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전통미술놀이를 통해 초등학생들의 공감능력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 서울시 소재 초등학교 5학년 학생 52명을 통제집단과 실험집단으로 나누어 사전-사후 인성공감능력(도덕적 공감, 감성적 공감, 사회적 공감)과 미적공감능력(사고개방성, 독립성, 심미성) 설문을 통해 조사하였고, 그 결과를 통계분석 프로그램 SPSS 22.0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또 포트폴리오 및 수업활동자료, 소감문, 관찰을 통하여 이 연구의 효과에 대한 질적 검증을 실시하여 최종 결론을 도출하였다. 연구 결과, 전통미술놀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은 통제집단 학생들에 비해 도덕적 공감, 감성적 공감, 사회적 공감, 사고개방성, 독립성, 심미성이 모두 유의미하게 향상되었다. 따라서 본 프로그램은 학생들의 공감능력 키우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연구는 전통미술놀이 활동이 우리 미술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의 미래교육 방향으로 제시한 인간의 정서적 소통과 공감능력 함양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데 의의가 있다.
당대는 축적된 연유기술을 바탕으로 화려한 삼채도기 문화를 꽃피운 시기였다. 당대의 연유도기는 이전의 단색 연유기술과 달리 다양한 색상의 구현이 가능했으며, 세 가지 색 이상을 혼용하기도 하여 시각적인 화려함이 극대화되었다. 소위 당삼채라는 당대의 대표적 연유도기는 7세기 중반 盛唐 이후 크게 유행하였다. 주로 부장품인 明器로 활용되었으나 출토 상황에 의하면 일상생활에서도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오늘날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당대의 연유도기는 화북 및 화남 등 여러 窯場에서 생산되었으며, 중국 내 소비와 함 께 동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로까지 널리 수출되어 활발한 소비가 이루어졌다. 본 연구에서 당대의 주력 생산품이었던 당대 연유도기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수출에 관한 그간 학계의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관련 논제들을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간 동아 시아에 비해 덜 주목되었던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의 출토 사례를 중심으로 해외 전파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몇 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먼저 여러 발굴 성과를 토대로 살펴보면, 당대 厚葬문화 덕에 初唐부터 이미 삼채 도용이 대규모로 생산되었고, 이는 황족묘나 고관대작 분묘 출토품을 통해 어렵지 않게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 편으로 섬서 서안의 中堡村이나 하남성의 張思忠夫婦墓 등의 출토 예를 통해, 無官職이거나 중상급의 평민계층 사이까지 폭넓게 향유되었음을 알 수 있어 이는 당대의 전형적 부장문 화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8세기 중엽 안녹산의 난(755~763) 이후, 화려한 당삼채의 생산이 종식되고 대 신 백유녹채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이는 성당기의 삼채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채유 도기로 성당시기 당삼채는 부장용 명기의 성격이 강했으나, 9세기 백유녹채도기는 실용기에 가깝다. 그런데 이 백유녹채도기의 제작을 촉구한 역사적 배경은 바로 8세기 후반 이후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진 서아시아, 즉 이슬람제국과의 교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9세기 폭발 적으로 증가한 이슬람과의 도자무역은 결과적으로 이슬람 시장과 영향력에 대한 당나라의 태도에 기인한 것이라 판단된다. 이는 단순히 동방의 연유 도기가 이슬람권에 수출된 것이 아니라 이슬람권의 기호를 중국 측이 수용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50년대 이래 발굴하기 시작한 당 벽화묘는 대다수가 陝西關中의 西安市郊와 부근의 禮 泉縣, 乾縣, 長安縣, 三原縣, 富平縣과 咸陽市郊에 집중 분포한다. 