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의 목적은 코로나 엔데믹을 맞이해서 교회 개척이 어려운 한국교회의 상황 속에 ‘멀티교회’라고 하는 선교적 교회 개척 모델을 연구하고 미래 시대에 맞는 교회 개척 방법을 제시하는데 있다. ‘멀티사 이트’와 다른 생소한 개념의 ‘멀티교회’을 이해하기 위해 공주 꿈의교회 로부터 시작해서 6개 교회가 개척되고 이 교회들의 연합체인 ‘꿈의 멀티교회’로 세워진 과정과 교회 개척 방법을 살펴보았다. 멀티교회의 개척자인 안희묵 목사의 교회 개척에 대한 목회 철학과 멀티교회의 핵심 요소를 연구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지역사회 복음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선교적 교회 개척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멀티교회 에 대한 연구가 한국교회의 교회 개척 운동에 새로운 발판이 되길 기대한다.
이 글은 3·1운동에 나타난 기독교적 정신을 규명하고, 그 정신을 한국교회에 적용하여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3·1운동이 일제로부터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지향하는 정치적 운동이 었다면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교분리라는 교리를 넘어서야 했고, 천도교라는 이웃종교와 협력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는 배타주의적 태도를 극복해야 했다. 3·1운동에 나타난 신앙유형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이 아니라 두 진영을 넘어서서 하나 되는 통전적 신앙유형이었다. 그러나 3·1운동을 실패로 규정하면서 기독교 신앙양태는 초월적 신비주의와 계몽운동으로 분열된다. 3·1운동에 나타난 기독교적 정신으로는 자주독립, 민주주의, 평화, 에큐메니칼 정신, 종교간 협력과 연대 등이 있다. 이러한 정신은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교회간 코이노니아와 남반부 교회를 강화시키는 선교, 교회내 민주화와 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하는 경제적· 사회적 민주화에 기여, 평화교육과 평화문화 배양과 평화통일에 기여,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로 양분된 교회를 통전적 신앙양태로 회복, 위의 과제들과 지구생명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간 협력과 연대를 제시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하워드 스나이더가 주장하는 교회의 모습에서 선교적 교회가 추구해야 할 요건들을 돌아보며, 선교적 관점에서 돌봄 선교를 고찰하는 것이다. 스나이더의 선교적 교회의 핵심적 주제는 경제로서의 교회, 생태로서의 교회, 지역사회를 위한 교회이다. 경제는 생태로, 생태는 지역사회로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해 확장되어간다. 이러한 선교적 교회의 신학적 근거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이며, 이를 실천하는 방안과 에너지는 돌봄 선교(Mission of Caring)에서 찾을 수 있다. 간호선교, 의료선교로 행해지고 있는 실천 속에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돌봄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간호선교, 의료선교는 전문가에 의해 일어나지만 돌봄 선교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돌봄은 선교현장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선교 속에 택한 백성을 향한 돌봄이 이루어지듯이 돌봄 선교는 확장되어져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다루는 연구이다. 흔히 감리교의 홍승하와 장로교의 이기풍을 최초의 한인 선교사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그들이 왜 최초의 선교사인가에 관한 연구는 아직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감리교에서는 1997년 이전까지 국외에 있는 교포들만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도 선교사로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1903년 하와이에 파송된 감리교의 홍승하는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맞다. 반면 장로교에서는 1907년에 파송을 받아 1908년에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을 한동안 해외 선교사로 간주 하다가 1915년 이후부터는 그를 더는 선교사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로교는 외국인을 위해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만 선교사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는 국외지역이 아니므로 이기풍을 해외 선교사로 간주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본 논문은 학교폭력의 대안으로 회복적 정의를 제시하고, 좋은교 사운동이 전개하는 회복적 생활교육을 소개하여 평화로운 학교만들기를 위한 교회의 선교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만남, 양자의 회복, 공동체(사회)와 개인의 변혁을 강조하는 열린 개념이다. 회복적 정의를 학교현장에 적용한 모델이 브렌다 모리슨의 3단계 회복적 실천 모델이다. 