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이웃 국가이자 동일한 동아시아 역 사 문화를 함께 공유하고 있으며, 최근 양국은 동아시아의 문화를 각자 자국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양국 간의 문화갈등 또한 확산되었으며, 2002년 중국의 동북공정 및 2016년 주한미군의 사 드 배치에 대한 보복으로 한한령(限韓令)이 실시되면서, 한중 역사문화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이후, 양국의 문화갈등은 최근까지도 중국의 대한 국 왜곡된 민족주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양국 국민들에게 친근한 한국의 연예계 및 전통문화 분야까지 부정하는 현상으로 발생하고 있다. 본 연구는 한류·반한류 현상, 중국식 민족주의를 정리하고, 중국의 한 국문화 부정·왜곡 사례를 정리·조명하며,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 주요목적이다. 중국의 한국문화에 대한 부정‧왜곡 현상의 원인은 중화주의의 약화 우려, 대국 패권주의 혹은 배타적인 애국주의‧민족주 의로 볼 수 있다. 이에 주요 사례를 정리하고 검토하여, 한중 양국의 정치·경제·외교 등 여러 분야에 대한 파급효과가 우려되므로, 사례별로 정리하고 원인을 알아보며, 미래 사회 양국의 지혜로운 문화적 공생을 시사해 보고자 한다.
아일랜드 독립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예이츠는 비폭력적이고 문화적인 방법을 취했다. 초기의 아르카디아와 인도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벗어나 고대 켈트족의 영웅 전설을 작품화한 장시『어쉰의 방랑』은 예이츠 문학 일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어쉰이라는 고대 켈트족 영웅 이미지를 완성하기 위해면서 예이츠는 세 가지 켈트적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첫째로, 고대 아일랜드의 영웅의 일화를 다룸으로써 민족의 단합과 고대 켈트족의 가치 부활을 시도했다. 둘째로, 아일랜드의 자연을 부각시키면서 자연과 민족성 및 종교를 연관시키고 있다. 셋째로, 고대 아일랜드의 영광을 부활시키는 수단으로 음악성을 강조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켈트족 영웅인 주인공 어쉰에게 시인 자신을 투영시켜 조국 독립을 위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고 한 것이다. 예이츠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대 켈트족 음영시인(바드)의 전통을 이어받아 용사이자 시인인 어쉰의 묘사와 예를 통해 조국을 재 건설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되살리려고 시도하고 있다.
예이츠의 문학 활동은 ‘문화 민족주의’운동을 통해 아일랜드의 독립을 추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아일랜드의 시골에서 오랫동안 구전된 켈트의 전설, 민담, 설화 및 민요에 큰 관심을 갖고 보편적인 경험으로 공유하는 신들, 요정들,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민족의 감정을 되살리려 한다. 예이츠는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아일랜드의 현실 정치와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문화와 민족정신의 회복 을 통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한편 예이츠의 신비주의 상징주의 경향의 작품성은 문학의 선동적 기능을 추구하던 강성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과 갈등하고 대립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캘트족의 황혼』의 일차적인 기획 목적은 현대의 산업적이고 물질적인 영국의 정신에 대항하여 아일랜드의 정신을 세우는 것이며 아일랜드 소작 농민의 민 담과 전통에 부합하여 올곧은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부활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또한 아일랜드를 나누고 있는 이질적인 가톨릭 계층과 프로테스탄트 계층을 문화적으로 통 합하려 한다. 그러나 예이츠가 통합을 시도할수록 종교, 계층, 종족, 언어와 같은 문제 들은 이야기 속에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재등장한다. 민족이라는 보다 매력적인 외관의 이면에는 해결할 수 없는 여러 문제들−예이츠의 민담수집에 소극적인 소작 농민들의 태도, 예이츠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을 꺼리는 소작 농민의 태도, 게일어를 모르는 예 이츠의 한계, 소작 농민과 거리를 두려는 시인의 태도 등−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캘트족의 황혼』은 민족과 문화의 통합을 이루려는 예이츠의 노력과 이를 방해하는 아일랜드의 종교, 계층, 언어가 서로 갈등하는 공간을 눈부시게 드러낸다.
