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재의문과 청규에 나타난 만두와 국수에 대한 인식변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처음에는 만두와 국수가 수륙재를 통해서 식료에서 만들어 지는 중요한 음식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중국불교와 달리 한국불교에서 만 두는 세시의례음식으로 변화되었다. 반면, 국수는 불교의례음식으로 남았지 만, 세면(洗麵)에서 세면(細麪)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습면의 형태를 취했 다고 생각되나 가는 국수로 바뀌었다. 육색장은 중국과 다른 한국불교 음식문화의 특징이다. 처음에는 6가지 음 식의 특징을 살려서 설치되었으나 점점 경계가 허물어진다. 결국 조선 말에 이르러서는 색장방이란 이름 만 남는다. 그리고 음식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 적인 명사로 쓰이게 된다. 음식의 조리법과 종류에 따라 소임이 늘어나는 경 향을 보인다. 결국 만두는 민가의 세시의례음식으로 변화되고, 국수는 불교의례 속에 남아 있게 된다. 현재 시식(施食)에서 제일 먼저 국수를 올리는 의식(儀式)을 가리킨다. 이것이 한국 불교문헌에 보이는 만두(饅頭)와 국수[洗麵]에 대한 의식(意識)변화라고 생각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백수 정완영(白水 鄭椀永, 1919~2016, 이하 백수) 의 시조 문학에 나타난 고향의식과 불교적 사유 기반의 생명존중의 의미 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데 있다. 백수는 이병기, 이은상, 김상옥, 이호우, 이영도와 함께 1960년대 대표적인 시조시인이다. 그는 말과 말의 행간에 침묵을 더 많이 심어두면 서 단아하고 잘 정제된 시상과 한국의 정한의 주제와 자유로운 율격을 담아냄으로써 현대시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백수의 문학적 사유 와 토양을 깊게 해 준 배경에는 고향상실과 민족전통을 관류하는 정한(情 恨)의 미학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시조 문학 작품에는 전통적 인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관조의 미학을 탐구하면서, 상실한 조국과 고 향의 회복, 연기적 생명 존재에 대한 사랑의 뜨거운 시혼이 잘 담지되어 있다. 결국 백수가 그토록 끊임없이 또 간절하게 고향과 불연(佛緣)을 노 래한 것은 역사관과 인생관을 매개로 한 자기정체성의 확인이라 할 수 있다.
다비의식은 전통적으로 승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컸다. 현대 한국 불교의 상장례, 즉 다비의식 또한 특정 종교의례를 떠나 전승되는 한국문 화의 죽음의례 차원에서도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끈다. 특히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큰스님들의 죽음을 대하는 사부대중들은 그/그녀의 다비의식에 직접 참관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큰스님들의 ‘전통적’ 다비 의식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아도 그 의식들마다 서로 다르게 설행되 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그야말로 전통의 전승에 있어서 무엇이, 왜, 그렇게 의례화되고 있는지를 학술적으로 탐색해 볼 만하다고 본다. 본 논고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설행되었던 다비의식의 실제 사례를 통 해서 위와 같은 문제제기가 갖는 현대적 의미를 다비의식의 문화콘텐츠 적 시각에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본고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에 주안점을 두어 논의를 진행하였다. 우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불교 다비의식의 정의와 유래, 그리고 그것의 불교철학적 의미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 의식을 한국불교의 역사적 맥 락에서 살펴보고자 조선 중 후기 이래 제작된 의문[의식문]를 검토하고 있다. 이 과정은 현대 다비의식의 원류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보았다. 본문의 3장에서는 20세기와 21세기 한국불교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성철 스님, 법정스님 그리고 최근의 고우스님의 다비의식 사례를 제시하고 이 를 문화유산과 현대의 문화콘텐츠적 시각에서 접근하여 해석해보고자 하 였다. 무엇보다 실제 다비의식의 사례를 문화콘텐츠적으로 접근할 경우, 다비의식 설행과정에 있어서 유의미한 차이가 발생되는 지점에 대한 이 해를 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전통 다비의식의 보존과 현대적 다비의식의 고민을 담아 향후 불교 다비 의식 문화콘텐츠 연구방안을 도출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도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여긴다.
