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16-18세기에 서양 원근법 관련 저서를 중국에 들여오게 된 과정과 맥락을 페어하렌의 『북당 도서관 목록』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았다. 『북당 도서관 목록』에는 예수회 선교 사들이 서양 서적을 매개로 중국의 황제나 사대부층과 대화하려는 접촉점을 마련하려 했던 역사와 노력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이 목록에 있는 원근법 저서의 저자와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양 의 예술 분야의 책뿐만 아니라, 광학, 수학, 천문학 분야의 최신 서적을 통해 중국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나 본성에 관심을 가지게 하려는 선교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한편 명말 청초의 중국 지식인층은 서양의 천문학이나 지리학, 수학, 기하학, 예술기법으 로서의 원근법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고, 원근법 책을 번역하는 작업에 도 관심을 가졌다. 물론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 지식층에게 서양 학문을매개로 하나님을 알아가게 했던 노력은 의도한 만큼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문서선교를 통해서 중국의 지식인 계층이 서양 의 학문과 기독교를 좀 더 주체적으로 번역하고 확산할 수 있는 기초작업 을 했다고 본다.
중국교회의 선교운동이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다. 정부의 종교 탄압정책으로 인해 그 실체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교회는 장기간 선교사를 파송하고 글로벌 선교운동에 참여해 왔다. 중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 중국의 경제 성장, 일대일로 정책이 중국 선교운동 발전에 배경이 되었다. 중국 선교 운동은 교회의 미성숙성, 정부의 종교 제한 정책, 선교 경험의 부재 등으로 많은 어려움과 혼란 (난상)을 겪고 있다. Tabor Laughlin은 25명의 중국 선교사의 현지 적응 과정을 7가지 영역으로 연구한다. 연구를 통해 그는 중국 선교 운동의 독특한 12가지 경향성과 6가지 해결 과제 (Implication)를 발견한다. 중국선교운동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 6가지 해결과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 선교운동은 중국과 같이 비서구권 선교운동이면서, 중국보다 한 세대 앞선 선교경험을 가진다. 한국교회의 선교경험에 비추어 6가지 과제에 대한 해결점을 제안하고자 한다.
북한이 어떻게 글로벌 세계 공동체에 동참하며 어떤 개방적 종교정책을 펴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고 분석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북한선교 정책을 세우는데 매우 유용하다. 북한 종교정책의 미래를 전망하는데 있어서 비교해 볼 수 있는 대상은 중국의 종교정책이다. 중국의 개방적 종교정책은 등소평과 강택민에 이어 현 시진핑 정부로 이어지며 발전해 왔는데, 현재 시진핑 정부의 종교정책은 2018년 2월에 발효된 ‘종교사무조례’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 정부가 바라는 대로 교회가 중국적 특색을 가진 교회로 정착되려면 종교자유와 정교분리 원칙과 같은 ‘국가와 교회’ 관계의 원칙이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 교회는 종교의 세속화, 자본주의화, 사유화, 정치화 등 중국정부가 우려하는 방향으로 빗나가지 않아야 하고, 국가 곧 중국정부는 교회가 우려하는 종교에 대한 불신과 무법적 강압 자세를 탈피해야 한다. 중국에서의 ‘교회와 국가’ 사이의 바른 관계 형성과정은 한국교회와 북한정부에게 좋은 모델이 된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서 마태오 리치까지 30여 년 간 중국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으나, 중국선교를 향한 교회의 노력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여 지속적으로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 시절, 일본 선교의 물꼬를 튼 포르투갈 국적의 예수회 선교사들과 상선이 중심이 되어 중국진출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아시아선교의 베이스캠프 가 고아에서 마카오로 옮겨올 수 있었다. 그 후 필리핀을 통해 스페인이 중국선교에 참여하였고, 예수회, 아우구스티누스회, 그리고 작은 형제 회의 선교 방식의 차이를 통해 당시 순찰사로 있던 알렉산드로 발리냐노 는 새로운 선교정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발리냐노의 지휘 하에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본격적인 중국진출이 가능 하게 되었고, 과거 남미 선교에서 주어졌던 ‘선교관할권’(Padronado) 에서 벗어나 선교의 자율성이 확보되고, ‘적응주의 선교정책’이 수립되 었다. 근대 선교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는 동시에 동· 서방 문명의 교류까지 가능하게 된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글은 예수회 본국의 예술신학과 예술교육이 중국이라는 선교지의 예술선교 방식에 어떤 영향 주었는지를 17세기경 중국에서 만들어진 엠블럼 북의 제작과 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응을 살펴봄을 통해 고찰해 보았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예수회의 예술신학과 예술교육에 대해 살펴보았다. 기존에 예수회의 ‘예술신학’(Art Theology)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되지 않았던 예수회의 예술에 관한 신학적 관점을 ‘예술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고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하였다. 하나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신학에 담겨진 아름다움과 예술에 관한 함의이다. 