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端淑은 역대 여성문인들의 시문을 수집하고 비평하여 여성시문총집을 편찬한 명말청초 의 대표적 여성문예가이다. 본 논문은 현전하는 왕단숙의 저작 名媛詩緯初編과 映然子吟 紅集을 중심으로 왕단숙의 문학사상과 그 창작경향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왕단숙은 시 창 작에 있어 學識을 기반으로 한 시의 體格을 중시하였으며 궁극적으로 典雅한 풍격을 갖춘 시 를 지향하였다. 또한 여성문학의 주요 개념인 脂粉氣에 대해 작가가 주어진 환경의 한계를 넘어서야 고금의 경계를 초월한 인간 본연의 문학을 할 수 있듯이 여성작가의 경우 脂粉氣를 벗어나고 피상적이고 습관적인 시어를 탈피하여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왕단 숙의 시가 창작에서는 명말청초 강남지역 문인간의 교류와 소통의 도구로서 시의 기능이 강 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제재의 작품을 볼 수 있으며 시인의 내면세계에 보다 집중하여 회포와 감회를 읊은 시들도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Matteo Ricci, a Jesuit missionary to the late Ming China, translated of Epictetus’ Enchiridion into Twenty-Five Sayings in Chinese for the purpose of Christian mission. His selection of the representative book in the Western stoic philosophy had specific purpose: Introducing one of religious semantic meaning in the Western Christianity, Stoic ethics and its religious similarities with Buddhist frameworks. By doing so, Ricci tried to demonstrate the Western Christianity was same in relation to ethical framework but different in regard to religious implications. He tried to find the point of contact and the point of difference at the same time by comparing Christianity’s stoic characters and China’s Buddhist ethics, which was different from traditional Confucian framework. The Chinese responses, however, show different outcomes. The Chinese intellectuals, who responded Ricci’s missiological intention, read his book with different perspectives. They showed their surprising interests in the newly translated book on the Western stoic philosophy in relation to promote and uphold their traditional Confucian values. The author claims that both missionaries and the responders of the new religious teaching tend to be confused by semantic values in the early period of cultural and religious contact. Without this awareness, both sides of cultural and religious contact would be confused in the proper understanding of the true religious meanings.
This paper inquired into the discourses on material culture in the latter half of Ming dynasty, which including Gao Lian's Eight Discourses on the Art of Living, Xiang Yuanbian's Nine Records from a Banana-shaded Window, Wen Zhenheng's Treatise on Superfluous Things, Tu Lung's Desultory Remarks on Furnishing the Abode of the Retired Scholar, Zhang Yingwen's Pure and Arcane Collecting. The discourses by Jiangnan intellectuals were compiled during the years 1590 to 1630 and dealt with their classification of and the way of seeing material world. Gao Lian and Xiang Yuanbian were rich merchants who cultivated cultural attainments necessary to be a literatus and tried to enter into elite society, Tu Lung passed Jinshi examination as a son of merchant, became an official, and succeeded to enter into elite society. On the other hand, Wen Zhenheng and Zhang Yingwen were members of elite society. Their discourses on material culture can be viewed on the one hand as rich merchant's cultural effort to try to enter into elite society, on the other hand as elite group's cultural capital on which they sought ways to differentiate themselves.
