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간에 독도의 영유권 문제는 "대일평화조약" 제2조(a)항의 해석 문제로 귀착될 수 있다. 동 조약 동 조항에 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도서로 독도가 열거되어 있지 아니하므로 일본정부는 독도는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지 아니했다고 해석하고, 한국정부는 동 조항에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적극적인 규정이 없으므로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고 상호 상반된 해석을 하고 있다. 국제재판에서 특히 영토분쟁사건의 재판에서 재판소는 Critical Date라는 일자를 선정하는 경우가 있다. Critical Date는 국제재판에서 그 일자 이후의 분쟁당사자의 행위나 사건(acts or events)은 당해 소송에서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아니하는 일자라 할 수 있다. 이는 국내재판에서 "변론 종결일"에 유사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독도의 경우 Critical Date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최초로 항의를 해온 1952년 1월 28일이 될 것인지의 여부도 문제된다. 그러나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한일간에 영유권분쟁으로 되어 국제재판소에 제소되게 되었을 경우 그 분쟁의 주제(subject of the dispute)가 대일평화조약의 해석이 문제될 경우 이 분쟁사건에서 Critical Date가 설정될 것이냐에 관해서는 Critical Date는 설정되지 아니하게 된다. 모든 영토 분쟁사건에 Critical Date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며, 특히 "조약의 해석" 분쟁사건에는 Critical Date가 설정되지 아니한다. 또한 최근의 학설과 판결도 Critical Date를 설정하지 아니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따라서 한일간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국제분쟁화 되어 국재재판소에 제소되게 되고 그것이 "대일평화조약"의 해석을 분쟁의 주제로 하게 될 때 이 분쟁사건에는 Critical Date가 설정되지 않게 된다. 1905년 2월 22일의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이후 일본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일본은 입증하기 어려울 것이 명백하므로, 특히 제2차 대전 이후 일본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한 바 없으므로 일본은 한일간의 독도영유권분쟁을 "대일평화조약"의 해석분쟁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다. 즉 일본은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분쟁에서 청구의 취지 또는 청구의 원인을 통해 분쟁의 주제(subject of the dispute)를 조약의 해석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 분쟁에서 Critical Date는 설정되지 않게 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된다.
독도의 영유권에 관한 국제법적인 판단은 그 판단의 근거가 되는 역사적 사실이 정확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만약 그 사실 자체가 왜곡・날조되어 있다면, 그에 근거한 판단이 무의미함은 자명한 것이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조약에 관하여는 사실과 다르거나 근거를 확인할 수 없는 주장이 적지 않다. 거의 전부가 일본측에 유리한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일본측 주장에 대한 비판을 통해 독도문제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 초안작성을 위한 영미협상 당시에 미국초안에 ‘독도는 일본땅’이었다 라든가, 1951년 4월 7일자 미국초안에 ‘독도는 일본땅’으로 되어 있다는 주장들은 어느 것이든 근거가 확인되지 않는 주장이다. 1951년 4월에 작성된 미국초안이라는 것은 존재 자체를 하지 않는 허구의 조약초안이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1951년 4월 하순 경, 미국과 일본간의 교섭 과정에서, 미국이 ‘독도는 한국땅’으로 되어 있는 영국초안을 일본에 제시하고 일본의 의견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사실에 대해서도 왜곡되게 해석되고 있다. 미국이 '독도는 한국땅'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주장은, 당시 에 일본과 미국이 취한 조치를 고려해보면, 일본에 아주 편향된 비상식적인 해석이다. 일본 이 독도를 한국영토로 한 영국초안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사실은, 오히려 일본이 독도는 한국영토임을 묵인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샌프란시스코조약이 확정된 1951년 8월에 미국이 독도를 일본에 주려고 하였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도 미국 입장은 독도 노코멘트, 일본 입장은 사실상의 독도 영유권 주장 포기였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조약 비준 당시 일본 정부에서 국회로 제출 되어 부속지도로 쓰인 「일본영역참고도」와, 샌프란시스코조약 발효 직후에 마이니치(每日) 신문사에서 제작한 「일본영역도」에 의해서도 증명이 된다. 어느 지도이든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만약 당시에 미국이 독도를 일본에게 주려고 했고, 독도가 일본땅이 된다고 미국이 일본에 비밀리에 알려 주었다면, 이러한 「일본영역참고도」를 일본정부에서 스스로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공신력 있는 신문사가 발간한 책자의 안 표지에 '독도를 한국땅으로 그린 지도'를 게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진위여부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일본측 자료를 무분별하게 인용하는 것도 독도 학계의 큰 문제점중의 하나이다. 