본 논문은 중년의 위기에서 자아정체성의 혼란으로 갈등을 겪는 중년여성들의 문제를 불교가 지향하는 깨달음이 곧 ‘자아 성장’ 또는 ‘자아정체성의 확립’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여 불교의 지혜를 빌려 그 해법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자아정체성을 불교의 불성(佛性)과 같은 개념으로, 불성을 인간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고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고 불교상담의 시각에서 고향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염불로써 마음의 고향에 돌아갈 것을 노래하는 「염불환향곡」을 중심으로 중년여성들의 정체성 찾기를 위한 불교상담의 과정으로 구성해 보았다. 기성쾌선의 「염불환향곡」은 가향(家鄕), 실향(失鄕), 실로(失路), 문향(問鄕), 취향(趣鄕), 환향(還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에는 다시 여러 개의 항목들을 중심으로 법문이 이어진다. 선(禪)을 기반으로 화엄과 정토사상을 결합한 내용으로 시적 리듬을 가미하여 문학적 감동을 주는 독특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염불환향곡」은 중생들의 마음이 미혹에 빠져 길을 잃은 후 다시 본원의 마음을 회복하는 과정을 고향을 찾아가는 길에 비유하고 있다. 가향에서 환향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수행자가 자신의 본성인 불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자아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인 고향을 찾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귀향의 과정을 중년여성의 자아정체성을 찾는 불교상담의 과정으로 적용해 보았다. 깨달음, 해탈, 열반 등의 출세간적인 가치를 보다 더 많이 강조하는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불교상담은 정신치료와 심리치료 분야에서도 기여할 수 있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상담의 기본 역할을 생각한다면 불교상담 역시 불교의 가치를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신앙활동에 있어서 불교의식의 비중은 매우 증가하여, 건축, 불 상, 공예 등 불교미술 전반에서 의식문화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본 고에서는 불교의례의 성행이 가져온 변화를 불교회화의 측면에서 살펴보았 다. 불화와 의례공간의 관련성은 주불전 내부의 의식과 야외 의식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다. 예배 공간으로 인식되던 주불전(主佛殿)은 다양한 법회(法會)와 의례가 개 최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전각 내부에는 의식 수요에 부응하는 불화가 봉 안되었다. 불보살을 도량[道場]에 청해 공양을 권하는 권공(勸供)과 육도의 중 생을 청하여 음식을 베푸는 시식(施食) 의례는 특정 의식에 한정되지 않고 불 교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수륙재의 성행은 특히 삼단의례(三壇儀禮)라 는 형식을 통해 저변화되었다. 그 결과 주불전 안에 상단(上壇), 중단(中壇), 하단(下壇)의 삼단이 갖추어지고, 각 단을 상징하는 불화가 하나의 기본 조합 을 이루게 된다. 한편 야외 의식용 대형 불화인 괘불(掛佛)이 전국적으로 조성되는 현상은 전각 외부로까지 확장된 의식에서 불화의 쓰임과 기능 확대를 보여준다. 불 화는 의식단의 가설에 따른 수요로 혹은 전각 내부에서 외부로 의식단이 옮 겨짐으로써 이동하였다. 불화를 거는 절차의 핵심은 의식이 진행되는 곳으로 불보살의 강림(降臨)을 청하는 것이다. 불보살의 강림은 도량에 초청하고자 하는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거불(擧佛) 절차를 통해 상징되었다. 또한 거불 의 대상이 의식용 불화의 주제로 그려짐으로써 구체적으로 시각화되었다. 의 식을 위해 불화를 꺼내 이동하고, 의식을 마치면 다시 원래의 자리에 가져다 두는 일련의 절차는 불보살의 현존을‘도량으로의 강림’이라는 극적인 방식 으로 전달하였다. 이들의 강림을 찬탄하고 도량에 내려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는 절차는 의식의 신이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조선시대 불교회화는 전각에 봉안되어 불상의 뒤편에 놓여 불전이 상징하 는 불세계를 상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식의 성행이라는 신앙의 흐름에서 역동적으로 기능하였다. 전각 외부로 확장되는 의식과 의식을 전담하는 불 화로의 이행을 대표하는 것이 괘불이라면, 감로도(甘露圖)는 의식에 사용되 던 불화가 전각 내부의 불화로 고정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의식의 성행으로 의식 전용 불화가 생겨나는 동시에 특정한 의식에 사용되던 불화가 상설 불 화로 봉안되었다. 조선시대 불교회화는 의식 수요에 부응하는 과정에서 그 주제와 구성에서 다양한 변용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불화가 봉안된 공간과 그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의식 문화를 통해 조선시대 불화의 다각적인 기능 을 이해할 수 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였던 한용운은 1920년대 국내 항일운동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신간회의 해체와 일제 의 만주사변으로 인한 국내외의 정세 변화는 한용운이 대외활동을 접은 채 심우장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게 되는 외적 영향으로 작용 했다. 이 시기에 한용운은 냉철한 시국인식과 민족적 자각을 바탕으 로 불교개혁을 주장하는 글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이때의 개혁론은 1910년대『조선불교유신론』에서 주장했던 일반적인 불교근대화론과 는 달리 식민지 불교의 모순을 극복하고 조선의 사찰을 통일해야 한 다는 자주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요지는 크게‘총본산의 건 설’과‘불교의 대중화’로 정리할 수 있다. 총본산 건설은 분산된 조선 사찰의 통일과 통제기관의 설립을 뜻하 는 것으로, 사찰 주지의 임면권(任免權)을 확보해야 한다는 자주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 전제조건은 조선불교의 모든 권리를 철 저히 장악하고 있던 일제의 사찰령을 철폐하는 것이었고, 그 이론으 로서 서구 근대화의 특징인 정교분리의 원칙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정교분리에 따라 사찰령을 철폐하고 총본산을 건설하는 주체로서 불 교청년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불교 대중화는 경전의 한글 번역과 인출, 그리고 불교 잡지의 발행 사업에 의한 문서포교의 실천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찍이 한글의 중 요성을 자각하고 평소 한글로 된 교리의 전파를 강조했던 한용운은 1930년대 초반 안심사 한글 경판의 인출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에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한용운의 불교 대중화 사업은 그 스스로‘조선운동’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 었던 것처럼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불교의 대중 화 주장도 조선적 전통의 인식과 실천운동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용운의 현실 인식과 대응은 일제의 통제에서 벗어나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었고, 바로 이러한 점이 당시 불교 교단에서 그의 개혁론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How did the Korean religious culture which was consisted of three different religions- Shamanism, Buddhism, Confucianism- be combined and transformed? The author focused the mixture and transformation of the procedure of sacrificial rite and the arrangement of sacrificial food in each religion. In this thesis, the author studied first, the conception in sacrificial rite, second, the procedure of sacrificial rite, third, the items of sacrificial rite food according to each period. In consequence of the research each religion had lost its uniqueness and became mixed to each other and settled down in Korean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