좋은교사운동이 전개하는 회복적 생활교육은 회복적 정의와 모리슨의 삼 단계 모델을 한국학교에 적용한 것으로 회복적 정의의 만남, 회복, 변혁을 실천하고 지향하고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한 교사들을 인터뷰한 결과 회복적 생활교육의 특징은 회복적 가치들을 지키며, 이 운동에 반대 또는 협조하지 않는 교사들을 경청하고 이해하고, 기다리며, 참여 동기가 교육현장의 문제에 대한 절박한 고민과 십자가 신앙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평화로운 학교만들기를 위한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는 회복적 정의와 회복적 생활교육을 목회자, 교사, 학부모에게 가르쳐 학교에 적용하여 이 운동이 확산되게 하는 것, 회복적 정의에 대한 성서교재 개발, 서클 기도회, 예배 개발하 기, 신학교에서 회복적 정의를 가르쳐 교회학교에 적용하기 등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서 마태오 리치까지 30여 년 간 중국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으나, 중국선교를 향한 교회의 노력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여 지속적으로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 시절, 일본 선교의 물꼬를 튼 포르투갈 국적의 예수회 선교사들과 상선이 중심이 되어 중국진출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아시아선교의 베이스캠프 가 고아에서 마카오로 옮겨올 수 있었다. 그 후 필리핀을 통해 스페인이 중국선교에 참여하였고, 예수회, 아우구스티누스회, 그리고 작은 형제 회의 선교 방식의 차이를 통해 당시 순찰사로 있던 알렉산드로 발리냐노 는 새로운 선교정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발리냐노의 지휘 하에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본격적인 중국진출이 가능 하게 되었고, 과거 남미 선교에서 주어졌던 ‘선교관할권’(Padronado) 에서 벗어나 선교의 자율성이 확보되고, ‘적응주의 선교정책’이 수립되 었다. 근대 선교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는 동시에 동· 서방 문명의 교류까지 가능하게 된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임금노동자의 30%-50%(600만-1,000만)이 비정 규직 노동자이지만 사회복지 체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실업의 공포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는 극심한 차별 속에서도 비정규직 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 아픔, 좌절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한국교회는 비정규직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이 글은 우선 비정규직에 대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정규직에 대한 다양한 정의, 비정규직의 규모에 대한 정부 통계와 민간연구소가 추정하는 규모의 차이와 이유, 비정규직이 발생하는 배경을 케인스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의 경제패러다임의 변화에서 찾고, 비정규직의 현황에 대해 제시하고자 한다.비정규직의 문제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불안정한 일자리이 다. 그리고 비정규직의 제도적 문제로는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노조에 가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다. 비정규직의 사회적 문제 로는 계층 구조의 양극화와 사회적 양극화로 인간 사회 분위기의 악화를 들 수 있다. 비정규직의 대안으로 정책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정 책으로부터 경제민주화로의 정책의 변화, 기업 중심 노동유연화 정책으 로부터 노동자 중심의 노동시장 정책으로의 전환, 정규직 중심의 사회 보장 정책으로부터 비정규직과 실업자 중심의 사회보장 정책으로 전환 해야 한다. 근로기준법이 비정규직을 포함하도록 개정하고, 법 적용을 엄격하게 해야 하며, 노동자와 그 가족을 위한 심리치유센터를 만들고, 노동자와 비정규직에 대한 시민의식이 개선되도록 학교교육과 시민교 육에 노동자와 비정규직을 포함해야 한다. 그런데 기업이 비정규직을 선호하는 것은 저성장기 자본의 축적논리의 일환으로 대자본의 핵심 산업 이외에는 거의 전부 외주화, 비정규직화 가능성이 있으므로 기업 에 대한 국가의 규제가 필수적이다. 비정규직은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과 함께 노조를 만들어 운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비정규직에 대한 선교를 위해서 깔뱅은 인간의 회복과 사회회복의 밀접한 관계, 물질적 삶과 영적 삶의 긴밀한 관계, 부자와 가난한 자사이의 영적 유대를 바탕으로 한 재화의 순환, 인간 본질로서의 안식과 그로 인한 해방적, 창조적 노동, 재화의 순환을 위한 교회의 역할과 국가의 책임,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임금 등을 제시하고 있다. 비정규직을 위한 교회의 선교과제로서 노동자에 대한 올바른 성서적 신학적 이해와 기독교교육에 적용해야 하고, 교회가 재화를 가난한 자에게로 흘러가도록 미소금융이나 협동조합 등의 활동을 전개해야 하고, 고난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기도회, 예배, 교회가 노동자의 교육 공간, 상담 공간, 치유공간이 되어 주님 안에서 안식을 통해 자기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회복하고 치유 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최저임금을 준수하고, 생활임금을 지급하며, 이웃종교인들과 시민사 회단체들과 함께 국가의 불의한 법을 개정하고 제도와 의식을 개혁하고 비정규직과 실업자를 중심에 두는 사회보장제도와 경제민주화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올해 2015년은 헨리 게어할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한국선교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서 그의 활동은 당시 다른 선교사들과 비교해 볼 때(예를 들어 언더우드의 31년 사역, 1885-1916) 비록 17년(1885-1902)이라는 짧은 기간동안에 이루어졌지만, 아펜젤러는 한국감리교회의 주춧돌을 놓았을뿐만 아니라 한국 개신교의 발전과 한국 근대화를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이 글에서 필자는 아펜젤러의 삶과 사역을 주로 다루었는데, 그의생애는 두 개의 특성으로, 그리고 그의 사역은 총 일곱 개의 특성들로설명하였다. 우선 아펜젤러는 중생을 경험한 후 감리교인이 되었고,그의 아버지는 아펜젤러가 장로교 목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감리교선교사가 되었다.
