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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6 KCI 등재후보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한국의 독도영유권의 역사와 수호전략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신라·고려·조선·대한제국의 독도통치, 일제의 독도침탈과 미군정기의 독도영유권 회복, 일본의 독도도발과 한국의 실효적 지배, 독도문제의 국제정치적 함의와 한국의 독도수호전략을 살펴본 후 결론을 도출해본 것이다. 신라 이사부가 우산국(현 울릉도와 독도)을 정벌한 이래 오랫동안 우리민족은 독도를 통치해왔다. 그러다가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 중 한반도 침탈과정에서 한국영토 독도를 일본영토로 강제 편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 일제의 패망이후 우리는 독도 를 수호하여 실효적으로 지배해왔다. 하지만 일본은 전후 일본질서를 규정한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한국에의 반환도서로 독도가 명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도의 일본영유권을 제기하고 있다. 일본은 독일이 포츠담협정을 통해 강제합병한 모든 영토를 말끔히 반환한 것과는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빌미로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 과는 거리가 먼 한국이 일본 대신 분단되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일본은 더 이상 독도도발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은 외교 적·군사적 대응역량 강화를 통해 우리 영토 독도를 착실히 수호·개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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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명시된 석도(石島) 명칭과 독도(獨島)와의 관련성을 밝히기 위한 연구는 상당한 진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측 연구자들은 여전히 칙령 속 석도 명칭이 독도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석도=독도’에 대한 선행연구는 주로 순한국말과 한자 표기와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독섬(돌섬)이 석도나 독도와 같이 표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어 활용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이 한국어와 한자표기와의 관계를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이 연구의 목적은 제3자의 눈에 비친 조선후기 독도 명칭의 용례를 밝히고,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의 독도영유권 논거에 주는 함의를 도출하는 것이다. 즉, 독일인 지도학자 시볼트의 「한국전도」에 표기된 독도(Tok to) 명칭을 조선후기 고지도 및 현대 북한지도 속 석도 명칭과 비교함으로써 석도 명칭과 독도와의 상호 관련성을 좀 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에서 다루고자 하였다. 연구결과, 조선후기에 한국에서는 독도라 부르던 섬을 지도와 문서에는 석도로 표기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연구결과는 칙령 속 석도 명칭이 독도를 지칭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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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4.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신라 지증왕 13년(512) 우산국의 신라에의 귀복으로 수립된 독도의 역사적 권원은 대한제국에 이르러 1908년 10월 25일의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의해 현재 국제법상의 권원으로 권원의 대체(replacement of title)가 이루어질 수 있 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로부터 10년이 되는 1910년 8월 22일의 "한일합방조약"의 체결로 독도를 포함한 한국의 모든 영토는 일본에 사실상 병합되어 현대국제 법상 권원으로 대체된 대한제국의 독도영유권의 사실상 중단되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사실상 중단되었던 권원은 1910년에 소급하여 회복하게 되었다. 이 회부된 권원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의 권원을 이루고 있다. "한일합방조약"에 의해 사실상 중단되었던 독도영유권의 권원은 연합국의 일련의 조치에 의해 회복되게 되었고, 1951년 "대일평화조약"에 의해 이는 결정ㆍ승인ㆍ확인되게 되었다. 따라서 1951년 이후 오늘의 시점에서 독도영유권의 권원은 "대일평화조약"이며 그 이전의 "항복문서", "카이로선언", "포츠담 선언", "연합국 최고사령관 훈령 제677호"가 아니다. 이들은 "대일평화조약"의 해석의 근거로 원용될 수 있을 뿐 그 자체가 독도영유권의 권원으로 보기 어렵다. 독도의 imperium은 동훈령에 의해, dominium은 "대일평화조약"에 의해 회복되게 된 것으로 본다. 오늘의 독도 영유권의 권원은 "대일평화조약"이다. "대일평화조약" 제19조 (d)항의 규정에 따라 "SCAPIN 제677호"에 의해 분리된 것이 승인되므로 독도는 직접적으로 "대일평화조약"에 의해 분리된 것이며 간헐적으로 "SCAPIN 제677호"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의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의 규정에 의해 1948년 8월 15일까지 승인의 효력이 소급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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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김정호의 「청구도범례」에서 고지도의 경우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작성하였지만 만약 상하·좌우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전체 지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란 지적을 통해 현재 고지도를 보는 시각에 대한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독도, 우산도는 울릉도 동남쪽에 있다. 