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애도시는 당대(唐代)와는 다른 방향으로 애도 주제가 활용된다. 오대십국을 통일한 건국 초 기존 질서의 재배치라는 명목 아래 상당히 제한적인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애도 대상의 축소, 절제된 감정 표출, 친분 중심의 교류, 특정 인물 중심 의 애도 등을 들 수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이를 절제, 교제, 흠모의 세 층위로 나누 어 애도 주제의 활용 양상과 그 변천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북송의 애도 주제 활용 양상을 살피는 작업은 북송 애도시 고유의 특징을 도출하는 것은 물론 이를 기 반으로 애도 주제가 관습의 영역을 넘어 ‘변화’의 전진 과정에 놓여있음을 증명하려 는 데 있다. 이는 추후 예정된 남송 애도시와의 비교 연구 및 고대 중국의 애도시사 (哀悼詩史)를 구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중국의 장의예술은 보수성을 띄며 전례를 중시하기에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민족성과 지 역성이 아닌 시대와 사회 변화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북송 말엽 화북지역에 집중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한 벽화고분은 전례 없는 특이점들을 보이게 되는데 이 와 같은 변화의 원인으로 벽화고분의 주요 주문자인 묘주층의 사회적 신분 변화가 지적된 바 있다. 송대 이후 성장한 부유한 중간계급은 기존의 상류계급 전유의 고급문화를 선호하여 벽 화고분 축조를 주도했지만, 형식상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벽화의 구성과 양식을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는 등 자기화하였다. 북송대 이후의 신흥 묘주층은 벽화고분의 형식을 바꾸어 놓았 을 뿐 아니라 벽화고분이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이용되는 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이 점에 있 어 북송대 벽화고분은 새로운 사회적 가치가 형성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이 해되고 받아들여졌는가를 살펴볼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본 연구는 북송대 벽화고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이는 벽화 속 <宴飮圖>를 집중 분석하여 이 시대의 벽화고분이 오대 이후 급변한 사회를 반영하는 방식을 살펴보고자 했다. 본 논문 이 주목하는 <연음도>는 묘주부부가 한가로이 연회를 즐기는 장면으로 단순히 벽화를 구성 하는 하나의 도상일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묘주의 정체를 명확히 하고 그들의 내세생활을 대변하는 벽화의 중심 주제로서 기능하였다. 따라서 그 세부 표현에 있어서는 묘주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가 강조되며 사자의 특권으로서 현실에서 보기 힘든 신비로운 광경들이 연회의 장면으로 연출되곤 하였다. 그러나 북송대 고분벽화에서의 <연음도>는 묘주의 표현으로부터 전반적인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이전시대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차이는 ‘세속성’ 의 강화로 요약되며 이는 묘주인 중간계급이 벽화고분 축조와 사용에 투영한 그들만의 바람 을 반영한다. 본 연구는 북송대 고분벽화 속 <연음도>에서 세속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 현되는가를 분석하고, 그것이 벽화고분이 오랜 전통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근본적인 요소로서 작용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도솔천(兜率天)에 머무르며 법문을 설하는 미륵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날 미래의 부처로서 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신앙되어 왔다. 이에 미륵 신앙은 사후 미륵보살의 주처인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상생 신앙과 미래세에 출현할 미륵불의 설법 을 듣고자 하는 하생 신앙으로 크게 나누어 보기도 한다. 중국 산서성(山西省) 고평(高平) 개화사(開化寺) <미륵상생경변상도(彌勒上生經變相圖)>는 북송대(960~1127)에 그려진 사찰 벽화로 오랜 기간 잘못된 명칭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작품의 주제가 명확해지 면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미륵상생경변에 관한 선행 연구에서는 다수의 작품이 현존하는 서하와 천산 위구르의 사례를 통해 당대(618~907) 이후 불교가 쇠퇴한 중원(中原) 과 달리 이 지역에서 미륵 신앙이 성행한 것으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최근 <미륵상생경변>으 로 재규명된 본 벽화와 더불어 다양한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북송에서도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고, 왕실과 사찰 그리고 민간에 이르기까지 미륵 신앙이 상당히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개화사본과 유사한 도상과 화면구성을 보이는 서하와 천산 위구르 작품과 비교해 보면 본 벽화가 가장 많은 수의 장면을 보다 충실하게 도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화사본을 비롯한 모든 작품에 표현된 건축물의 구조와 세부 부재가 정교한 계화(界畫) 기법 으로 그려진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한족 문화의 중심인 중원에서 성립한 도상이 이웃 국가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당시 북송과 이웃 이민족 국가 간에 불교문화가 적극적으로 공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중국 강소성 소주 운암사 탑과 서광사 탑, 그리고 절강성 금화 만불탑 안에서 발견된 소형 금동불상의 종류와 상태, 그리고 상들이 탑 내 봉안된 의미를 탐색한 글이다. 오대~북송 초, 즉 10세기 후반~11세기 중엽에 조성된 세 탑 안에서는 탑의 제3층 탑신부 혹은 탑 아래에 조성된 석실에서 각기 6구, 9구, 그리고 60여 구의 금동불이 수습되었다. 