한편, 아펜젤러는 초기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 중의 한사람으로서 선교 초기 미국과 한국 정부의 조언을 수용했던 착한 사람이었다.아펜젤러는 쌀(rice) 혹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사역했다. 물론 여전히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교회를 세운 초기 설립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교육의 발전을 위해 공헌했던교육가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을 포함 대부분의 외국인들을 이끌었던 유능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중요한 점은 아펜젤러가 계몽운동가와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의 근대화,민주화, 그리고 독립을 위해 기여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아펜젤러는 영적인 회심을 경험했던 진정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당시 외국인들, 한국인들과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있었던 착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수용과 저항의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즉 그는 한국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만한 준비가 될 때까지 미국과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미국이 일본과 같은 강대국들의 한국 점령을 암묵적으로 허락하거나 고종이 근대민주국가로의 변화에 대해 거부했을 때는 미국과 한국정부에 당당히 저항하였다. 그러므로 아펜젤러의 한국선교 130주년을 기념할 때, 한국의 모든 개신교회들은 반드시 그의 열정적인 영성,따뜻한 사회성, 냉철한 분별력에 관해 반드시 재고해야만 한다.
본 논문은 간호전문인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한 서서평(徐舒平, Elisabeth J. Shepping, 1880-1934, R.N.)이 평신도 그리스도인으 로서 수행한 선교적 삶을 분석하여 서서평을 통해 구현된 선교적 그리스 도인이 한국교회의 선교적 교회 형성에 주는 함의를 논하려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선교적 교회의 신학적 근거를 간략히 서술하여 서서평 의 선교적 삶을 분석하는 틀로 삼는다. 선교적 교회는 신학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선교로 이해하고 전신자선교사화를 추구하고 성령이 주는 은사에 따라 각 신자들이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선교 즉 통전적 선교를 수행하는 교회이다. 본 논문은 독일계 미국인인 서서평에 대한 생애사적 접근을 통해 간호사로서의 소명과 개신교 복음의 만남과 신앙성장을 논하고, 간호사 평신도로서 미국의 다문화 상황에서 뉴욕의 이주민들을 위한 사회봉사 적 선교를 분석한다. 또한 서서평이 남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타문화권인 한국 광주에서 평신도로서 금정교회(현재 광주제일교회) 를 봉사하고 지역사회에서 간호선교, 교육선교, 복음전도, 사회구제 및 사회선교를 실시하였다. 또한 본 논문은 서서평 선교사가 평신도로 서 그리고 교회지도자로서 어떻게 지역사회에서 선교를 추진했는가를 분석한다. 선교적 그리스도인인 서서평이 선교적 교회 형성에 주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1) 서서평은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미국 내 다문화 상황에서 지역사회의 이민자들을 상대로 사회봉사적 선교를 수행했고, 기회가 주어져 타문화권인 조선까지 와서 평신도 전문인 선교를 실시하 였다. 2) 서서평은 타문화권인 조선의 광주금정교회에서 평신도로 등록하여 예배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역사회에서 성령이 주시는 다양 한 은사를 활용하여 다양한 봉사를 실시하였다. 3) 서서평은 전문인 선교사(교회의 지도자)로서 이일학교를 세워 평신도를 양성하고 훈련 하여 전략적으로 지역사회 선교를 수행하였다. 4) 이러한 지역사회 봉사적 선교는 지역사회가 요구한바 다양한 통전적 선교로 드러났다. 이는 개인에 대한 복음 전도와 교회개척, 교육과 치유, 구제와 헌신을 넘어 사회적 실천과 봉사로 나타났고 또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제도적 접근 선교로서 학교교육(이일학교), 부인조력회, 사회구제와 금주 운 동, 나병환자치료 운동, 공창제도 폐지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끝으로 본 논문은 한국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사항을 제안한다. 한국교회는 서서평의 지역사회 선교 개념과 활동을 하나의 준거점으로 삼아 지역사회에서 진정성 있는 선교를 수행함으로서 잃어버린 신뢰를 사회로부터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is to study the missionary reflection of social service mission in Korea church after the 1945 liberation of Korea. When reflecting social service of Korea churches according to the historical features, it could be divided as before and after the 1945 liberation of Korea. The social service before the liberation could be summed up as ‘un-structural service period’ that had been conducted to Korean people in poverty, diseases and ignorance during the beginning of mission by the missionaries. The other could be summarized as ‘structural service period’ that is recognized the ideological conflict and the suffering from the division of