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로버트 매클레이 감리교선교사가 고종으로부터 의료와 교육 분야의 개신교 선교를 허락받은 이후, 감리교와 장로교의 본격적 인 한국선교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감리교에 비교해 볼 때 장로교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본 논문은 같은 시기에 선교를 시작했음 에도 장로교의 교회성장이 감리교에 비교해 더 많이 이루어진 이유에 관해 고찰하고 있다. 우선 지금까지 언급되던 ‘감리교는 학교와 병원 중심으로, 장로교는 교회중심으로’와 같은 선교방식의 차이와 네비우 스 선교정책 수용 여부의 차이와 같은 내용이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음을 다루고 있다. 대신에 초기 한국선교를 주도했던 감리교의 아펜 젤러와 장로교 언더우드의 차이, 즉 언더우드의 세례에 관한 열정적인 입장과 그의 선교사 동원 활동을 통한 미국 남장로교와 캐나다장로교를 포함한 장로교 선교사의 증가가 결국 장로교회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본 연구는, 서초구 주민들이 2012. 8. 29.경 서초구청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사랑의 교회에 대하여 한 서울 서초구 소재 참나리길 일부 지하부분에 관한 도로점용허가처분에 대해 무효확인청구(예비적 청구취지: 취소청구)의 소를 제기함으로서 시작되어 8년여에 걸친 소송이 진행된 후, 최근 대법원의 상고기각 판결에 의해 위 도로점용허가처분 취소 판결이 확정된 사건을 다루었으나, 위 도로점용허가처분 취소 판결에 대한 타당성 여부에 대한 검토나 평석이 아니라 처분청인 서초구청이 위 취소 판결의 기속력에 따라 조치를 취해야 하는 이 사건 도로에 대한 원상회복명령 등 그 후속절차에 관한 것이다. 위 취소 판결로 인한 후속절차로는 원상회복명령, 이행강제금 부과, 행정대집행, 부관인 허가조건의 유효성, 건축허가(일부)취소, 손실보상 등이 문제 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원상회복명령과 행정대집행의 가능 여부로서, 전자와 관련해서는 원상회복의 방법, 원상회복 명령 및 그 이행 가능여부, 원상회복의무 면제시 교회의 대상 시설물 사용 가능여부 등이, 후자와 관련해서는 대집행 요건 중 대체적 작위의무인지 여부, 집행대상의 특정 가능여부, 의무 불이행 방치가 심히 공익을 해하는지 여부 등이 각 주요 쟁점 이 된다. 본 연구로 인하여 취소판결로 인한 후속절차로 어떤 것이 문제가 되는지 파악이 되고, 원상회복명령과 행정대집행의 기준이 다소나마 명확해짐으로 인하여 행정처분의 상대방에게 법적안정성이 부여될 수 있기를 바라고, 위 도로점용허가처분 취소판결 확정으로 인한 대상 교회의 후속절차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기대한다.
이 논문은 대한장로교회 신경의 변천과정과 장로교회 각 교단의 헌법에 수록되어 있는 현황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서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인식을 연구한 것이다. 1907년에 제정된 대한장로교회 신경은 192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경, 1934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로 이름이 변경되고, 1934년 수정과정에서 문구의 수정 및 단어의 추가나 삭제 등의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다. 해방 후 장로교회 각 교단은 대부분 1934년의 조선 예수교장로회 신조를 저본으로 해서 현대철자법에 맞게 수정한 후 헌법에 수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예장 고신 교단은 2011년 개정, 공포된 헌법에서 대한장로교회 신경을 삭제했으며, 예장 통합 교단은 1971년 헌법 개정 과정에서 서언을 축소하고, 승인식을 삭제했으며, 제12조의 내용 중 불신자가 최후 심판 때에 형벌을 받는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현재 대한장로교회 신경은 역사적인 기원과 개정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헌법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설명을 첨부하여 이해를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제정한 후에는 그것을 보편적으로 사용 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일제의 추방으로 폐쇄되었던 전주 스테이션은 1947년에 복구되어 활동을 시작했는데, 1948년에는 9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다. 이들 가운데 인돈, 위인사, 조요셉 등은 노회원으로 교회들의 목회활동을 도왔지만, 주로 교육분야와 의료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인돈 부부는 신흥과 기전의 교장으로, 윈과 폰테인은 한예정신학교를 위해 사역하였고, 구바울 부부와 변마지는 예수병원에서 사역하였다.