「청구도범례」에 따르면 고지도상의 ‘우산도’의 경우 동쪽이나 동북쪽에 그려진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서쪽이나 북쪽, 남쪽에 그려진 것은 우산도의 위치가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런 고지도가 나왔을까? 그 이유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이 글이 작성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우산도·무릉도 설명을 통해 우산도는 무 인도임을 정확히 인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울릉도가 울진에 가깝지만 우산을 먼저 들고 울릉도를 뒤에 기록한 것은 우산이 무인도임을 알았기 때문에 적을 것이 없어 먼저 기록하고, 울릉도에서 양자의 관계를 적을 수밖에 없는 사정 때문에 그러한 서술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산’, ‘무릉’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것이 고지도상 본토와 울릉도 사이에 ‘우산도’를 표기하게 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울릉도 동(남)쪽에 ‘우산도’를 표기한 지도는 1693년 이후에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를 건너간 이후 ‘울릉도쟁계’ 발생 이후, 1694년 장한상이 울릉도에 파견된 이후에 수토제가 확립되면서 주로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지도에 나온다. 조선 초기의 경우 주로 강원도에서 울를도와 독도를 드나들었지만 조선후기의 경우 경상도, 전라도 지역의 동남해연안민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드나들었다. 그들은 울릉도의 동북방 에 ‘우산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후기 고지도에서 울릉도 동북방에 ‘우산도’를 표시하는 지도가 나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산도’가 표기된 지도를 두고 ‘독도’라고들 한다. 특히 울릉도 동쪽에 그려진 ‘우산도’ 는 독도임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울릉도 동쪽에 그려진 ‘소위우산도 ’는 독도 가 아니라 댓섬(죽도)이다. 영조때 강원도감사 조최수의 주기가 담긴 ‘우산도’는 ‘소위우산 도’를 빼고 ‘우산도’라고 하였고, 광활하다고 하였다. 이 주기가 담긴 ‘우산도’도 댓섬일 것이다.
        5.
        201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도 문제는 동아시아의 미래 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럼으로 앞으로는 독도 문제 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현실주의적인 해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독도 문제에서 1905년 1월 일본의 독도 점유는 조선 침략을 시작하면서 5년 뒤의 강압적인 한국 병합을 위한 전조로 행해졌다는 점에 시초가 있다. 일본으로서는 이 주장을 논박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이렇듯 독도 문제는 일본군 강제위안부 등 여전히 미해결 상태인 다른 과거사 문제 청산작업과 동시에 진행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젠 이런 문제를 인정한 뒤 대화와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쌍방 모두 심대한 손실을 입게 될 상황에 처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이런 중대한 의미를 갖는 독도 문제에 대해 한국 국민들의 현재 상황을 파악해 보는 시도이다. 이를 위하여 이 연구에서는 특히 우리 국민의 독도 영유권 인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 연구에서는 먼저 한국 국민의 독도 영유권 인식 현황을 살펴보았다. 더불어 사회경제학적 입장에 따른 한국 국민의 독도 영유권 인식 현황을 살펴보았다. 다음 으로는 독도 영유권과 관련 있다고 판단하는 다른 항목들에 대한 인식 현황을 살펴보고, 이들 관련 항목과 독도 영유권 인식과의 관련성을 분석해 보았다.
        6.
        201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현재까지의 국내외 독도연구는 국제법 연구와 역사 연구로 대별되어 진행되었다. 법적 연구에 있어서는 독도의‘영유권’(sover- eignty, ownership, 영토주권)의 문제와 한일간 어업 및 배타적경제 수역(EEZ) 경계획정 등의 주제 및 전문분야별 문제로 구별하여 진행되었다. 특히 독도영유권의 연구는‘본원적 권원’(original title) 또는‘역사적 권원’(historictitle)과‘실효성(지배)’(effectivities, effective control, effective occupation)등에 근거한‘현대적 권원’및‘권원의 행사 및 유지’등에 관한 분야별 연구가 수행되었다. 한편 역사적 연구는 연혁적으로 크게 1894년‘갑오개혁기’를 전후한 전근대 및 근대 등 시기적 구별에 기초하여 연구되었다. 이러한 법적 역사적 연구는 기본적으로 독도의‘고유 영토론’과 ‘무주지 선점론’으로 대별되어 법과 역사간의 학제적 기틀을 형성하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현재까지 독도영유권에 관한 한일간의 연구 경향을 개괄적으로 고찰하고, 한일간 법사학적ㆍ법제사적으로 주요 쟁점들을 추출 분석하고, 독도영유권 증거 자료, 대응평가 등에 관한 검토를 통해 향후 독도연구 과제와 전망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