Korea into north and south and the Korean war and ‘holistic service period’ that tried to avoid a crisis into social service mission as Korea churches in quantitative growth were experiencing stagnation. The mission before the l945 liberation was an education and a medical service as the approaching method in Korean society. But those services were one method for evangelism because they were based on conservatism theology of early missionaries. So, there was no missio-theological reflection for the extension of God’s Kingdom that Jesus Christ proclaimed in the world. Therefore early Korean churches are ‘un-structural service period’ that emphasizes only individual's spiritual salvation in the absence of socie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ocial service of Korea church was ‘solidarity period’ that tried to find a clue of national problem solution from a rural community movement. Korean churches in the 1920s began to recognize social salvation and the world’s structural problems. The rural community movement also developed actively for about 10 years from the 1920s to the mid of 1930s, but it should be stopped due to the oppression in and out of church in the late 1930s. Even though there were many believers who died of dire persecution, many main religious associations in Korea found the way to live in sympathy with the visit of Japan’s shrine. After the 1945 liberation Koreans experienced both the joy of liberation from Japan and fratricidal war. In this period the duty of Korea churches was to save Clients in want and received financial support from the western churches because of economical poverty and impoverishment. And the April 19 pro-democracy movement in 1960 was happened due to the political corruption, but the democratization retreated because of the May 16 military coup in 1961. Industrialization and urbanization are promoted as focusing on the economic development, and UIM that helps the human rights abuses of workers origins. In this period Korean churches begin to open their eyes about the evil of social structure and illegality and corruption stemming from the huge gap forming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materialism and the negligence of humanity. So this is ‘structural service period,’ for Korean churches that are focusing on the individual’s spiritual salvation become to recognize the evil of social structure and injustice as mission work. Finally, since Korean churches after the 1970s are interested in the church’s growth and expansion, they are not into social service. The economic growth by the military regime caused trouble such as the 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environmental disruption and materialism and formed urban slums. And also Korean churches that disregard these problems are contaminated by growth-oriented theology, but they surprisingly growed with the military regime. In this period the large scale gathering and revival are lively held, and churches closely cooperate in turning the concern about human rights and democratization into individual’s spirit salvation and blessing. As a result, Korean churches after the 1990s have been put aside in the society and stagnated constantly. Now Korean churches stand in between temptation of growth and responsibility of social service. The early Korean churches created the way to mission through social service building up many hospitals and schools as a method of evangelism. Therefore, Korean churches should revive a tradition of holistic mission with both evangelism and social responsibility.