아퀴나스는 현실세계가 선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이며 하나님의 진리와 선,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신적 창조의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자연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를 모방하는 행위로서 가치 있게 여겼다. 피조물을 재현한 예술작품은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계시하는 하나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고 보았으나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다른 하나는 예수회의 ‘영적 이미지’(spiritual images)라는 이론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복음을 피조물의 이미지를 통해 은유적으로 이해시키고 각인시켜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이러한 예술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예수회에서는 이미지를 활용하여 신앙을 교육하고, 예수회 대학에서 원근법을 가르쳐서 복음을 전하고 회원들과 신자들의 신앙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엠블럼 북과 같은 삽화와 이에 대한 해설을 곁들인 책들이 유럽 본국에 널리 전파되고 유행하였다.
3장에서는 예수회의 예술신학과 예술교육의 내용들이 중국이라는 선교지에서도 적용되어 반영되는 과정을 17세기에 유럽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중국에 가서 제작했던 중국말로 번역된 도해와 중국적인 모티브와 양식이 가미된 엠블럼 북들을 통해 살펴본다. 그 중에서도 기울리오 알레니(Giulio Aleni)가 중국에서 제작한 『천주강생출상경해』(Tianzhu Jiangsheng Chuxiang Jingjie)는 유럽에서 제롬 나달(Gerome Nadal)이 만든 『그림으로 된 복음 이야기』(Evangelicae Historie Imagines)에 관한 그림에서 몇 점을 뽑아서 예수의 생애를 중국인들에게 소개한 책이다. 알레니는 유럽의 언어로 되어 있는 그림의 해설 부분을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그림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중국적인 표현을 서양양식과 혼합하여 표현하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유교라는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예수의 생애의 초자연적인 부분들을 보여줌으로써 당대 유교 사대부들로부터 글을 모르는 일반적인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예수회의 예술신학과 예술교육이 중국 예술선교의 방식과 상호작용한 사례에 대한 고찰은 예술선교나 사역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개신교와 한국의 중국선교 상황에 몇 가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먼저 개신교의 예술신학과 예술교육의 연구 기반을 좀 더 확고히 하는 가운데 예술 선교사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러한 예술 신학적이고 예술교육의 이론적인 측면이 신학교 커리큘럼에 좀 더 반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술신학과 예술선교가 서로 영향을 줌으로써 복음이 들어가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한층 더 방향성 있고 풍성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This study seeks to understand why Shantung mission was the only cross-cultural mission work done by the Korean church in 1913-1957 while the focus of other mission works was the Diaspora Koreans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s mission work of the Korean church. The Korean church clearly demonstrated its evangelistic zeal by sending its missionaries to Jeju Island, Manchuria, Russia, Japan, Hawaii and Shantung. However, it is interesting that it was only Shantung mission that was cross-cultural in nature, while all others were targeting Koreans living overseas. This study briefly looks at those early missionary enterprise in different regions, which at the end points to the foundational difference between Shantung mission and other missions in other places. They share many things in common, they both were initiated by the church, they both show the missionray zeal, they both were done while they did not have sufficient resources, they both have sacrificial indiviuals. However, Shantung mission stands as the only cross-cultural mission work. While fully agreeing that Shantung mission was exclusively ministered, gorverned and financed by the Korean church, this study suggests that Shantung mission was the only cross-cultural mission enterprise because it was initiated by a missionary, possibly with the help of a missionary board. Some previous studies seem to overlook the fact that W. B. Hunt took a significant role in planning and preparing Shantung mission, mediating between mission boards, the Chinese church and the Korean church. This study, then, goes further to discuss what the Korean church may learn from this historical event.