山西 太原, 寧夏 高原, 新疆 吐魯番 등지에서도 당묘 벽화가 출토되었다. 당대는 중국 고분벽화의 발달에서 가장 전성기에 해당하나 고분 내의 벽화의 주제나 구성은 인물화 중심으로 주로 현실세계를 반영하여 비교적 단순하며 사신을 제외하고 천상세계의 묘사는 드문 편이다. 당묘는 또한 부장용의 수가 많고 종류가 다양하며 북조 도용보다 진전된 세련된 표현과 기법을 보여준다. 한대 곽거병묘에 시 초가 보이는 陵墓 神道의 조각상들은 남북조를 거쳐 당에 이르면 대형화․정형화한다. 본 논문은 영하 고원수당묘와 염지당묘를 사례로 선택하여 소그드의 昭武九姓 가운데 하나인 史氏姓과 何氏姓의 소그드묘장을 고찰하여 두 지역의 묘장의 구조와 벽화 제재, 부장품에 나타난 특징을 통하여 해당 시기의 묘장에 드러난 문화적 변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본 연구는 동남아시아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나가 위의 붓다(Buddha on Nāga)’ 도상이 서사부조에서 아이콘으로 확립되는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나가 위의 붓다 도상은 붓다가 똬 리를 튼 뱀의 몸통 위에 앉은 채로 머리 뒤로는 뱀의 머리 7개를 광배처럼 갖고 있는 모습을 지칭한다. 이 도상은 붓다가 보드가야에서의 성도 후 선정에 들었을 때 거센 폭풍우가 몰아 치자 무찰린다(Muchalinda)라는 이름의 나가, 즉 뱀이 나타나 붓다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고 붓다의 머리 위로 자신의 머리를 펼쳐 보호하였다는 불전고사에서 유래하였다. 나가 위의 붓다는 2~3세기 무렵 남인도에서 부조로 먼저 만들어졌다. 남인도에서 만들 어진 나가 위의 붓다 부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헌의 묘사와 달리 뱀이 붓다의 몸을 감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붓다가 뱀의 몸통 위에 앉은 것으로 만들어진 점이다. 이는 조각을 만드 는 데 있어 붓다라는 존재를 명시적으로 드러낼 수 있으며 불교도들에게 시각적으로 더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나가 위의 붓다 도상은 7세기 보드가야에서 독립상으로도 만들어졌으며 전체적인 도상은 앞서 본 남인도 부조들과 동일하다. 일찍이 많은 불전고사들이 부조로 만들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이 도상이 독립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보드가야가 7세기에 이르러 성지로서 높은 명성과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순례자들을 위한 더 많은 기념물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성도와 더불어 나가 무찰린다 고사 역시 보드가야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 중 하나로 주목을 받아 독립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특히 나가 위의 붓다 도상은 인도에서 먼저 만들어졌지만 인도보다는 이웃 동남아에서 더 욱 큰 인기를 얻고 붓다의 대표적인 도상으로 자리 잡았다. 7~8세기 무렵의 드바라바티 미 술에서도 다양한 나가 위의 붓다 부조가 발견되며, 특히 10세기 이후 크메르 미술에서는 뱀의 모습이 일관된 형태로 고정되고 장엄도 더욱 정교해지기에 이른다. 이는 토지와 물을 관장하는 신인 뱀에 대한 오랜 신앙이 동남아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수호신인 뱀에 대한 토착 신앙이 불교와 습합되면서 붓다를 보호하는 뱀의 이야기가 동남아에서 특히 인기를 얻게 되어 나가 위의 붓다가 붓다를 나타내는 지배적인 도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인도의 토착신 나가는 중국에 전해지면서 용으로 번역되고, 기존의 용과 결합되면서 불교 미술에 표현이 됐다. 실제 존재하는 생명인 인도의 나가는 중국과 동북아시아에서 재현되지 않았다. 동남아에서 나가는 토착신으로서의 뱀 신앙에 더해져 다양하게 변모되었고, 힌두교 신화 속의 나가와 토착신 나가가 융합하기도 했다. 나가는 물과 관련이 깊어서 화재나 수재 (水災)를 막기 위한 비보(裨補)를 목적으로 건물에 조각됐다. 중국과 동남아의 건축물에 용 과 나가가 표현된 것은 같은 맥락에서, 같은 속성을 지닌 영험한 존재로 받아들여졌음을 의 미한다. 동남아시아의 나가와 중국의 용은 물과 관련된 속성, 인간에게 위협적인 반신(半神) 과 같은 존재, 종교와 신화의 세계에서 하급 신격(神格)으로 간주되는 공통점이 있다.