Around 1900, Yeats dreamed and put into practice the national theatre that could lead the crowds into a unified nation. And the theatre he imagined was essentially an occult one in which audience’s minds flow into each other and become one Great Mind professed in the doctrines of ‘Magic’ (1901). After the performances of Synge’s In the Shadow of the Glen (1903) and Padriac Column’s The Saxon Shillin’ (1903), Arthur Griffith attacked Yeats for not serving the nationalist’s cause. The ensuing debates around “the national art versus nationalist propaganda” infuriated Yeats, throwing down his hope for the middle and lower-middle classes. The attack and riots that lasted for a week after the performances of Synge’s Playboy of the Western World (1907), and after that the Hugh Lane controversy, deepened his anger towards them. So some poems that is included in from The Green Helmet and Other Poems (1910) and Responsibilities (1914) are full of the crowds, who pull down the high aristocratic values, laying them as “one common level.” As Yeats’s hope for the crowds vanished, his early theatre project that wanted mass mobilization into a nation changed into the unpopular theatre and an audience like a secret society. He began his work with the Irish theatre by theorizing that a popular nationalist theatre would be an occult one, but by 1915 he desired a theatre as occult precisely because it was not popular. The major difference between the two was the scale on which they operated, namely the nation versus the aristocratic drawing room.
After the publication of his book, The Wanderings of Oisin and the Other Poems in 1899 Yeats was keenly interested in the non-English cultures of the British Isles. It was known as the Celtic Twilight. In 1898 he published a volume of essays called “The Celtic Twilight” containing a number of folk stories. In 1891 he founded the Irish Literary Society and worked on a three-volume edition of the poetry of Blake, which was published in 1893. Because of this involvement he pursued the study of symbolism, which is so important for his poetry. The evidence of this is to be found in his two volumes of the decade, The Rose(1893) and The Wind Among the Reeds(1899), with their many uses of the rose and other symbols. Lady Gregory encouraged Yeats’s interest in folk-lores, visiting with him the homes of her tenants and listening to their stories. She also encouraged him to work for the theatre, which led him to the founding of the Irish National Theatre Society in 1902. In this way Yeats attempted to solve the two problems that were central to him as a public poet: the general problem of symbols in literature in an age lacking a common tradition and the particular problems presented by the confusions of the Irish situation. He was impelled to find a way of putting Ireland into some mental order, so that cultural symbols of dependable significance would be at the disposal of the artist. In this context I read the two poems, “To the Rose Upon the Rood of Time” and “The Song of Wandering Aengus” as the manifestations of the Celtic, symbolic tradition of the Irish elite and the tradition of the Irish people respectively. But in the 1890s and the early 1900s, for all his identification with the Gaelic ethos, a wistful hope remained for leadership from a regenerated landlord class. The Ireland that Yeats envisaged was a nation with a distinctive cultural and spiritual identity, and he imagined a community free of sectarian differences and conflicts. That vision was not as revolutionary as some critics have supposed, and it hardly outlasted the 1890s. A century later, however, we find an unusual amount of interest in his early writings.
Ireland, under British colonial rule, had radically developed independence movement since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and had gone through confusion and turmoils. Irish conflict was caused by the racial, religious and class struggle, which divided the people into each different ideological party. Irish predicament had begun with the union with England, and in the colonial situation Ireland had to go through the transitonal stage into modernity.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middle of the 20th century Yeats's poetic career evolved and Ireland was in need of making its own subjectivity under the double difficulty caused by the colonial and transitional circumstances. Yeats's poems were written in the troubled context. When he is considered as a nationalist poet, historical context has been taken as a reflective background. But considering that Yeats's poems recontextualize history, which is the source of his poetry, his poems must be interpreted in the historical context. The nationalist movement which Yeats pursued both in poetry and politics can be identified as a cultural discourse. The ideology of Yeats's cultural nationalism represents the Irish historical context and functions as revealing Irish problems. In this essay, I try to examine Yeats's cultural nationalism as a cultural discourse with the applicaton of new historicist and cultural materialist methods which intend the recovery of historicity and the resisting function of discourse.
이 논문은 T. S. 엘리엇의 시와 에세이 분석을 통해 그의 글이 담고 있는 반민족주의적 사상을 그가 꿈꾸던 유럽의 문화적 통합과 관련하여 연구한다. 이를 통해 그의 반민족주의는 일종의 확장된 민족주의이며, 그의 이러한 범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원초적인 관점과 도구적 관점에 기반하였음을 밝힌다. 엘리엇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유럽 국가들 간의 전쟁을 강하게 반대했고, 유럽은 평화를 위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민족주의를 반대한 이유는 민족주의가 유럽의 문화 통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민족주의 자체의 논리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따라서 유럽 문화 통일을 주장하는 엘리엇의 반민족주의가 민족주의의 기반 위에 세워졌다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의 반민족주의는 민족주의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민족 구성원의 “의지”와 민족국가의 형성과 유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통”에 관한 개념을 민족주의와 공유하고 있다. 이는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라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남북통일을 생각함과 동시에 세계 평화를 위해 각 국의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인류는 언제나 과거를 통해 배우기에 한국에서 엘리엇 읽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