The numerous Korean church today embraces the technical goal of the invention building the paradigm of the new mission about the Chinese student studying abroads flowed in into the righteousness, to pay attention to the interior of a country China student studying abroads to the oversea missionary work resource voluntarily, the interior of a country. While the mission environment of Korean Chinese student studying abroads is unable to be good, the result which can be obtained through the missionary activity of the missionaries in China field church is very low. If for the missionary judgment of the Korean churches, the focus is adjusted to the Chinese student studying abroads, the long-term mission strategy which creates the social support system and so that the it has been growing in the mutually different cultural area Chinese student studying abroads can adapt well the Chinese student studying abroads to the Korean culture and college life and can minimize the culture shock because of the gospel will be established. The stress removal factor in which the student studying abroads can take the emotional psychological relaxation is grasped and the Christian culture and the faith settlement, that is the gospel, should be made. the various pattern of adjustments show as to Chinese student studying abroads’ right-foot shoot. However, that it is attached when it has to pay attention. Whether it is familiar with the various factorses including the member of the cultural area, living this success popular culture, language, and etc. or not. However, while the existing values according to the socialist identity which they have in the process of doing Korean college life and world view underwent a lot of difficulties in strange Korean cultural adaptation, the stress was experienced. In this condition, when the church community sets the mission direction and strategy, the many-sided effort for the stress relaxation according to the cultural adaptation of the Chinese student studying abroads is required. the strategic access about how approaching from the position in which the Social Support for canceling the stress required for the cultural adaptation for Korean Chinese college life is needed is required. It has the values, of the church the world view and existing paradigm so far, it is not easy to propagate the Chinese student studying abroads. The strategic access to the new paradigm which can be managed with the form of ‘the come mission’ in ‘it visits mission’ paradigm which the church and missionary group had been providing is desperately required. Therefore the mission resource in which many churches can distinguish the various obstacle according toes the Chinese student studying abroad mission and which can overcome this has to be communally created.
Matteo Ricci’s missionary work in China was a remarkable cross-cultural mission in the 16th Century. Matteo Ricci introduced Christian teaching to the Chinese literati. By adopting the Chinese language and culture, he was able to enter the center of the Chinese society which was normally closed to foreigner. His missionary approach was effective. Ricci did not approach the Chinese culture with superiority like other Western missionaries. He behaved that he came to China to learn. Ricci made notable sacrifices to study the language―he had learned to speak, read and write Chinese, the habits and customs of the Chinese, as to make them his own. Ricci’s second cultural approach is to conform life-style with the socio-ethical system. When Ruggieri and Ricci first entered China together in 1583, they were dressed as Buddhist monks. Later, Ricci found that the monks he met were neither learned nor well respected. Ricci decided to carry his religious testimony to the very heart of the society, and for this, he adopted the life style and dress of educated Confucians. Ricci had grown his hair and beard and put on the scholar’s robes. Ricci’s third approach was to write many moral writings. It was an academic approach. Ricci’s moral writings had attracted the Confucian literati, even by those did not sympathize with his religious ideas. In T’ien-chu shih yi, Ricci mentioned that T’ien-chu [Lord of Heaven] in Christianity was same as Shang-ti [Sovereign Lord] in Confucianism. Ricci’s fourth cultural approach was the introduction of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Ricci displayed world map, western clocks, Venetian prism, European paintings and books. Ricci was accepted widely among the literati by his knowledge of mathematics and other sciences; by the curious objects he had brought, and even by his alleged knowledge of alchemy. Ricci’s fifth cultural approach was to respect Chinese rites and customs. Through discussion with the Chinese literati, Ricci indirectly introduced the Christian point of view on the various problems and matters. His Chinese disciples demonstrated that to accept the Christian faith did not imply abandoning one’s own culture, nor mean diminishing loyalty to one’s own country and traditions, but rather that the faith offered them to serve their country. By this reason, Jesuit missionaries allowed to worship at a shrine of Confucius and to perform a religious service in an ancient rite. In fact, an ancient rite was very delicate and sensitive issue at that time. It requires careful approach through theological reflection and evaluation because cultural accommodation may change to relativism or syncretism. As a missionary, Ricci never forgot his ultimate goal: the preaching the Gospel and the conversion of China. Ricci’s missionary work in China is still a model of Asian missionary work. Ricci’s missionary method through cultural accommodation was vital and actual as ever. It is necessary for the effective missionary works to understand the social structure of the field. Without destroying or ignoring their own culture and customs, we can carefully make a connection between Christianity and culture and customs of the field.