It is time to reexamine the true identity of Church and renew the Korean Church according to it. It is thus of great significance to examine the theological and biblical meanings of “the apostolicity of Church”, one of the four attributes of NiceaConstantinopolis Creed (unity, catholicity, holiness, and apostolicity) and restore the true apostolicity of the Church. For that purpose, this paper proposes to address the historical and theological ideas of the apostolicity of the Church in order to present the holistic understanding of the apostolicity under the biblical guidance on the one hand and suggest its missiological application on the other. First, the Roman Catholic Church saw the priest group centering on the Pope as the successors of the apostles while disregarding the apostles' teachings in general. As a result, they stuck to the ecclesiastical hierarchy, which, in turn, caused the inner corruption and let the pagan customs come into the Church. Second, the Protestant Church had various opinions towards the apostolicity. John Calvin did not address the “four attributes” of the Church, but mentioned the succession of the apostolicity based on Ephesians 4:11. He saw pastors and teachers as normal positions, whereas apostles, prophets, and evangelists are the positions that God calls whenever the occasions need. Charles Van Engen tried to unify the marks of the Reformed Church with the four attributes of the Nicean Creed. He said that the marks are the sign of restoring the inner identity of the Church while the NeceaConstantinopolis Creeds represent the outer look of the church. As a result, he argued, the Church should focus on mission. Charismatics and New Apostolic adherents do not see the apostolicity as a collective one, but as an individual one. This paper tries to understand the apostolicity holistically as it has appeared at the various stages of theological history and apply its concept missiologically. 1) the apostolicity of the Church lies in the true proclamation of the Words and the succession of such a ministry. 2) the apostolicity of the Church is in its dedication to evangelical mission towards all the nations and tribes (Mt 28:1920; Mk 16:15). 3) the apostolicity of the Church exists in the holistic personality representing Christ (John 20:21). 4) the apostolicity of the Church has the holistic characteristics that succeed the ministry of Christ. 5) the apostolicity of the Church includes the restoration of the apostolic abilities. This is characteristic of the ministry of Jesus Christ and the essential mandates given to the apostles and the saints (Mt 10:1, Mk 16:1518, Acts 1:8). When the Korean Church restores its apostolicity, we will see the dynamic vitality in all the pastoral fields and missionary sites.
The aim of the article is to outline the history of the mission of the minjung church from 1983
to 2005 and to identify its new missionary tasks in a changed world. At the end of the cold
war, the minjung movement in general, the minjung mission in particular, seemed to be
unnecessary any more. After the economic crisis of 1997, however, the minjung mission played
an important role for taking care of victims of the structural adjustment programs of many
corporations, and for establishing alternative communities. Its history divides into four periods:
the formation period (1983-1987), the development period (1988-1992), the transformation period
(1993-1997), and the professional period (1998-2005). Each period deals with its socio-economic,
political, cultural background and minjung mission’s main contents, characteristics, and limitation.
The history of the mission of the minjung church is interpreted by the results of the social
biographies of 26 minjung pastors. According to their social biographies, minjung pastors changed
themselves in the process of the minjung mission rather than changed the minjung. They
rediscovered the importance of the Bible and religion in relation to the social change. Also they
found negative aspects of the minjung. They regarded spirituality and life as pillars for the
forthcoming minjung mission. Some reflections on mission of the minjung church was carried out
through analysing the relationship between faith and ideology, the dilemma of
identity-involvement, positive understanding of religion, understanding of minjung, and theories of
community organization and conscientization. In a changed world, spirituality, the minjung and
life are identified as new tasks for the minjung mission.