명나라는 정치적 분위기가 극도로 부패하고 공포스러웠으며 禮敎가 뿌리 깊은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에 일반사람들은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신변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으나 혹자는 양심을 속이고 태평성대인 것처럼 은폐하여 통치자들의 공덕을 칭송하였으며, 혹자는 현실에 대한 냉담한 태도로 현실을 묵과하였는데 인격은 타락하고 비열하였다. 이런 상황은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현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명나라 말기는 정치적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너그러웠고 언론도 비교적 자유로워 모두가 입을 다물고 감히 발언하지 못하던 형국이 타파되었고, 일부 지각 있고 개성 있으며 현실과 禮敎를 감히 직 언으로 규탄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李贽는 이 중 가장 두드러지는 사람으로 南宋 후기부터 최고 통치자들의 의식 형태가 되어버 린“程朱理学”과 천여년 간 줄곧 사람들의 신봉을 받아온 공맹사상을 맹렬히 공격하였으며, 권위주의와 봉건계급사회를 부정하였다. 그리고 道學家의 위선적이고 추한 모습을 가차 없이 暴露하였으며,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시비를 뒤집고, 개성해방을 강렬하게 호소하였다. 거짓 없고 순수한 동심으로 사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남에게 의탁하지 않는 독립적인 인격을 추구하였다. 그 비판문에 자주 “以子之矛、攻子之盾(그 사람의 창으로 그 사람의 방패를 뚫다)”라는 수법을 능숙히 활용하였으며 주로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으며 때론 우회적으로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고“偏激(극단적)”인 비유를 좋아하였는데 문투가 익살스러우면서도 신랄하고 예리하며 강건하였다. 품위와 우아함을 숭상하던 시대의 심미적인 풍토에 강한 충격을 주었고 그 영향 또한 아주 크다.
이 논문은 중국의 17세기 말엽의 혁신적 사상가였던 顔元의 개혁사상을 학문 론과 교육론을 위주로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안원의 사상에 대한 그 러한 논의는 이후에 전개할 남명 사상과의 본격적인 비교 논의를 위한 예비적 작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안원은 초기에 朱子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이윽고 생명을 잃을 뻔한 실존 적 체험을 겪고 난 뒤에 품은 의문을 계기로 사상적 전환을 행하게 된다. 이후 그는 주자학 체계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행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이 현실의 위기에 직면하여 실제적인 공헌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그들의 사유가 주자학적 인성론에 얽매여 있음을 깨닫고서 이를 비판하여 새로운 인간 개념을 공식화하 기에 노력하였다. 그러한 그의 인성론에 대한 논의가 지니는 실천 지향적 특성 은 이후 그의 사상이 후대에 나타나는 實學 사상의 한 선구적 존재가 되게끔 하 였다. 안원은 우주를 생명력이 가득한 공간으로 보고 인간도 본질적으로 선악을 벗 어난 주체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이렇듯 인간성을 자아실현의 진정한 도구로서 낙관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보았던 그의 관점은 이윽고 학문과 수양의 과정에서 실천적 주체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러한 실천적 주체로서의 자아는 학문과 수양의 과정을 통해서 구체화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길 은 공자의 원시유학에서 제시하는 三事와 三物, 특히 六藝의 학문을 習行하는 방법이었다. 그가 강조하는 習行의 방법론은 끊임없이 현실적 과제나 구체적 사물과 관련을 맺으면서 이루어지는 학습과 실행을 강조함으로써 주자학 체계 가 지니는 개념적이고 초월적인 성격과 뚜렷하게 대립하였다. 이렇듯 현실의 구체적인 경험세계를 중시하는 안원 사상의 특징은 格物致知 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곧 그는 이 말이 지니는 의미를 ' 실제로 그 일을 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서 그 행위의 대상이 곧 六藝라고 해 석한다. 이러한 해석의 전환을 행함으로써 그는 학문과 수양의 주체를 수동적 이고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해방시켜 현실의 경험 세계 속에서 대상 사물과의 동적인 관계를 맺는 주체적 자아로 바꾸어 놓았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안원이 학문과 수양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진정한 목 적을 轉世之人,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데 두고 있는 것은 그의 이 론의 당연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안원의 사상적 탐구는 자아 수 양의 정신적 역량을 어떻게 하면 유교적 이상에 부합하는 세계 형성을 위한 사 회정치적 힘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시종일관 향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현실 세계를 변혁하는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는 안원의 사상을 그보다 앞선 16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실천 사상이었던 남명 조식의 사상과 비교의 관 점에서 논의해 보는 것은 남명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동아시 아 유학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하나의 중요한 기초적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顔元元은 중국 명말청초의 걸출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였다. 