19세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톨릭교회의 선교에 비 해서 그들의 선교가 여러 측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을 인식하 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교현장에서 의도적으로 개신교회가 ‘성서의 종교’ 임을 강조하고,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으며 성서를 보 급하는 일에 노력하였는데 이는 개신교 선교부의 가톨릭교회와의 차별화 전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가 초기에는 ‘선교보호권’(宣敎保 護權)을 중심으로, 1622년부터는 포교성성(布敎聖省)을 중심으로 하여 국 가 및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 및 중국선교를 수행하였던 것과는 달리 개신교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자발적 선교회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국 가 또는 강력한 교회중심체제로부터 벗어나 선교를 수행하였다. 일부의 현 상이나마, 가톨릭교회가 기독교를 선점한 중국에서 그리고 당시 직접적 복 음전도의 자유가 없던 중국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의 최선의 전략은 성서원 문으로부터의 성서번역과 보급이었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자신들 의 정체성과도 일치하는 일이었다. 로버트 모리슨의 번역본을 시작으로 첫 100여년동안 8개의 다른 중국어번역본을 출판한 개신교의 열정이 그들의 성서에 대한 관심을 증거한다. 그러나, 대립되는 성서판본을 출판할 수밖에 없었던 개신교회의 불일치성은 오늘날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기도 한다.
유명한 예일대 역사가 케네스 스코트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는 기독교의 전 역사를 ‘확장’(expansion)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며, 특히 ‘예수의 영향력 확장’이라는 주제를 자신의 역사관으로 설정하고 이 사상을 일평생 유지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사상은 언제 그의 역사관과 선교관으로 확정했을까? 일반적으로 1937년 이래 수년에 걸쳐 출판된 『기독교확장사』(A History of Expansion of Christianity, 1937-45)가 그의 이런 역사관이 구체화되는 시기라고 주장되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라투레트에게 이런 역사관이 없었을까?
1937년 이후 확고히 정립되는 ‘예수의 영향력 확장’으로서의 기독교 역사라는 표현 자체는 1929년에 출판된 첫 기독교 역사 관련 저작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라투레트가 이 책에서 기독교 선교사를 중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서구의 대리자로 묘사할 때, 독자는 그가 1937년 이후 저술에서 등장하는 ‘예수의 영향력 확장’으로서의 기독교 선교역사라는 개념과 거의 같은 인식을 하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중국에 끼친 서구의 영향력’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등장하는 명제는 사실상 ‘서구’를 ‘기독교’로, 또 ‘기독교’를 ‘예수’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즉, 1937년 『기독교확장사』 이후에 구체화되는 명제가 이미 1929년 저작에서 배아의 형태로 표명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기독교선교역사』는 단순히 ‘명제’에서만 1937년 이후 작품들의 선구적 배아가 아니었다. 공정하고 편파적이지 않기 위해 기독교역사 해석은 반드시 여러 교파를 통합과 비교의 방식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에큐메니컬적 역사기술, 또한 예수의 영향력은 교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므로, ‘교회사’가 아니라, 반드시 교회 바깥의 모든 영역을 포괄적으로 기술하는 ‘기독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 기독교 신앙이 선교를 통해 퍼져나갈 때, 이는 마치 파도의 고저, 밀물과 썰물의 반복되는 양상처럼 진보와 후퇴를 반복하지만 결국에는 전진한다는 믿음 등, 1937년 이후 작품에서 구체화된 라투레트의 모든 역사기술 방법론과 관점은 사실상 1929년의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도 흔적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선교사와 선교활동의 공헌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고, 결국에는 기독교의 확장으로 역사가 진보할 것이고 윤리가 개선될 것이라 믿는 이상적이고 순진하고 낙관주의적인 승리주의 역사관이라고 라투레트의 후기 저작을 비판하는 목소리 또한 이미 1929년에 출판된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 점에서 『기독교확장사』(A History of Expansion of Christianity, 1937-45), 『아노 도미니: 예수, 역사, 하나님』(Anno Domini: Jesus, History, and God, 1940)과 『꺼지지 않는 빛』(The Unquenchable Light, 1941), 『기독교사』(A History of Christianity, 1953), 『혁명시대의 기독교』(Christianity in a Revolutionary Age, 1958-62), 『기독교의 역사』(Christianity through the Ages, 1965) 같은 라투레트의 후기 대작은 모두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 빚을 지고 있다.