중국 산서성 오대산 불광사에는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독특한 모습의 6각 묘탑이 남아 있다. 각 구성 양식은 구체적인 시대를 비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 그 조성 배경과 사상적 의미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37년 기록 사진에 남아 있는 조사탑 이층 탑신 직령창 위에 그려진 액방(인방)과 인자 보간(인자형 두공, 인자 화반)의 모습은 남조 중기의 무덤 돌문의 아치형 문미에 표현된 인자 대공의 양식과 유사한데 이를 계승하여 회화적으로 변용된 모습이 당나라 장안의 황족과 귀족 무덤에서 확인된다. 이들과 조사탑의 것을 비교해 보면 8세기 초부터 형태가 유사하며 개원 연간의 것과는 동일한 양식이라 판단된다. 기단부와 평좌 양식도 8세기 전반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불광사 조사탑의 인자 보간 양식은 당나라 시대의 변화를 거친 것으로 결국 조사탑은 8세기 전반기에 서안, 혹은 중앙 정권의 지원 아래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를 토대로 기존의 관련 자료들을 재검토해 보면 동대전과 조사탑이 있는 사찰의 영역은 오대산과 불광사에 대한 고종과 측천무후의 정치적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으며 조사탑은 그러한 배경 속에서 해탈선사의 법손인 업장에 의해 8세기 전반 경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민법의 대원칙인 소유권절대의 원칙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문화가 복잡다단해지면서 강고한 소유권의 개념이 점점 그 자리를 다양한 권리에게 내어주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저작권법상의 동일성유 지권이 될 것이다. 소유권과 동일성유지권은 저작물의 소유권자와 저작권자가 분리되는 상황에서 상호 충돌하는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고, 이에 관한 규범적 판단이 요구된다. 이와 관련하여 대상 판결(하급심에서 관련 쟁점 판단)은 비록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동일성유지권과 소유권의 경계를 설정하여 양 권리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동일성유지권은 저작물 내용의 왜곡을 방지할 수 있는 저작권자의 권리이므로 그 왜곡이 폐기에 이르렀다면 이는 왜곡될 저작물의 내용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 동일성유지권 침해를 구성할 수 없 고, 다만 저작물의 존속에 관한 문제가 되어 소유권자의 정당한 권리행사에 해당할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학계의 입장은 미묘하게 대립하나, 대체로 대상판결의 결론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동일성유지권을 소유권절대의 원칙의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본고는 큰 틀에서 대상판결과 학계 다수의 입장에 동의하나, 특정 경우 저작물의 폐기가 동일 성유지권의 침해를 구성할 여지는 없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로, 소유권자가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는 경우 저작권자의 권리를 동일성유지권으로 보호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 현행 판례의 권리 남용금지 법리를 적용하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으나, 해당 판례법리를 직접 저작권법상의 동일성유지권으로 구성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본고는 스위스 연방저작권법의 동일성유지권 규정을 참고하여 특정 경우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만 소유권자의 처분행위가 적법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이 가능함을 검토한다. 둘째로, 소유권자가 폐기하려는 저작물이 사회문화적으로 보호가치가 있는 경우, 이를 저작권자의 동일성유지권으로 보호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 언뜻 사회문화적 보호가치를 개인의 권리인 동일성유지권으로 보 호하는 것이 어색할 수 있으나, 미국연방법 (VARA) 및 미국 최신판례 등과 비교법적으로 검토하여 그 정당성을 보인다.