해방 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었던 전주 시내 5개 교회들이 문을 다시 열면서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하여 1952년에는 12개로 늘어났다. 1952년부터 기장과 예장으로 총회가 분열하면서 노회도 분열하였고, 1959년에 다시 예장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였다. 이 과정에서 1960년에 기장 전북 노회는 16개의 교회로, 통합 전북노회는 1962년에 자립 9개와 미자립 6개로 늘어났고, 합동은 1960년에 7개로 출발하였다.
인톤 선교사가 1946년 7월 귀국한 후에 신흥과 기전 학교의 복교가 추진되어 11월에 문을 열었고 1950년에 중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강흥모에 의해 1955년에 영생중학교와 영생고등학교를 인가받았고 1963년에 영생여자중학교를 인가받았다. 그 결과 1960년대에 전주에서 기독교학교가 중학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30%이고, 고등학교에서는 30-40%를 차지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은 강흥모가 세운 영생대학교와 전주공업전문학교가 오늘 날 전주대학교와 전주비전대학으로, 여자성경학교였던 한예정성경학교가 1968년에 한일여자신학교로, 예수병원의 간호기술학교는 1973년에 간호전문학교로, 기전여자고등학교에서 1974년에 기전전문학교로 발전하였다.
전주예수병원은 1948년 45병상으로 출발하여 1960년에는 160개 병상의 종합병원이자 지방거점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구바울, 설대위, 켈리, 필립 등의 다양한 분야의 의사들이 진료를 하였고, 전문수련의 병원으로서의 역할을 통해 1960년대에는 외과, 이비인후과, 안과, 신경외과 등과 함께 암전문치료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전주는 미션 스테이션의 복구와 전주 장로교회들의 협력을 통해 교육과 의료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어 최근에도 27.6%의 높은 복음화율을 가진 도시가 되었고 많은 기독교 관광장원을 활용하여 기독교를 지역의 특성으로 활용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 논문은 1930년 이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개혁신학이 아니라 복음주의신학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 논문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세 가지로 핵심요소로 규정한다. 그것은 성서, 회심체험, 영적인 생활의 변화이다. 1930년 이전으로 시대를 한정한 이유는 1930년 이후 신학이 분화되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선교초기부터 예배공동체, 성경번역, 순회전도를 함께 했는데, 이런 연합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복음주의신학이라는 공유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성서를 통한 사경회를 기초로, 기도를 통한 체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은혜 받은 자의 새로운 생활을 통한 도덕성이라는 복음주의신학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런 성서, 회심체험, 영적인 생활의 변화는 한국교회신학을 복음주의 전통으로 견고하게 뿌리 내리게 한다.
1907년 한국장로교회는 4개 선교부가 하나의 장로교 치리회인 독노회를 조직한다. 이때 채택한 대한장로교회신경은 장로교회와 감리교의 연합정신과 복음주의신학의 산물임을 통해서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개혁신학이 아니라 복음주의신학임을 다시 한 번 규명하게 된다.
한국장로교회 신학이 개혁신학이라면 신학교와 학계에서 칼뱅에 대한 교과과정이나 연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과과정과 칼뱅연구를 보면 교과과정은 성경중심이며, 칼뱅연구사에서 1930년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깊은 연구는 없음을 알 수 있다. 한국장로교회의 복음주의 영성은 개인구원과 체험을 강조한다. 즉 부흥적 특성으로 인간의 감정을 강조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그렇지 않다. 복음주의는 개인구원, 개인윤리, 사회관심으로 자연스럽게 발전되어간다.
