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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08.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豆滿江은 白頭山에서 발원하여 중국의 동북지방, 러시아의 연해주 사이의 국경을 거쳐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한민족에게 있어 두만강은 백두산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고려시대에는 尹瓘이 九城를 쌓아 영토를 확장하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金宗瑞가 六鎭을 개척하여 강토를 굳건히 했던 곳이다. 현대사에선 만주·연변 지역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한민족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대장부의 기개를 펼치고 자긍심을 느끼게 했던 두만강이다. 그러던 두만강이 근대시기에는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노래되기까지 하였다. 현재의 우리에겐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으로 시작하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 가장 익숙하다. 두만강은 중국, 러시아와 경계를 형성하는 자연물일 뿐 아니라, 한민족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인식된다. 많은 한민족의 작가들이 두만강을 소재로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논문은 두만강이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가를 살피기 위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史書와 文集類고문헌에서 두만강에 대한 기록을 발췌하여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문인들의 두만강에 대한 인식과 文學的形象을 살폈다. 그리고 이러한 두만강의 문학적 형상이 현대의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제시하는 가를 밝혔다. 두만강은 시대에 따라 달리 인식되고, 형상화되었다. 중국과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대상에서 확대되어 한민족의 역사 현실을 상징하는 시적 공간으로 인식된다. 朝鮮時代초기에는 자랑스런 한민족의 영토를 에워싸고 흐르는 강이며, 대장부의 기개를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된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한민족이 회복해야할 영토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역사의 강으로 인식된다. 일제강점기에서는 독립항쟁으로 얼룩진 공간으로 민족의 욕된 운명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남북분단 이후의 현실에서는 한민족 통일에의 염원으로 형상화된다. 한민족에게 있어 두만강은 영원히 함께 해야할 역사 현실의 공간이요 정신적 안식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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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1989.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6,100원
        23.
        1985.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6,300원
        24.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인재 강희안의 회화에 대한 제화시를 통하여 인재의 회화에 대해 행해진 평가를 위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인재는 조선 초기 시서화 삼절로 인정이 되었는데, 서거정이나 성간의 글 그 리고 그의 친동생이 강희안의 글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와 글씨도 지금은 그리 많이 전하지 않는데, 그림도 전하는 것이 매우 적다. 현재 알려진 것은 많아야 네 폭 정도이고, 한 집안에 전해온다는 병풍을 합쳐도 십여 폭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 초기 인재와 교유하던 문 인들의 문집에 전하는 제화시에는 인재의 그림에 대한 것이 많은데, 이것을 통 해 보면 상당히 많은 그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 지만, 12폭 8폭 등 여섯 건의 병풍이 있고, 가리개에 그려진 그림, 그리고 개인 이 소장하고 있는 화축 등 적어도 78폭 이상의 많은 그림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은 묵죽도 등에서 보듯 묵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홍시, 자색 가지, 노란 오이 등이 등장하는 것을 통하여 채색의 그림도 있었으며, 스스로 사물을 보고 그린 그림 이외에 중국의 그림을 보고 모사한 것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을 소장하고 제시한 사람들은 당시 이름이 크게 알려진 저명한 인사들로 서거정, 아우 강희맹, 신숙주 등 사대부와 일암과 같은 승려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림을 평한 내용은 대략 세 가지 형태로서, 첫 번째는 그림의 내용을 자세히 묘사한 것이 있고, 두 번째는 인재의 그림을 통하여 얻은 감흥을 노래한 것이 있고, 세 번째는 인재의 그림을 통하여 사람들이 지향하는 도덕적, 윤리적 가치를 발현한 것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25.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인조반정 직후 내암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과 그에 대한 대응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정인홍의 문인들은 광해군 정권 시절 조야에서 폭넓게 활동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거 숙청되어 이후로 막연한 불안감이 정인홍 문인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들은 반정에 불복하는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대규모의 옥사가 일어난다. 이로써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 되었고, 불안 요인 또한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정인홍 문인들의 일차적인 불안 요인은 자신과 스승 정인홍과의 관련성이었다. 박건갑은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옹호하는 소를 올린 적이 있는데, 1624년 10월 옥사에 연루된 박건갑 3부자(박규·박구)의 추국 기록에는 첫머리부터 ‘정인홍의 여얼’이라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으며, 박건갑은 이에 대한 해명으로 자신들과 정인홍은 친인척 관계가 없음을 실례를 통해 증명하였다. 특별한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들에게 중형이 내려졌고, 이후 몇 차례의 옥사를 통해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은 더욱 확대되고 구체화되었다. 