나아가 본고는 대상판결에서 문제가 되었으나 중점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장소특정적 미술 (site-specific art)’이 현행 저작권법상 보호대상이 되는지를 검토한다. 우선 장소특정적 미술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대상판결이 장소특정적 미술을 인정하지 않는 근거를 분석한 뒤, 미국 연방 항소법원의 다양한 판례를 비교법적으로 검토하여 한국에서도 현행법 체계 하에서 충분히 보호 받을 수 있음을 논증한다.
199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주요 현상으로 나타난 참여적 양상에 대하여, 이론가들은 개별 작품의 특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담론을 통합적으로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문제는 다양한 작품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판별하기 위한 분석 기준이 정립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연구는 기존의 여러 이론적 접근법의 한계를 보완하고 개별 작품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한 대안적 분석의 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참여의 성격을 기준으로 작품을 제한형, 유도형, 확장형으로 구분하며, 이를 위해 로버트 모리스, 제레미 델러, 안토니 곰리 등 대표적인 참여미술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유형 구분을 통해 각 유형이 새로운 미술 생산 방식으로 발전해온 과정을 분석하고, 각 유형의 고유한 특징과 가치를 확인한다.
본 연구는 해결중심 부부미술치료가 중년기 부부의 결혼만족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대상은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중년기 부부이다. 연구기간은 2017년 2월 25일부터 2017년 4월 28일까지 주 1회 총 10회기를 실시하였다. 측정도구는 결혼만족도 척도(Marital satisfaction Scale: MSS)와 K-HTP를 사용하였다. 자료 분석은 결혼만족도 척도에 대하여 사전, 사후검사와 추후 점수 간의 차이를 비교하고 그 변화를 분석하였다. K-HTP는 사전, 사후 검사결과를 비교 분석하고 변화에 대해 평가하였다. 연구결과는 첫째, 해결중심 부부미술치료가 중년기 부부의 결혼 만족도의 전반적 결혼생활 만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해결중심 부부 미술치료가 중년기 부부의 결혼만족도의 부부관계의 만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K-HTP 사전 및 사후 검사 결과와 단계별 진행과정에서 나타난 변화들에서 부부관계와 결혼생활 만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해결중심 부부미술치료가 중년기 부부의 결혼만족도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본고는 1920년대 말-1940년대 중반 초현실주의가 일본 미술계에 소개되어 주요한 미술운동으로 전개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단체와 인물을 중심으로, 일본 초현실주의 미술의 보편성(국제성)과 특수성(민족성)을 문화번역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일본 초현실주의 미술은 초기에는 기계주의, 주지주의가 반영된 도시적 모더니즘 경향이 강했으나, 점차 “앙드레 브르통 및 그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반이성주의와 인간정신의 해방을 강조하게 된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사회 전체에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 사상이 확산된 무렵 일본 초현실주의를 이끈 지도자들은 오리지널과의 차이를 역설하면서 ‘일본 환상성의 전통’을 소환한다. 특정 전통의 재발견은 군국주의와 전체주의가 강화되어가는 전시(戰時) 체제 하에 초현실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수 있으나, 결국 전위가 시국(時局)에 동조함으로써 전위성을 상실하게 되는 모순을 낳았다.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미학의 정립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니콜라스 푸생과 샤를르 르 브룅 그리고 앙드레 펠리비앙은 공통적으로 세밀한 소묘와 명확한 양식에 의해 창출되는 이성적 미의 개념을 강조했다. 이들은 회화 작업 과정에서 소묘와 색채는 각기 다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며 두개의 표현 수단이 지닌 가치 또한 상이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소묘는 지적이며 이성적인 영역에 속하고 색채는 물질적이며 기술적 작업이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회회 작업에서 소묘와 색채 간의 우월 관계를 규정하면서 소묘 중심적인 회화 이론을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규범으로 채택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색채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670년대 프랑스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시작된 색채 논쟁은 소묘를 중시여기는 고전주의 화가 및 미술 이론가들과 색채 미학의 추종자들 간의 미학적 대립을 의미한다. 본 논문에서는 1660년대 프랑스 고전주의 미학이 정립되던 시점에서 1700년대 초 로코코 미학이 태동하던 시기 사이 프랑스 미술계에서 이루어진 루벤스 작품에 관한 해석과 평가 그리고 수용 과정을 색채 논쟁과 로제 드 필의 저술 활동을 중심으로 조망해 보고자 한다.
