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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한국 명산문화의 정체성을 인문지리적인 관점에서 탐구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명산문화의 개념 정의, 사상적 배경 및 구성 요소, 역사적 기원과 형성 유형을 살펴보고,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명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중 심으로 유학적 명산문화의 전개와 의의 등을 주요 논제로 고찰하였다. 조선조 유학사상은 한국 명산문화의 인문적 발전을 이끌고 명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었다. 道學者들에게 있어 명산경관은 天地動靜의 이치를 體現하 고 있는 공부텍스트이자 觀物察己의 유학적 存養 장소가 되었다. 그들은 명산 의 장소이미지를 인간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名山과 名儒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표상하였다. 實學者들에 있어 명산의 산수는 可居地 생활권의 한 입지 요건이 되었고, 명산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의 노력이 뒤따르게 되어 名山誌가 저술되 었다. 白頭大幹과 관련하여 명산에 대한 인식의 提高가 이루어졌고 국토의 祖 宗이 되는 명산으로서 백두산이 주목되었다.
        102.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소눌 노상직의 학문이 영남유학의 전통 속에서 어떠한 측면을 계승하 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노상직은 이황과 조식을 함께 높이면서도, 정구의 실용주의적 노선을 더욱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 자 正脈이 이황에게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구와 허목 등을 통해 허전에게까지 그 맥이 전해진다고 보았다. 이는 근기 남인의 학문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 스 스로가 허전의 제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로 학통이 이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상직에게 있어 하나의 자부심으로 작용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고, 여타 영남 좌우도의 선비들을 폭넓게 교유하면서 사상사적 진폭 을 넓혀나가기도 했다. 노상직의 학문은 ‘수양론에 바탕한 실용학풍’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당을 건 립하고 수양론에 입각하여 강학활동을 전개하면서 저술과 출판사업을 벌였던 것은 이 같은 측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된다. 특히 근기 남인의 실 학연원을 튼실히 하면서 자암서당을 중심으로 학도들을 기르며 이들에게서 미 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점, 다양한 저술과 출판을 통해 전통문화를 정리하고 널리 보급하고자 했던 점은 모두 위기적 현실에 대한 응전력을 키우기 위한 것 이었다. 이 같은 측면에서 그의 실용학풍은 결국 구국의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고 하겠다. 소눌학은 무엇보다 江岸學的 特性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협의적 개념으로 16세기 이후 낙동강 연안의 유학사상을 의미하는 강안학은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으나 정구의 한강학이 담지하고 있는 실용주의적 경향은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강안학은 강좌지역의 퇴계학과 강우지역의 남명학을 넘나들며 새로 운 학문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는데, 그 선두에 한강학이 있고 그 마지 막에 소눌학이 있었다. 따라서 강안학은 퇴계학과 남명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 면서 또한 이를 당대의 환경 속에서 응용하려는 학문의 실용성을 충실히 담보 하고 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03.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明末淸初의 사상과 日本儒學에 대하여’라는 문제 설정은 江戶사상사 연구의 문맥 안에서 11세기 이전 일본 사회의 ‘주자학적 사유의 존재’라는 丸山眞男의 주장에 대한 비판 · 수정의 흐름 속에 자리 매김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가 일본에서 수용된 명말청초의 사상을 무익하게 주자학과 떨어진 곳에서 파악하려는 것도 橋狂過正의 폐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근년 중국 근세 사상 연구에서는 양명학은 주자학적 문제의식을 계승 ·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는 주장이 점차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 동향으로부터 이 논문에서는 中江藤樹의 사상을 ‘주자학’적 전개의 가능성 안에서 재구성해 보려 하였다. 그려고 이에 있어 藤樹의 사상에 대해 종래처럼 일부러 세세하게 시가를 구분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가 구분은 藤樹사상의 ‘ 日新’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진 『藤樹先生年諸』의 기술에 의해 도출된 것으로, 오히려 이 논문에서는 초기에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藤樹學특질의 추출을 기도하 였다. 그 특질은 藤樹의 사상에 합리성 • 질서성에 대한 합리적 신비 事象에 대한 신념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래에 이 문제는 藤樹가 주자 학에서처럼 ‘理’의 자기관철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이해되어왔지만, 이 에서는 오히려 藤樹가 ‘理’블 인간의 可知• 不可知에 미치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관철시켜왔기 때문에 표면상에서 그와 같은 모순이 나타남을 논하였다. 이와 같이 불가지의 영역을 신비적 인것으로 보류하지 않은 태도는 주자의 ‘象 數易’에 대한 태도와 공통된다. 또한 이것은 서구 17세기의 과학자들과도 유사한 점이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藤樹의 사상을 ‘주자학’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은, 藤樹사상의 해명에 기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사상사 전개의 재조명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104.