Timothy Richard(1845-1919), a Welsh missionary, acted as the spearhead of the missionaries in China who were interested in the reform of the late Qing society. Being sent by the Baptist Missionary Society, he worked in the areas including North China and Shanghai from 1870 to 1916 and his works included relief, literature, education, and social reform as well as evangelism. Sublating the hagiographical writings on him published in the first decades following his death and the socialist historiography utterly criticizing him as the agent of imperialism from the other side, this study tries to take a look both at his missionary motivation for the reform of Chinese society and politics and at his problematic toleration of the imperialistic Western Powers that was implied in his suggestions.
Richard was convinced that Western civilization was benefited from the discovery of “the workings of God in Nature.” Communicating with the highest Chinese officials like Zhang Zidong and Li Hongzhang of the Self-Strengthening Movement, which was started in the 1860s, he made an effort to provide the society with scientific education and reform ideas in many areas including agriculture, industry, commerce, transportation, education, and religious education. Serving as the general secretary of the Society for the Diffusion of Christian and General Knowledge among the Chinese (SDK/SDCGK) since 1891, he had a great opportunity to help the Chinese society with writing essays, translating books, publishing books and periodicals. Especially, his translation of History of Nineteenth Century and the periodical titled The Review of the Times edited by Young J. Allen were very popular among the Chinese intellectuals seeking the ways to reform Chinese society.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in terms of the ideology of reform, he did not agree on the overriding Chinese motto of reform, ‘zhong-ti-si-yong,’ which meant ‘the Chinese in mindset and the Western in technology.’ Rather, his idea started from the Western Civilization, not Chinese traditional value system. His suggestion was based on his conviction that Western civilization, comprising of the materialistic development based on natural sciences and ‘the true Christian civilization,’ was superior to Chinese civilization. Thus, his suggestion tends to be a universal reform including modernization, opening of the nation to foreign nations, improvement in commerce and international trades, Western education in sciences, and toleration of Christian education. Even though he did not deny the classical education coming from Chinese tradition and only did ask adding Western subjects to the current education, his respect for Chinese tradition rather came from missiological considerations and his reform ideas came from Western and Christian influences. Furthermore, at the base of Richard’s political activism was his evangelical conviction that made him a missionary to China. In addition to his evangelical faith, through his experiences in China, he developed a type of social gospel emphasizing the Kingdom of God seeking for the salvation of both ‘body’ and ‘soul’ and both ‘individuals’ and ‘nation.’
His effort of reform was at its peak at the 1898 Reform Movement, in which the young rising reformers like Kang Youwei and Liang Qichao co-operated with the Emperor Guangxu to drive forward more progressive reforms following after the Chinese’s defeat at the Sino-Japanese War (1894-1895). He was very influential to the top leaders of the movement in many directions. However, a series of foudroyant ideas that he suggested were not accepted or administered by the leaders and the Court. For example, he suggested 1) a protectorate by the Powers, 2) an annexation or union of China with Japan, the United States, and the British Empire at least in some areas including defence and diplomacy, and 3) a united cabinet with the same number of Chinese and foreign representatives. His ideas were shared by Chinese officials and, in fact, even some similar ideas were coined by Chinese themselves in the great crisis of the fall of the Empire in the encroachments by imperialist Western Powers. His ideas listed above, in spite of the consideration of the context, had implications of Western colonialism trespassing Chinese sovereignty. They especially show the lack of his understanding in the commercial expansion of the Western colonialists. However, despite this point, it does not seem that he was directly connected to the officials or colonialists of the Britain or other Western countries. His idea of protectorate, annexation, or united cabinet was foreign to the current British position in diplomacy.
In conclusion, Richard’s reform idea, first, came from his revised evangelical faith including the idea of the Kingdom of God and missiological consideration seeking for cultural adaptation. second, he contributed to the late Qing reform movement in promoting the discourse of reform and educating the younger reformers. Third, his reform had limitations due to his own political and cultural identities as a British subject. He, in his imperialists-friendly suggestions, came to be in the line of supporting the Western colonialists and he never approached republican ideas, which some progressive Chinese already had in their mind by the end of the cent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