검여 유희강은 광복 이후 한국 서단에서 많은 영향력이 있었던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가학과 신학문 교육기관 및 중국 유학 등을 통해 서예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또한 소탈하고 겸허한 인품으로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였고, 서예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유하며 학문 세계를 추구하였다. 그는 한학자ㆍ서지학자ㆍ시인ㆍ소설가ㆍ미술평론가ㆍ화가ㆍ전각가ㆍ미술애호가 등 넓은 인맥을 통해 학문ㆍ문화ㆍ예술 등에 대한 자외공부를 넓혀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서예는 단순한 서사 기능을 넘어서 ‘문자향ㆍ서권기’를 갖추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이러한 검여의 교유에 대해 서예ㆍ한학ㆍ문학ㆍ 회화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검여의 사숙에 대해서는 첩학서예와 비학서예를 나누어 분석하였다. 그는 첩학서예를 연마하면서 비학서예를 더욱 추구하였다. 그의 작품을 보면, 유용ㆍ황정견ㆍ소식ㆍ조지겸ㆍ등석여ㆍ강유위ㆍ포세신ㆍ김정희 등을 흠모하고 사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들의 글씨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추구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개성 있는 서예 풍격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교유와 사숙이 검여 서예에 미쳤던 영향을 정리하면, 비첩병용ㆍ법고 창신ㆍ금석기ㆍ혼박웅일ㆍ필법입화ㆍ자외공부ㆍ불굴쇄신 등이다. 검여는 한국 서단에 북위서풍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고, 금석기를 추구하여 김정희의 맥을 이어 나갔으며, 좌수서의 불굴쇄신 정신으로 후학들의 사표가 되는 서예가라 하겠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 것”이라 한다면, 예술이란 자연적 ‧ 인문적 토대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이 발전하려면 당시대의 문화와 밀접해야 한다. 경험 접촉도가 빈번해야 대상을 여실히 파악하고 반영하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미술사와 문화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서예사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그 시대의 유행하는 대상과 방식이 어떠한 것을 수준 높게 발전시키는 토대가 된다. 서예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한자는 이미 우리 실생활에서 멀어져 있고, 세로쓰기 방식 또한 매우 특수한 필기방식이 되었다. 또한 한자보다는 한글이 주류 서사대상이 되고, 사유의 대상이 됨으로써 한자의 조형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약화된 실정이다. 쓰기 방식도 세로쓰기보다는 가로쓰기에 익숙해져 있고, 기록하고 전달하기 위한 문자의 기능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몫이 되었다. 서예가 이러한 문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전통과 현대, 예술과 디자인, 실용과 예술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고 새로운 형태의 서예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서예와 캘리그라피는 전통서예와 차별화 된 글자구조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다. 이 일은 매우 창의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 서예방식은 모델이 있었고, 그 기준으로부터 어떻게 수용하여 어떻게 변용하였는가 하는 일정한 방향이 정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쉬웠다. 반면 현대서예와 캘리그라피는 방향도 방법도 수준도 목표도 없이 망망대해에 표류된 상태에서, 경험과 지식과 지혜와 직관을 방법삼아 방향을 잡고 영역을 확장하며 목표에 이르러야 하는 고행일 수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서예 역시 시대에 따라 그 풍격이 변해왔다. 그런데도 변화의 시기마다 자신이 ‘정통(正統)’이라 여기고 변화를 ‘이단’이라 주장하며 거부한 부류가 있었다. 하지만 거부한 것은 소멸되고 거부당하던 것이 주류를 이루며 새 전통(傳統)으로 남았다. 서예사를 회고해보면 한나라 때 초서의 유행을 비난하였고(非草書), 왕희지 글씨의 연미함을 폄훼하였고(古質而今姸), 안진경의 글씨를 추서(醜書)라 비난하였으며, 축윤명과 문징명 등의 글씨를 문둥이 같다고 욕을 하였다. 이렇듯 서예의 역사도 순탄치 않았다. 비난을 받으며 문자 쓰기가 예술로 인식되기 시작한 이래로 왕희지에서 안진경으로, 소동파로, 등석여로 이어지면서 서예사의 뼈대를 형성해왔다. 한글의 역사도 순탄치만은 않았으며, 한글서예의 역사도 시대와 그 시대 주류계층의 수요에 따라 유행을 바꿔왔다. 오늘날의 한글서예 역시 실용과 예술사이, 고전주의와 대중화 사이에서 사뭇 긴장관계가 형성된 듯하다.
