의 설문대할망은 모성의 상징이미지를 지니지만, 각각 어머니신과 할머니신으로 상징적 의미에 차이가 났다. 이는 지리산과 한라산에 대한 지형경관 및 생활터전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지리산권역에서 풍수의 영향력은 깊고 컸지만, 한라산권역에서는 조선중기까지 미약하였다. 지리산권역의 마을에는 풍수형국론이 문화생태적인 영향을 크게 미쳤지만, 한라산권역에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조선후기에 지리산과 한라산의 白頭山來脈說은 조선후기적 명산문화의 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6.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의 목적은 각 계층의 사람들이 지리산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이용해왔 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지리산은 영․호남의 여러 고을에 걸쳐 너르게 퍼져 있고 매우 靈驗하다고 알 려져 있었다. 신라 때부터 국가에서 중요시해왔던 지리산은 조선왕조의 유교적 산천제 정비에 따라 산신의 封爵이 제거되고, 전라도 남원에 神祠를 세워서 제 사지내게 되었다. 지리산 산신신앙에는 불교․도교 등 여러 신앙이 복합되어 있 었다. 지리산에는 聖母祠 이외에 여러 신당들이 세워졌고, 봄과 가을마다 삼남지역 의 무당과 일반 민중에 의한 기도가 성행하였다. 또 지리산은 골이 깊고 여러 가지 작물들이 풍성하여, 생계가 어려운 사람, 도망자들이 이곳을 찾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불교 억압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주변에는 많은 사찰이 새롭게 들 어섰다. 이런 사찰 중에는 지리산 신을 위한 신당을 세운 곳이 많았다. 불교계 에서는 聖母天王이나 이외의 상징물에 대해서도 불교와 관련시켜서 지리산에 서의 불교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儒者들은 지리산 신에 대한 별도의 敬拜는 필요치 않다고 여기고 있었고, 무 당이나 불교계의 지리산 제례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리산을 찾은 것은 경치를 즐기고 문학적 호기를 기르거나, 속세에서 찌들렸던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일반 민중과 무당, 불교계, 유자층들이 지리산을 인식하고 이용하는 입장은 서로 달랐다. 지리산을 둘러싸고 계층간의 갈등이 폭발하는 경우도 없 지 않았다. 게다가 지리산의 승려․무당이나 골짜기 깊숙한 곳에 사는 민간인에 게는 일찍부터 관의 침탈이 가해져서, 이들의 불만이 고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7.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지리산의 역사적 성격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名山文化로서 智異山의 正體性을 조선 초・중기의 문헌사료를 통해서 구명한 것이다. 먼저 명산은 인간 이 인위적으로 창출하고 결정한 의미에 의해서 규정・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므 로 명산은 고정되는 경우보다 변화를 겪는 존재로서 사회적 생산물의 성격을 갖고 있어 문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명산문화는 명산이 의미하는 바의 정체성까지 수렴하는 보다 광의의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초기 지리산은 太祖 李成桂에게 조선 건국과 관련해서 중요한 신성의 장 소이자 그들의 정치적 목적의 정당화를 위한 含意를 지닌 곳이었다. 한편 지리 산의 神聖은 卿·大夫·士・庶人이 숭배 대상으로 하였던 山神으로서 信仰性을 갖 고 있었다. 반면에 왕을 비롯한 위정자에게 지리산의 신성은 명산대천으로서 신성에 정치적 성격을 포함한 이중적 함의를 지녔다. 세종 같은 경우 전통문화 로서 명산대천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惑信하는 신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 하여 금지하였다. 이처럼 鮮初 지리산의 정체성은 신성에서 신앙성・정치성 등 다양한 함의를 지녔다. 조선 중기 지리산은 지리산권역의 사림들과 수령들에게 仙遊・修養의 공간, 그리고 勳戚政治 개혁을 위한 모색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럴 때 馬 崇祖가 지리산 天皇을 숭배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지리산이 신앙으로서 神聖性을 크게 잃어갔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리산의 정 체성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정치・사회적 함의가 커져갔다. 한편 賊徒 張永己 사 건에서 지리산이 인간의 삶 속으로 급속히 편입되는 사회성을 읽을 수 있다. 이 보다 더 사회성과 정치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자칭 의병대장 宋儒眞 사건이다. 16세기 말 지리산은 王朝를 부정하였던 송유진을 따르는 한 무리의 활동 공간 이었다. 이는 그만큼 지리산의 정체성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