1631년 2월 옥사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한은 추국청에서 자신은 광해군 시절 정온·이대기 등과 의견을 함께 했음을 강조하며, 자신은 애초에 대북과 거리를 두었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이 옥사 발생 직후인 1631년 3월, 박인·허돈 등 인근 유림들이 덕천서원에서 회합한 일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정인홍이 지은 남명신도비문에 대한 처리 문제를 상의하였고 결국 폐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판단된다. 강우지역의 인물이 대거 연루되어 처형 등의 처벌을 당한 상황에 직면한 정인홍 문인들이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한 것이다. 1633년 3월에 발생한 옥사에서는 임석간에 의해 대구·고령·성주 지역 인물들이 고발되었는데, 이들은 앞선 1631년 옥사의 주동자 박희집과의 관련성을 추궁받았다. 박희집과 그의 집안은 정인홍과의 관련이 밀접한 바, 불안의 요인은 정인홍 주변 인물과의 관련성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띄게 되는 것이다. 정훤은 우연하게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정인홍 문인이었던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대북 시절 폐모에 반대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26.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조선조 문인들의 지리산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를 고찰하였다. 조 선시대 유산시는 대체로 몇 가지 투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대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리산을 삶의 터전으로 인식하여, 그 중요성을 부각시 키는 것. 둘째, 지리산에 대한 敬畏心을 담아내는 것. 셋째, 지리산에서 浩然之 氣를 기르고 발산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 넷째, 지리산을 仙界나 理想鄕의 소 재처로 보아 憧憬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 다섯째, 지리산과 연관이 있는 인물 을 연상하면서 尙友千古의 자세를 보이는 것. 여섯째, 지리산 등산을 修己, 또는 학문 연마의 비유로 삼는 것. 유산시에 나타난 이런 투식은 곧 지리산에 대한 인식의 유형을 의미하며, 이것은 오랜 기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唐詩 風의 서정적인 작품이 등장하기도 하고, 보다 현실적인 사고를 담아내기도 하 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自尊感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 시 국 변화에 따라 國運을 염려하는 마음이 삽입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문인들의 사고가 근대화 되어가는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7.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노사학파가 19세기 후반 영남 서부지역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문인 정재규의 역할을 분석한 것이다. 노사 기정진은 1840년 대부터 서학을 배척하고 의리와 도덕의 확산을 꾀하였던 산림학자로서 중앙정 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1850년대에는 영남의 노론학자들로부터 동방 도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받들어질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기정진의 일족이나 문인들도 세도정치기와 대원군 집권기에 점차 중앙정계와 향촌사회 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19세기 이래 영남 서부지역에서 당색의 대립이 약화되고 다른 당파나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주리론과 위정척사사상에 바탕을 둔 노사학파가 형성될 수 있었다. 당시 영남 서부의 노사학파는 남인 출신도 있었었지만 대체로 노론 위주의 인 물들이었으며, 새롭게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학문을 통해 가문을 일으키려 는 인물이 많았다. 이들은 향촌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지방관과 협조하여 향 약 실시나 󰡔소학󰡕 교육을 중시하였으며, 강학활동에 힘써 영남 서부 지역에 많 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정여창과 조식을 숭앙하는 기풍이 강한 이곳에서 이들을 모신 서원이나 사우의 향례에 참여하거나 강회를 자주 개최하 여 진주와 하동․산청․합천․의령 일대의 영남지역에 노사학파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넓혀 나갔다. 이러한 영남지역에서의 노사학파의 성장은 특히 정재규의 노력에 힘입은 바 가 컸다. 정재규는 기정진 사후 적극적으로 강학 활동을 전개하여 영남지역 내 에서 가장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동문이나 문인들과 자주 강회를 열어 성 리학과 예학을 강론함으로서 기정진의 주리론이 널리 보급되고 위정척사의 주 지가 훼손되지 않게 하였다. 그는 또한 기정진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답문류편(答問類 編)󰡕을 편찬하였으며, 1901년 기정진의 문집을 목판본으로 중간했을 때에도 단 성의 신안정사에서 직접 일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문집 간행 이후 기정진의 논 설인 「외필(猥筆)」이나 「납량사의(納凉私議)」등에 대해 영남지역의 노론이나 송병선, 송병순, 전우 등이 이단으로 배격하였을 때, 정재규는 동문과 문인들에 게 기정진의 학설을 변호하게 하였으며, 본인도 직접 논서를 지어 기정진의 주 리론이 결코 주희나 이이의 학설과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또한 정재규는 영남지역에서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을 일으켜 기정진의 위 정척사사상을 계승하였다. 그는 1881년 신사척사운동에 가담하고 1895년에 서부 영남의 유림들과 함께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개화에 반대하고 일제의 침략 에 항거하였다. 이어 그는 1905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민 심의 결집을 주장하고 의병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그는 자신을 따르는 문인 들과 함께 1905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충청도의 최익현과 전라도의 기우 만과 함께 각지에 포고문을 보내고, 의병을 모으기 위해 문인들을 유생들에게 파견하였다. 비록 무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의병이 제대로 모이지 않은 상태 에서 실패하였지만 의리를 중시하는 영남지역 노사학파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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