This thesis is about John Thomas; the first missionary sent to the KEHC, the first superintendent and the first dean of Kyungsung Bible Institute. The coverage of this thesis begins from his birth in the U.K. and his ministries, how he came to Korea and his ministry in Korea from 1910-1911. In total, John Thomas spent 10 years serving in Korea, therefore assessing his ministry is somewhat out of proportion, however this thesis will focus on the background of his calling to Korea and the beginning of God’s divine works. 1. John Thomas had evident experience in the Fourfold Gospel. 2. His devotion and faith made him a clear model as Christ’s servant. 3. He was a man of prayer. 4. Through the successful ministry in the U.K. he demonstrated the blessings of God’s presence. 5. He made a network of supporters for prayer and financial aid. 6. He was a prominent Evangelical leader of his time and was selected as the main speaker at the annual OMS conference in 1911. 7. He had a call to preach the holiness element. This calling began to spread in the other denominations and missionaries also. 8. He not only loved the lost souls of Korea but also cared for the people of the world. 9. His ministry had a harmony of teaching and ministering. Through his character which was greatly influenced by the holiness element gave him authority to impress many people. 10. Although he had difficulty in learning Korean, his input and effort was vital in setting the foundations of the KEHC and the Bible Institute. 11. The early records of his ministry which influenced many denominations and other missionaries in Korea and Japan shows how influential he must have been in the later years. 12. He contributed to the printing of 10,000 copies of the New Testament, helped set up administrative procedures for KEHC and the Bible Institute and his teaching, church founding and faithful mission works show the bright future ahead.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early days of John Thomas’s mission. There are still more research to be done about his character and the latter part of his ministry. However, the fact that a man of God, such as John Thomas was called to serve as the first missionary sent to the KEHC, the first superintendent and the first dean of Kyungsung Bible Institute proves God’s purpose toward the KEHC and STU. Furthermore, through this research we need to find the elements that need to be continued and carried out in this day and age. Therefore it is inevitable the existence of holiness is revealed not only in Korea but also worldwide. This is the core value of KEHC and STU’s existence.
이 논문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교육선교를 이끌어 나간 인돈(William A. Linton)의 교육선교를 연구하고, 인돈을 중심으로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특징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인돈은 1912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1960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사망할 때까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하였던 기간(1940-1946)을 제외하고, 오랜 기간 한국의 전라·충청지역에서 줄곧 교육사역에 헌신하였다. 입국 후 선교초기에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성경과 영어교사로 시작하여 곧이어 교장이 되었고, 이후 일제 식민주의 교육정책과 제도 속에서 남장로교가 선교학교의 생존과 교육선교의 맥을 이어가기 위하여 지정학교로 인가를 추진할 때 주력학교인 전주 신흥학교로 이임하여 교장으로 일하며 지정학교 인가의 책임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며 남장로교가 자진폐교를 결정할 때, 전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선교회 모든 학교들의 폐교를 진두지휘하였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지만, 해방 이후 복귀하여 새롭게 설립되는 대전선교지부의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남장로교가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과 고등교육을 통한 한국사회의 기여를 위해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을 때, 대학설립위원장과 초대 학장으로서 대학의 설립과 교육과 운영의 책임을 감당하였다. 이로써 인돈은 중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남장로교 교육선교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발전에 기여하였다.
선교초기부터 끝까지 인돈의 교육선교에서 이어지는 강조점은 교육의 목적이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것은 불신자에게는 전도하고 신자에게는 교육해야 한다는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핵심을 반영하였다. 기독교인 자녀들을 기독교적 교육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가르쳐서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되게 하고 각자 놓인 자리에서 이웃을 돌보고 사회에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교육선교의 사명이었다. 교회지도자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남장로교와 북장로교를 비롯한 보수적인 장로교 선교회들의 교육선교의 목적이 대동소이하였지만, 북장로교가 복음전도자 양성에 보다 집중하였다면, 남장로교는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는 기독교 지도자 양성이라는 점에서 통전적, 실용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인돈 자신도 공학도였던 만큼 과학교육을 강조하고, 또한 모든 학생들에게 직업교육을 강조한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대전대학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문학과 과학과 신학의 조화와 융합, 신앙과 학문과 실용적 삶의 연결은 독특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적 교육환경을 위해, 모든 교사가 진실한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학생들의 다수가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교육의 내용과 삶이 기독교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인돈의 교육선교의 마지막까지 강조되었다. 교육선교의 목적과 정체성에 대한 신념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자진폐교를 결정하고 교육선교에서 물러난 것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 원칙은, 작지만 기독교적 정체성과 목적이 유지되는 순수한 대학을 만들고자 하였던 모습에서도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