문화는 대개 주류계층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형성된다. 서예 역시 각 시대마다 주류 계층의 유행을 타고 이어져온 유행서풍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디지털 대중시대의 서예문화 또한 다시 한 번 새로운 패러다임에 직면해 있다. 이 시대의 주류 계층인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담론과 이데올로기를 생성하고, 그와 동시에 이 시대에 맞는 서예양식을 구축해 나가는 일에 촉각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잉카 쇼니바레의 《머리 없는 형상》 작업에 나타난 식민권력의 전복을 탈식민주의 이론 가 호미 바바의 ‘모방’ 개념을 통해 분석하였다. 쇼니바레는 유럽의 제국주의 침략이 극에 달한 18-19세기의 역사·문화를 패러디하고 식민지배자로 등장하는 인물의 머리를 자름으로써 권력의 불균형에 저항하고 인물에 식민사의 산물인 더치 왁스 천으로 만든 빅토리아 시대 의상을 입힘으로써 제국과 식민, 유럽과 아프리카 등의 이분법적 대립의 해체를 시도하였다. 그의 작품은 ‘거의 동일하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은’ 차이를 드러내는 피지배자의 과장된 모방을 통해 지배자의 정체성과 지배-피지배 구조를 위협한다. 또한 과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를 피식민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전 지구화 시대에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권력의 불균형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시대를 대표하는 국중(國中)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 (金弘道, 1745-1806년 이후)는 문인 수준의 지적 소양까지 겸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양반이 아니면 사회적 대우를 거의 받지 못했던 신분제 사회의 질곡은 김홍도 또한 넘기 힘든 벽이었다. 본고에서 필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형성 된 엄격한 신분제 사회라는 한계 속에서 김홍도가 느꼈을 비애와 자기 연민을 중심으로 이러한 그의 신분 의식이 어떻게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신분제적 모순에서 김홍도가 느낀 소외감과 불만을 유추해보는데 가장 중요한 작품은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이다.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림 오른쪽에 적혀있는 김홍도의 제발로 그 내용은 “생황의 [길고 짧은] 들쑥날쑥한 모습은 봉황의 날갯짓 같고 월당(月堂)에 울려 퍼지는 생황 소리는 용(龍)의 울음보다 처절하네(筠管參差排鳳翅, 月堂凄切勝龍吟)”이다. 김홍도가 느낀 신분제적 차별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은 “용의 울음(龍吟)”이다. 중인 출신의 시인이었던 이득원(李得元, 1639-1682)은 한 시에서 “용처럼 으르렁거리고(龍吼) 빈산의 귀신처럼 울부짖는 칼”로 신분제적 차별 속에서 고통받았던 자신을 비유하였다. 그런데 이 제발에서 김홍도는 용의 울음보다도 더 처절한 생황 소리를 자신의 울분과 고뇌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활용하였다. <단원도(檀園圖)>(1784년, 개인 소장)는 김홍도가 1781년에 자신의 집에서 강희언(姜熙彦, 1738-?), 정란(鄭瀾, 1725-?)과 같이 가진 모임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의 제발에서 김홍도는 이 모임을 ‘진솔회(眞率會)’로 지칭하였다. 그런데 이 진솔회는 북송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아회였던 ‘진솔회(眞率 會)’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김홍도가 자신의 모임을 사마광의 진솔회에 비유한 것은 그가 스스로에 대해 매우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홍도는 당시(唐詩), 송시(宋詩)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다수의 시의도(詩意圖)도 제작하였다. 김홍도는 문 인적 소양을 갖춘 화가로 높은 자존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김홍도는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중인으로서 그가 느낀 슬픔과 좌절감은 그의 그림 속에 녹아있다. 