그는 야심찬 기백으로 2천여 년 동안의 학술 권위에 도전하고, 2천 년 동안 열지 못한 입을 열였고, 2천 년 동안 대지 못한 붓을 대였다. 그는 漢學과 宋明理學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周 公• 孔子의 正學으로 되돌아갈 것을 강렬히 요구하였다. 그는 ‘復古’의 깃발을 내세워 유학의 새로운 형태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그의 사상은 한 마디로 退本開 新으로 특정지을 수 었다. 이런 사상을 근본으로 한 그의 사상척 특정을 좀더 구 체적으로 상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명말청초의 사상적 특징은 천하의 일을 자신의 임무로 하는 유학자들이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하게 전개한 점인데, 안원에게서 그런 의식이 뚜렷이 나타난다. 안원은 “성인의 책을 읽으면 세상을 바꾸는 사람야 되어야지, 세상에 따라 바뀌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적극적인 사회 개혁을 주창하였다. 이처럼 그의 사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세상을 바꾸자는 사회개혁사 상이다. 둘째, 그의 사상에는 깊은 반성과 주체적 자각이 자리하고 있다. 안원은 이론을 내세울 때는 옳고 그른 점만 따져보고 같고 다른 점은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학술적 자각이다. 또 안원은 옳은 것이라면 비록 한두 사람의 견해일지라 도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높은 학문척 주체의식이다. 이런 반성과 주체척 자각을 통해 안원은 송명이학은 물론 한학까지도 철저히 버판하였다. 셋째, 안원은 배워서 실제에 응용하는 것을 중시하여, 用을 본체로 삼고 用을 학문으로 삼았다. 그는 兵• 農• 錢· 穀 · 水· 火• 工· 盧를 體이면서 用으로 보아, 體와 用응 하나로 보았다. 그의 習行哲學은 이런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척 특징으로부터 명말청초 중국철학의 새로운 동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숭상하고 실행한 習行哲學은 外在的인 사회에서는 그 결과를 볼 수 없였고, 학문 안에서만 탐구할 수밖에 없었다.
‘明末淸初의 사상과 日本儒學에 대하여’라는 문제 설정은 江戶사상사 연구의 문맥 안에서 11세기 이전 일본 사회의 ‘주자학적 사유의 존재’라는 丸山眞男의 주장에 대한 비판 · 수정의 흐름 속에 자리 매김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가 일본에서 수용된 명말청초의 사상을 무익하게 주자학과 떨어진 곳에서 파악하려는 것도 橋狂過正의 폐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근년 중국 근세 사상 연구에서는 양명학은 주자학적 문제의식을 계승 ·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는 주장이 점차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 동향으로부터 이 논문에서는 中江藤樹의 사상을 ‘주자학’적 전개의 가능성 안에서 재구성해 보려 하였다. 그려고 이에 있어 藤樹의 사상에 대해 종래처럼 일부러 세세하게 시가를 구분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가 구분은 藤樹사상의 ‘ 日新’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진 『藤樹先生年諸』의 기술에 의해 도출된 것으로, 오히려 이 논문에서는 초기에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藤樹學특질의 추출을 기도하 였다. 그 특질은 藤樹의 사상에 합리성 • 질서성에 대한 합리적 신비 事象에 대한 신념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래에 이 문제는 藤樹가 주자 학에서처럼 ‘理’의 자기관철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이해되어왔지만, 이 에서는 오히려 藤樹가 ‘理’블 인간의 可知• 不可知에 미치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관철시켜왔기 때문에 표면상에서 그와 같은 모순이 나타남을 논하였다. 이와 같이 불가지의 영역을 신비적 인것으로 보류하지 않은 태도는 주자의 ‘象 數易’에 대한 태도와 공통된다. 또한 이것은 서구 17세기의 과학자들과도 유사한 점이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藤樹의 사상을 ‘주자학’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은, 藤樹사상의 해명에 기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사상사 전개의 재조명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