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아시아가 근세사회로 진입하면, 주자학이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게 된 다. 그러나 한중얼 삼국에서 주자학에 대한 견해는 동일하지 않다. 본고는 야 점 을, 王夫之(중국), 이또진사이(일본), 정약용{한국)의 『중용』해석을 비교함으로써 그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히 고자 한다. w중용』가운데에서도 처1]1장에 나오는 천 성 도에 대한 주석을 그 분석 대상으로 한다. (1) 왕부지는 ‘천이 리이다.’라는 명제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기의 리가 된 뒤에 천야 리라는 뭇이 성립된다. 라고 하여 기를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성즉리‘를 긍정하연서도 이 라는 ‘거의 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천과 연성 은 동일한 기반을 갖는다. 이 점은 인성을 ‘연간에게 내재한 천도’라고 하는 명제 에서 확인된다. 자연의 음양 · 오행과 언간의 인의 · 오상이라는 덕목을 대응시키는 것도 같은 논리이다. 천도와 안도는 연속된다. 연성/울성, 인도/물도의 관계 에 있어, 왕부지는 철저하게 분리의 입장을 취한다. 인성=선, 물성=불선으로 규정한다. 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物道를 인간이 물을 이용하는 인도로 본다. (2) 진사이는 ‘천이 리’라는 명제를 부정하고 주자학의 ‘이선기후’적 관점을 강하 게 비판한다. 그는 천을 원기로 보고 리는 그 조리로 한정시킨다. 그리고 천 혹은 천도를 유행/주재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전자를 탈 도덕적 존재, 후자를 도덕적 존재로 본다. 전자는 인도와 구별되며, 후자는 인도가 도출되는 근거가 된다. 여기 에서 천도와 인도는 단절과 연속의 이중성을 갖는다. 진사이는 ‘성즉리’를 부정하고 기질의 레벨에서 접근하여 구체적인 정강의 선지향성을 성선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은 인간만이 갖고 있으며 사물은 탈 도덕적인 닫힌 존재이다. 그려나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인륜적인 규범을 인정함으로서 인간과 사물의 연속성이 확보된다. 천-인관계와 동일하게 인-물도 단절/연속의 이중성을 갖는다. (3) 다산은 천=리, 성=리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천을 인격적 존재로 성을 선 지향적언 기호로 규정한다. 그리고 천의 영명성을 인간이 부여받아 영명무형한 본성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함으로서 천-인은 근원적 동일성을 갖는다. 이 점은 천명이 인간의 도심에 내재하며 도심의 경고가 곧 천의 명령이라고 말한 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다산은 인간에게만 도덕성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사물은 자연성만을 갖는 닫힌 존재로 보아 인/물을 철저하게 분리시킨다. 지금까지 정리한 바와 같이, 세 명의 유학자들이 천-인, 인-물의 관계를 연속/단절로 보는 시각은 각각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지향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강한 도덕성을 지향한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왕부지가 중용의 성과 도를 인간에게 한정시킨 것은 ‘계신공구’라는 도덕적 수양을 전제로 한 것이며, 진사이가 천의 주재성 및 도의 연륜성을 강조한 것과 다산이 천의 인격성을 강조하고 성을 기호로 보며 언간에게만 도덕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이유는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한가지, 동아시아 사회가 근세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체계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이 제기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천 • 성 • 도라는 유교 본체론의 핵심 개념 틀이 리에서부터 이탈하여, 기 • 정감 • 인륜 등 보다 구체적언 레벨에서 규정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개념의 변용이 일어난다. 이것은 사회에 대한 도덕적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이론을 재구축하는 작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05.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이황과 조식의 문도들에 의하여 그 학문이 계승 발전되면서 한국적 성리 철학의 틀이 잡혀가고 있던 17세기로부터 성리학이 그 역사적 기능을 종료하던 19세기까지에 걸쳐 강우지역에 나타난 유학의 흐름과 쟁점에 대한 간략한 정리이다. 17세기 초반 강우학파는 鄭仁弘을 중심으로 정치적·학문적 극성기를 누렸으나, 정인홍이 조선성리학의 정통으로 간주된 이황을 비판하고 패륜적 정치사건에 휘말린 일을 계기로 하여 급격히 몰락하게 되었다. 그 후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기 동안 강우 유학은 그 餘震의 치유에 매달려야 했으며, 심각한 학문적 침체기를 맞게 된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동안 강우지역은 학계의 소외지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몇몇의 학자들에 의하여 간신히 명맥이 유지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퇴계학과 畿湖의 주기학이 강우를 점령하고, 당파적으로는 남인과 서인이 됨으로써 강우가 본래 가지고 있던 학문적·정치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긴 어두움이 지나고 19세기에 이르자 강우 유학은 다시 크게 떨치고 일어나는데, 그 주력은 退溪學과 호남의 蘆沙學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그 특징은 理를 중시하는 학풍이 다른 어떤 곳보다 강했다는 것이며, 이는 성리학적 신념을 고수하는 유학자들이 서세동점의 시기에 대응하는 가장 완고하면서도 근본주의적인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절의론의 신념을 강화한 강우의 유학자들은 비록 시대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국권상실의 시대에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 갈 수 있었다. 그것은 유학의 기능이 종언을 고하는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불꽃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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