정조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도화서 화가였던 그의 화려한 명성 뒤에 숨어있었던 그의 신분 의식을 고려하지 않는 한 우리의 김홍도에 대한 이해는 절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의 회화는 1920년대 중반 서양화에서 전통회화로 회귀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그가 서양화에서 전통회화로 회귀하게 된 과정을 검토한 다음 전통회귀 이후 그가 남화가로 분류된 사실에 주목하여 그 배경과 의미를 규명하였다. 고희동의 회화가 전통으로 회귀한 이후 조형표현에 나타난 특징은 두 가지 즉, 서양화법의 특징을 도입하여 절충적인 특징을 드러내거나 관념산수의 전통을 이으며 필선 중심의 묘사나 단일시점이 아닌 분절적인 시점을 설정하는 특징을 보였다. 특히 1940년대에 고희동이 조선남화연맹의 창립 회원으로서 활동하며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등과 함께 남화가로 활동한 사실은 그의 전통회귀가 일본인의 동아시아회화사 인식에 바탕을 둔 남화를 그리는 화가로 분류되었음을 의미한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 Torres)는 쿠바 태생으로 미국 뉴욕에서 행위 예술과 개념 미술 작업을 주로 하는 작가이다. 그의 성적 정체성 문제로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사항들을 은유이면서도 섬세하게 작업했다. 토레스가 활동했던 1980년대 후반 -1990년대는 앞선 시대였던 1980년대 보수적인 분위기와 달리 다소 부드러운 분위기로 작가들의 주제들을 큰 틀 안에서 용인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런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작품에서 피력한다.
토레스는 프랑스 철학가 조르주 바타이유(George Bataille)의 책 ≪에로티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동성 연인의 죽음 전후로 바타이유의 이론이 작품에 적절히 적용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바타이유가 ≪에로티즘≫에서 거론한 죽음과 금기의 위반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의 작품에서 두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육체와 정신을 이중적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 생각이 지배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야 전통적으로 하위 개념을 지녔던 육체적인 부분을 정신과 동일하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토레스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러한 몸과 정신의 대비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아직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었다는 개념에서 작업한다. 그의 작품은 자신과 죽은 연인의 현존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일한 물건을 나란히 배치하것은 연인과 자신, 영혼과 육체,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등 대비되는 두 가지를 상징한다. 또한 그의 작품 중 초상화로는 독특한 형식인 <사탕 더미 Candy Spill>는 육체를 구성하는 세포들과 사탕을 동일시하여 관람자가 사탕을 가져 가는 행동이 자신의 아픔과 치료라는 상징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사탕은 관람자의 몸 속에 녹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고 이 과정에서 소멸과 부활을 상징한다. 개념적이면서 환영적인 부활을 나타내는 작품들은 관람자의 직접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미술관 제도에서 금기시 하는 행위들을 위반하여 제도에 대한 비판적 태도도 선보인다. 본 고에서는 이러한 금기와 위반적 측면을 작품을 통해 살펴보고 그 개념이 바타이유가 설명한 금기와 연관 있다고 보았다. 위반은 위반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쾌감을 선사한다. 삶에 대한 위반인 죽음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쾌락을 의미하고 바타이유 이론에서 죽음에 대한 부분과 맥락적으로 상응하고 있다. 아울러 작품 전체를 통해 암시되고 있는 일시성은 죽음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장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