이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동사목사의 기원과 제도적 확립 및 확장과정, 폐지에 이르는 역사적인 과정을 연구한 것이다.
동사목사라는 직제는 미국장로교회의 영향으로 190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회 노회에서 8명의 한국인 목사를 선교사와 함께 일하는 동사목사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이 직제는 제도적 확립과 확장 과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확대 시행되어 1914년 제3회 총회에서 목사를 위임목사, 임시목사, 위임동사목사, 임시동사목사로 구분했으며, 1917년 제6회 총회에서는 목사를 칭호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하고, 1929년 제18회 총회에서 헌법 중 정치 제4장 4조에 목사칭호 조항을 추가함으로서 동사목사의 제도적 확립을 완결했다. 목회 현장에서는 선교사와 한국인 동사목사 뿐만 아니라 1920년대를 전후해서는 한국인 위임목사와 한국인 동사목사가 함께 목회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후에는 한국인 위임목사와 위임동사목사, 한국인 위임목사와 임시동사목사가 목회하는 형태로 세분화 되었다.
동사목사 직제는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공동목회를 통한 협동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와 같은 직제가 해방 이후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지속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영락교회에서 한경직과 강신명이 위임목사와 동사목사로 공동목회를 한 경우다.
그러나 동사목사 직제는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에서 부목사 직제를 신설하면서 폐지되었다. 이런 결정은 동사목사 직제의 역사적 공헌을 간과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동사목사의 폐지와 부목사의 신설은 공동목회를 통한 협동적 지도력 대신에 위임목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 글은 한국 장로교 여성 가운데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최덕지 (1901-1956)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무너진 한국교회를 회복 하기 위해 해방 직후에 전개한 교회재건 운동을 살펴보고, 그의 교회론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의 교회론에 대한 교회사가들의 평가는 지금까지 대체로 매우 부정적 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극단적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들의 평가는 최덕 지의 재건운동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교회론에 대한 깊은 신학적 해석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본고는 이런 연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하나의 시도 이다. 최덕지의 교회론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 그의 교회재건 운동을 해방 직후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위치시키고 ‘도나투스파 교회론’을 해석학 적 도구로 사용하여 그의 설교를 분석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최덕지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재건운동과 재건교회 설립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교회의 분열을 낳았고, 그의 교회 론에 도나투스주의와 매우 유사한 성격-장점과 한계 두 측면 모두에 있어 서-이 많은 것도 부인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은 교회의 거룩성 회복을 위 해서는 큰 공헌을 하였으나, 교회의 일치 유지를 위한 노력은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의 거룩성 회복이야말 로 보다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공헌이 한계보다 훨 씬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최덕지의 교회론이 지금 주님의 몸을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찢어놓고 만신창이로 만든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은 실로 무겁다. 참된 교회의 회복 을 위해서는 ‘일치를 해치지 않는 거룩성’과 ‘거룩성을 해치지 않는 일치’ 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위해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분열된 현실의 뿌리 이해와 일치의 길 모색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 이후 북한교회가 직면하게 될 해방직후와 유사한 배교자 치리 문제를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This is a study on the curriculum of church history of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from 1901 to 1935.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was established in 1901. The seminary was built for the spread of the gospel not for the research of theology. W. L. Swallen was one of the founders of the seminary and he wrote the first textbook of church history in the Korean language in 1913. The book was entitled Kyohoisaki (敎會史記) : the Book of Church History. The editorial system of the Kyohoisaki was a dictionary of history. The theological foundation of the book was evangelical.
A new text of church history of Presbyterian Seminary was published in the 1930’s. The new text’s theological foundation was evangelical, the same as Swallen’s text. But the level of study of church history was developed further. The new text included the advanced objectivity of historical description, methodology of history and the system of editing. The Presbyterian seminary could offer the academical curriculum of the church history in the 1930’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