국내학자들이, 일본인에게 한국인을 혐오하도록 선동하기 위해 쓴 책의 독도 부분을 인용하여서,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비준한 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독도는 일본땅'을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주장의 타당성은 차치하고라도 독도학 계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조약에 관한 전면적인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태정관지령의 관련성을 간단히 논하면 다음과 같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2조 a항은 ① 독도에 대한 미국의 제한된 정보와 ② 1905년 이전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간주된 적이 없다는 두 가지의 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① 울릉도 쟁계에서 일본이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했고, 태정관 지령이 이를 승계한 것이므로 적어도 1699년 이후 일본에 의해 독도는 한국의 영토 로 인정되어왔다. ② 아무리 양보를 해도, 적어도 1905년 일본이 독도 편입 조치를 취하기 이전에 까지 태정관지령은 계속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에 의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독도에 대한 한국의 관할권을 인정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일본에 의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독도에 대한 한국의 관할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③ 앞의 ①과 ②가 사실인 이상, 미국의 제한된 정보라는 것은 결국 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조치 이후의 정보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1905년의 일본의 독도편입을 사실로서 전제를 하고 작성된 샌프란시스 코조약 제2조 a항에 대한 해석은 변경을 요할 수밖에 없다. 즉 제2조a항에 독도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일본이 포기해야 할 섬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샌프란시스코조약 제2조 a항은 미국의 잘못된 정보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일본의 자기부정에 해당한다. 태정관 지령의 현재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1951년 9월 8일 48개 연합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대일평화조약”(the Peace Treaty with Japan)에 한국은 체약당사국이 아니나 동 조약 제21조의 규정에 의해, 동 조약 제2 조, 제4조, 제9조 그리고 제12조는 한국에 적용된다. 한국에 적용되는 제2조 (a)항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은 포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편 “조약법 협약”은 “제3자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조약은 그 제3자가 동의의 의사표시를 할 때 그 조약으로부터 권리가 발생한다라 고 규정하고, 제3자가 동의의 의사표시를 하지 아니해도 동의의 의사표시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제36조 제1항). 한국은 동의의 의사표시를 한 바 없으며 동 조의 규정에 의해 동의의 의사표시를 한 것으로 추정되어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은 한국에 대해 효력이 발생한 것으로 된다.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 전단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라고 규정하고 있다(이하 “독립승인조항”이라 한다). 이는 동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한국은 비 독립국가의 지위에 있었음을 전제로 한 것으로 그것은 비 독립상태의 법적 근거인 "한일합방조약“이 유효함을 전제로 한 것이다. (a)항 후단은 “일본은 …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바(이하 “권리포기조항”이라한다), 이는 동 조약이 발효 되기 직전까지 일본이 한국에 대한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갖고 있지 아니한 권리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의 근거인 “한일합방조약”이 유효함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 연구는 이러한 법적 효과를 지적하고, 이러한 법적 효과를 배제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이 조약의 어떠한 조항도 한일합방조약이 유효한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는 내용의 “해석선언”(interpretative declaration) 또는 “해석유보”(interpretative reservation)를 함을 요한다는 제의를 하기로 한다.
「일본영역참고도」는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의 조인(1951.9.8) 직전에 일본정부에 의해 제작(1951.8.)되어 조약조인 후 비준승인 과정에서 일본국회에 제출되었다. 「일본영역참고도」는 한일간을 가로지르는 경계선과는 별도로 독도의 동편에 반원을 그려,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하고 있는 점에서 그 이전의 「연합국최고사령부 관할지역도」 (SCAP Administrative Areas: Japan and South Korea, 1946.2.)와 같다. 일본국회에 제출된 만큼, 당시 「일본영역참고도」에 관해 논의한 내용은 일본의 국회회의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 국회 회의록 중, 조약의 비준 승인 당시 기록으로는 1951 년 10월 22일 중의원 ‘평화조약 및 일미안전보장조약 특별위원회’ 회의록이 있으며, 조약 비준 2년 후인 1953년 11월 4일 중의원 외무위원회 회의록 및 1970년 3월 24일의 참의 원 예산위원회 회의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케시마(竹島)문제연구회에서도 「일본영역참고도」의 국회제출은 부인하지 않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은 조약의 간략화 방침에 따라 개별 섬의 영유권귀속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조인되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조약 조인 후 조약비준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그린 「일본영역참고도」를 조약의 비준 승인을 위한 국회에 제출하고, 일본 국회는 조약조문과 「일본영역참고도」를 근거로 하여 조약을 승인했다. 결과적으로 조약의 비준과정에서 일본 정부와 국회는 ‘독도 한국령’을 승인한 것이 된다. 또한, 조약 발효 직후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한 또 다른 지도「일본영역도」가 마이니치(每日)신문사에 의해 제작 배포되었다. 일본 정부에서 ‘독도 한국령’을 인정했다는 것은, 조약 발효 후의 「일본영역도」에 의해서도 간접적으로 증명된다.
