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동의 기술철학의 “개체화”(individualization)의 기초모델은 “결정화”(crystalization)라는 물리화학적 현상에서 시작된다. 결정화 과정은 결정종(결정씨앗: germe/seed)과 모액(母液: mother liquid)이라는 주위환경(milieu) 사이에서 일어난다. 결정씨앗은 주위환경(milieu) 안에서 자신의 현실적 구조를 형성하며 확장해나간다. 한편 결정씨앗이 자라기 이전에는 잠재력(potential)으로만 남아 있던 주위환경은 결정씨앗이 자라기 시작하면서부터 발동하여, 그 잠재력이 에너지로 전환되고 역동성으로 가득 찬 주위환경이 되어 씨앗의 숙성과 구조화를 가능하게 하여 씨앗의 잠재성을 현실화한다. 시몽동의 결정화와 변환의 시각에서 세이머스 히니(Seamus Heaney)의 전 시집과 시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한 조감도를 그려보는 작업은 성장과정에 있는 젊은 시인의 “개체이전의 존재”와 “앞선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을 선험적(apriori)으로 제시해준다. 시몽동의 변환과정은 이질적인 힘을 임시적으로 집결하여 통합을 생성할 뿐 아니라, 존재나 실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구조화하는 것을 설명하여, 개체이전의 존재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미지의 미래로 창의적인 도약을 생성한다. 또한 주위환경 내에서 그리고 주위환경으로서 존재를 에워싸고 또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영역을 생성한다. 시몽동의 변환의 시학의 문맥에서 보면 히니의 시론과 시를 새로이 자리매김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신라가 우산국을 정벌한 이유와 우산국이 신라에 歸服한 이후 신라의 우산국 통치에 대해 살펴보았다. 신라는 독자적으로 발전해 온 정치체인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가 우산국을 정벌한 이유는 지증왕이 그 전 시기와는 다른 지배체제 정비를 통해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산국이 지니고 있는 경제적인 측면 역시 정벌 이유의 하나였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가지어피≒해표피=반어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의 우산국 정벌은 신라의 실직․하슬라 지역에 대한 진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산국이 신라에 귀복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통치 역시 실직․하슬라 지역 지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신라는 일찍부터 실직․하슬라 지역을 지배하였고 통일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실직․하슬라, 명주 지역은 신라 하대 김주원과 그 후손에 의해 일정 정도 지배되었다. 우산국은 신라에 귀복된 이후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신라에 토산물을 바쳤다. 이것은 신라와 탐라와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산국은 신라 멸망 전에 고려에 귀복하였는데, 이것은 명주 지역의 정세 변동과 연동한 것이었다. 따라서 신라 하대 어느 시기부터 우산국은 명주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고 신라의 통치력은 우산국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구비문학에는 많은 인물과 주제와 소재가 존재한다. 또한 이것들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러한 요소를 활용하여 그들의 의식을 표현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인물은 이야기의 구성상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서울과 경기지역에 나타난 통치자를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각 지역마다 통치자의 인물형상이 보편화되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 특색에 맞게 통치자의 형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즉, 서울권은 보다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평민의식을 실현했으며, 여주, 용인, 남양주 등과 같은 지역은 풍수와 관련된 설화가 많은데 이는 왕릉이 주로 분포된 곳이기 때문에 이러한 풍수사상이 평민에게 스며들었고, 수원․화성의 통치자는 대부분 정조가 등장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정조가 아버지인 장헌세자를 그리워 자주 찾았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통치자의 형상이 각 지역의 역사적, 사회적 특징에 맞게 구비문학으로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인물인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제도화시킨 종교개혁자다. 녹스는 다수의 설교, 편지, 중요한 저작들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많은 반대를 일으킨 문제작이 1558년에 출판한 『여인들의 괴상한 통치에 반대하는 첫 번째 나팔 소리』이다. 이 글은 잉글랜드 여왕 메리 튜더의 통치를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작성되었지만 여성 혐오와 여성 통치 반대를 일반화시킨 글 전개로 녹스에게 여성혐오주의자라는 악명을 남겼다. 이에 본 논문은 녹스가 『첫 번째 나팔 소리』를 쓰게 된 시대적 배경을 기술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함으로써 이 책의 핵심이 ‘여성 혐오’가 아니라 우상숭배적인 여성 ‘통치자’ 반대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또한 『첫 번째 나팔 소리』 밖의 녹스가 여성 통치자들과 주변 여성들에게 쓴 편지를 살펴보면서 여성 통치자를 인정하고 여성을 존중했던 역사적 녹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필리핀에서 기독교는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함께 시작되었다. 교황청이 하사한 ‘선교보호권’ 아래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은 1565년에 필리핀의 일부 지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어거스틴 수도회를 비롯한 수도회 소속의 선교사들은 일찍이 17세기가 시작될 때까지는 산간 및 남부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을 개종시키기에 이른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한 3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양편이 가지고 있는 목표 즉 기독교선교와 식민통치의 확장을 위하여 서로 유착관계를 추구한 것으로 드러난다. 식민지배 초기에 스페인은 식민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토착민의 자발적 동의’를 추구하였으나, 통치의 현장에서 수행된 수도회 선교사들의 관찰은 스페인 식민세력에 의한 강제적인 통치를 입증할 뿐이었다. 마닐라 종교회의 (1582)는 스페인이 필리핀에서 정치적 권리를 본질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한편, 기독교 선교의 환경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단적으로 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아, 식민통치를 용인하고 ‘교회의 도구로서의 국가’ 개념을 표방하였다. 한편 스페인 식민당국은 수도회 선교사들을 중앙과 지방에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특별히 지방에서 그들의 공무대행은 식민통치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으며, ‘국가의 도구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현상이었다. 나아가, 식민당국과 교회는 큰 맥락의 인종-정치적 차별주의로부터 필리핀 토착 사제들에 대하여 차별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식민통치를 영구화하려는 수단이었다. 결국, 스페인 통치시기 가톨릭 교회, 특히 수도회 선교사들은 부동산 축적, 소작농의 억압, 인종차별 등의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며 사회로부터 신망을 크게 잃게 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봇물처럼 터진 필리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성직자의 식민통치에의 참여를 비판하는 ‘반교권주의’ (Anti-clericalism)는 가장 강력한 투쟁의 목표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게 된다.
본 논문은 게임 거버넌스의 핵심적 요소로서 게임등급시스템을 분석하고, 주요 행위자들 사이의 균형과 조정, 그리고 문제지점을 조망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등급시스템은 일련의 합의적 절차에 의해 수행되는 안전메커니즘으로 간주되지만, 한국에서 등급분류는 사실상 게임물의 생사여부를 결정하는 사법메커니즘 또는 규율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다. 국내의 관련 이해당사자 집단들이 대체로 자율등급시스템의 형성에 동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메커니즘으로의 이행이 어려웠던 기원에 대해 고찰한다면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맞는 게임 거버넌스 모델을 위한 담론형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