이 시기 불탑 안에 소형 불상이 안치되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안치된 상의 성격이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본 논문은 상의 상태와 제작 시기 를 조사하여 대체로 이들은 탑보다 적게는 50년, 많게는 500여 년 앞서 제작되었으며, 광배 가 결실되거나 상의 일부가 파손된 채 안치된 것이 많음을 확인했다. 파손된 옛 불상을 탑 안에 넣은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唐宋전환기라 불리는 이 시기 두드러지게 보이는 佛事의 신경향을 주목했다. 개인적인 발원을 담은 소형 불상의 제작이 감소함과 동시에 불상이나 탑내 다양한 공양물을 넣는 불사가 크게 유행했으며, 파손되었을 뿐 아니라 제작된 지 오래되 어 발원의 의미가 희미해진 옛 불상을 매장한 관습이 그것이다. 파손된 불상을 수리하여 사 찰의 경내에 보관하거나 소형 금동불을 불전에 진열해 놓았던 唐 이전의 관습 대신 오래된 상들을 매장하는 것이 당시 중국 각지에서 유행했는데, 江浙 지역에서는 그러한 불교 교장 을 조성하는 대신 탑이라는 공간 안에 옛 금동불을 모아 넣었을 것으로 보았다.
북송초기 詞는 반세기 이상의 침체기를 맞는다. 그 원인을 분석하면 다음 몇 가지 사실에 기인했음을 할 수 있다. 첫째로 송을 건국한 통치자들은 남방 제국이 멸망한 이유를 남방의 퇴폐적 음악과 사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남방의 사를 배척했다. 북송 초기 사 작가 대부분이 남방 사람들이었음이 이를 증명한다. 또 송 이전까지 사는 남방에서 흥성한 남방문학이었다. 둘째, 송 건국초기 남방 문인들을 등용하지 않았다. 남방왕조의 문신 들을 송조에 등용되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남방 문학인 사가 북방 지역에 거점을 둔 북송시대 에 발전할 수 없었다. 셋째, 송은 초기에 남방 여러 나라와의 통일전쟁을 했다. 남방 각 지역 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전쟁은 사가 발전할 사회적 환경을 제공하지 못했다. 넷째 정책적으로 사를 금했다. 따라서 사의 발전은 송이 안정되는 북송 중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of Zen Buddhist temple’s building composition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through the analysis of literature historical material, such as Seonwon chenggyu(禪苑淸 規), Cham cheontae odaesan gi (參天台五臺山記) and so on. The building composition method of Zen Buddhist temple in Northern Song dynasty, which grasped from the Seonwon chenggyu, reflects the actual situation of the temples in that time. And it was ascertained that, the Zen Buddhist temple’s building composition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was basically same to that of Southern Song dynasty. And the comparative analysis was attempted between Zen Buddhist temples and that of other Buddhism sect described in Cham cheontae odaesan gi. From this analysis, the common features as Buddhism temple and the characteristics of building composition as Zen Buddhist temple was clarified.
This paper aims at studying on the medium of cultural interchange regarding who did and how to introduced the new trend of architecture during the period of Koryo Dynasty. Before the era of Koryo Dynasty, Kyungjang(Sutra Pitaka, 經藏) was mainly centered in Kyeongnu with a substantial function of storage. In the early Koryo Dynasty, however, Daejangjeon(大藏殿), which was spatialized for worship, began to appear. Normally, fixed walls were installed and the Sutras were enshrined inside Daejangjeon, while Jeonryunjang (revolving wheel sutras), a type of rational bookshelf, was introduced, and a new trend became developed in Kyungjang construction. Jeonryunjang(revolving wheel sutras, 轉輪藏) is a dharma instrument with a rotational function so that one revolution gives an effect of reading the enshrined Sutra one time, and began to be created actively in the period of the Northern Song. It is considered that the introduction of Jeonryunjang(revolving wheel sutras) to Daejangjeon was resulted from Haejokuksa(慧照國師) Damjin(曇眞) who visited the Kangnam areas in the Northern Song at that time. The Kangjeol areas in the Northern Song, where Damjin concentratively itinerated three times, were the place in which Jeonryunjang was created in many temples. Since Damjin, historical materials and excavated data regarding constructing Jeonryunjang have been discovered in the Buddhist temples, which are related to his pupils and dharma lineage. The only existing Jeonryunjang of Yongmusa Temple in Korea is the one that Joeung Daesunsa, who succeeded to the dharma lineage of Haesokuksa, promoted, and supports strongly such introduction of Jeonryunjang by Haesokuk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