2008년 2월 일본 외무성은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포인트”(Pamphlet “10 Issues of Takeshima”, 이하 “다케시마 10포인트”라 한다)를 공간하여, 1950년대 초반에 시작되어 1960년대 중반에 종지된 구술서를 통한 독도영유권문제에 관한 한일정부간의 포괄적 논쟁의 재개를 제의해 왔다. 이른바 “다케시마 10포인트”는 온라인 및 오프라인의 수단에 의해 불특정다수인을 대상으로 국경을 초월하여 지구촌 모든 곳에 전파되고 있다. 일본 외무성의 의도는 주로 제3국과 그의 국민을 대상으로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국제여론을 주도하고 일본 국민에게 영토의식을 고취하려는 것으로 보여지나, 한국에 대해 중요한 것은 “다케시마 10포인트”는 한국정부에 대해 독도영유권문제의 논쟁재개의 도전장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케시마 10포인트” 제 7포인트 제4항과 제 10포인트 제3항은 이른바 “밴프리트 귀국 보고서”를 인용하여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고 기술, 주장하고 있다.
“밴프리트 귀국보고서”는 “대일평화조약”의 준비작업(travaux preparatories)이 될 수 없으므로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의 보충적 해석의 수단이 될 수 없고 후속적 관행이 될 수 없으므로 “대일평화조약”제 2조 (a)항의 해석에 있어서 문맥으로 고려될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외무성은 “다케시마 10포인트”에서 “밴프리트 귀국보고서”를 인용하여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법적 근거가 “밴프리트 귀국보고서”를 “대일평화조약”의 준비작업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한국정부의 “다케시마 10포인트”에 대한 비판에는 “밴프리트 귀국보고서”에 대한 비판이 제외되어 있다.
이 연구는 “밴프리트 귀국보고서”가 “대일평화조약”의 준비작업으로서 “대일평화조약” 제 2조 (a)항의 보충적 해석 수단이 될 수 있는가의 여부를 검토하고 또 그것의 후속적 관행으로 제 2조 (a)항의 해석에 있어서 문맥으로 고려될 수 있나를 검토해보려 시도된 것이다.
“밴프리트 귀국보고서”는 “대일평화조약”의 준비작업이 될 수 없으므로 일본 외무성이 “다케시마 10포인트” 제 7포인트 제 4항과 제 10포인트 제 3항에서 “밴프리트 귀국보고서”를 인용하여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약법상 근거가 없는 것이다. 또한 “밴프리트 귀국보고서”는 “대일평화조약”의 후속적 관행으로 볼 수 없으므로 이는 조약의 해석에 있어서 문맥으로 고려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 당국은 이 점을 비판하여 “다케시마 10 포인트”에 대한 비판을 완결 해야 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선언”(Declaration of Surrender)이 있었고, 9월 2일 이를 성문화 하기 위한 “항복문서”(Instrument of Surrender)의 서명이 있었다. 그 후 1951년 9월 8일 “대일평화조약”(Peace Treaty with Japan)의 서명이 48개 연합국과 일본 간에 있었다.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은 “일본은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동 조약에 독도는 일본의 포기의 대상에서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지 아니하다. 물론 일본정부는 일본의 포기 대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아니하므로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한국정부는 독도가 일본정부의 포기 대상으로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지 아니해도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의 하나로 독도는 울릉도의 속도이므로 그의 주도인 울릉도와 함께 일본이 포기한 것이라고 해석된다고 주장한다. 이 한국정부의 주장에 대해 일본정부는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이른 바 “심흥택 보고서”를 제시하면서 이는 한국의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3차에 걸쳐(“한국정부의 견해 1”, “한국정부의 견해 2”, “한국정부의 견해 3”) 독도는 울릉도의 속도라는 근거를 “심흥택 보고서” 하나만을 제시하는 것은 일본정부의 반박을 일축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아니하다. 이에 이 연구는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근거로 “심흥택 보고서” 하나만을 제시하는 정부의 주장을 보완하고 독도는 울릉도의 속도라는 역사적인 근거를 발굴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다. 법의 적용이란 확인된 사실에 법의 정합(整合, conformance)을 뜻한다.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사실의 확인이 있은 뒤에 이 사실에 법을 정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독도는 울릉도의 속도라는 역사적인 사실 근거를 제시했고 주도의 법적 지위는 속도의 법적 지위에 확장된다는 국제법 원칙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에 규정된 울릉도에는 그의 속도인 독도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독도는 한국의 영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