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28

        21.
        201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서예작품에 보이는 단선(團扇) 형식의 원류에 대한 고찰을 통해 단선(團扇) 형식의 형성은 부채 본연의 변화과정과 두루마리 형 식의 서예작품이 서로 만나 형성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송(宋) 휘 종(徽宗) 조길(趙佶)의 <초서단선(草書團扇)>을 시작으로 단선(團 扇) 형식의 서예작품은 궁중 문화의 형태로 북송(北宋)시기에 출현하 게 되었다. 남송(南宋)시기에는 궁중에서 더욱 유행하게 되어 그림 중의 작은 경치[畫中小景], 문장 중의 작은 곡조[詞中小令]와 함께 남송 예술 중의 특색 있는 풍경을 구성함과 동시에 서화(書畫)작품이 동일한 형식 중에서 응용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실현하였다. 단선(團 扇) 형식이 궁중 문화에 국한됨으로 인해 문인(文人)들의 호응이 결 여되었다. 이로 인해 원명(元明)시기의 서예작품에서 광범위하게 응 용되지 못하여 거의 500여년 동안 침묵하게 되었다. 서예작품의 형식 이 끊임없이 종합되는 과정에서 단산(團扇)의 옛 형식도 청(清) 중후 기에 서예작품에서 거듭 응용되기에 이르렀다. 그 형식도 더욱 풍부 해지고 접선(摺扇) 형식과 함께 부채 서예작품의 큰 줄기를 이루게 되었다. 원형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단선(團扇) 형식은 두루마리 서 예작품 중에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 초기 중국 문명이 천지(天 地)에 대한 이해를 함유하였을 뿐 만 아니라 불교문화 중에서 원융경 계(圓融境界)에 대한 추구를 융합하고 더욱 민속 중에서 “한데 모여 화목하다[團圓和美]”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게 되었다.
        9,300원
        22.
        201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황은 경 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居敬을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한 유학자였다. 그는 젊어서 유학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心經附註라 는 책을 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늦게 깨달아 이루기 어렵다.”고 한탄하기도 하였지만, 처음 학문하고 수양하는 일 에 感發하고 興起한 것은 이 책의 힘이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송종 관 또한 이 책을 읽고 나서 서예가 마음의 그림이라는 의미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서예가 마음의 그림이라고 하는 설은 일찍이 한나라 양웅이 제시하 였다. 이 설은 나아가 ‘마음이 발라야 글씨가 바르다.’․‘마음 법이 곧 서법이다.’․‘사람이 발라야 글씨가 바르다.’ 등으로 전개되어 서품이 곧 인품이라는 ‘書與其人’ 설로 발전하였다. 서여기인의 근본은 도덕성이다. 도덕성은 敬의 사상에서 비롯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경은 공경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의 이 의미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살펴보면 더욱 오묘한 이치가 담겨있다. 경은 곧 道의 이론적 근본이 되면서 도를 실천 하는 방법이기도 하 다. 이때의 경은 엄숙․경건․공경․경외․깨어있음․마음의 수렴 등 다 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 다양한 의미 가운데 程頤와 朱熹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主一無適’의 의미였다. 주일무적은 글자 그대로 하나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는 뜻으로 일종의 정신집중을 의미 한다. 하지만 더 깊은 뜻은 인욕의 유혹에서 벗어나 천 리의 실천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서예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서예공부는 서예의 이론적 근본을 바탕으로 기능적 실천이 따라야 하 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자는 서예의 근본정신을 경의 사상으로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자는 “내가 글씨를 쓸 때 매우 경한 마음으로 쓴다. 이것은 글자를 잘 쓰고자 해서가 아니라 다만 이것이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정자의 ‘寫字時甚敬’은 곧 유가 도덕 서예의 근본사상 이 되었다. 이황 역시 이 의미를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이황은 이 ‘敬字之意’를 서예에서도 실천에 옮겨보려고 노력한 학자였다. 그래서 그의 서예를 ‘경의 서예’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8,400원
        23.
        201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최치원의 삶과 <진감선사비>의 서예연구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최치원은 12세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討黃巢檄」문으 로 文名을 떨쳐 紫錦魚袋를 하사받고 唐書․藝文志에 수록될 정도 로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894년 귀국 후 時務策 10조를 올려 阿湌 까지 올라갔으나 국세가 기울자 898년에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않기로 맹세하며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를 통하여 그가 중국에서 닦은 학문과 재주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속세에 묻힌 그의 비극적 삶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진감선사비>의 전액과 비문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 적이고 자유분방한 서체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진감선사비> 를 감상하는 시각이다. 종래에는 이것이 누구의 서체에 가깝고 누구 의 서풍과 닮았다고 하는 것이 감상의 주된 초점이었다. 그러나 전액 과 비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엇과 닮았다는 것은 객관성 확보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것과는 달리 천편일률적으로 판에 박히지 않고 활달하며 자유로운 필치를 나타내고 있다. <진감선사비>가 누구의 서 체와 흡사하다는 것은 시대적 제약이나 그는 결코 개성까지 말살하지 는 않았다. 만약 거꾸로 <진감선사비>를 당나라 서풍과 비교한다면, 아마 당시 유행하였던 모든 서풍이 여기에 융해되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진감선사비>는 당나라의 모든 서풍을 융해시켜 자신의 성정 을 나타낸 새로운 창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의 핵심이고, 앞으로 한국서단이 주체성을 가지고 중국서예를 어떻게 수 용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6,700원
        24.
        201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만물은 一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一氣는 생성․변화․발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氣化는 생명의 세계이다. 이 생명의 세계는 모 두 一氣 속에서 流動한다. 특히, 書畵속의 一氣의 生動美는 생명정신 의 추구이자, 음악적 리듬으로 충만한 氣化의 세계이다. 서예가는 一 氣一筆로써 大千世界를 삼키기도 하고, 또한 토해내기도 한다. 서예작품 속에 나타난 墨氣는 生動美가 순환․왕복한 것으로, 점․ 획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다. 특히, 서예는 氣脈을 중시하는데, 그 氣 脈은 예술의 魂이며, 활기찬 한 줄기 생명의 흐름이다. 서예가는 여 백 속에 숨어 있는 생명을 筆勢로서 形迹化한다. 이러한 氣化이론은 서예의 생명이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서예는 이 영향을 받아서 단지 하나의 기술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生命化 과정을 표현 하는 것이다. 무한한 우주속의 一氣는 一筆書, 一筆畵로서 서예작품 속에 그대 로 표현하면서, 획과 획을 이어주는 生動性을 가진다. 서예의 生命은 一氣가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되면서, 그 표현방법은 一筆이고, 드러 난 자취는 바로 一線이 된다. 이처럼 書藝家가 표현한 筆線은 시각적 아름다움만이 아닌, 무한한 생명을 잉태한 ‘眞美’이다. 본 논문은 서예의 ‘一筆揮之’를 통하여, 氣의 세계가 生命化 과 정을 거치면서, 生動美로 轉化된다는 것을 고찰한 글이다.
        6,600원
        25.
        201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人性敎育에 대한 德目과 內容 體制는 시대의 요구와 가치 미래비 전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인성교육에 대한 요구와 내용을 현시점 과 미래 지향의 방향에서 재점검하고 시대에 적합한 방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교육체계도 8차 교육과정에서는 創意的 人性敎育이라는 융 합된 형태로 인성교육의 내용이 바뀌어 추진된다. 하지만 오늘의 인성 교육이 主知主義적 관점에서 실천적인 관점으로 기본취지가 변경되고, 실천 중심의 창의적 인성교육은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창의적 인성교육의 실천에 대한 고민이 광의적인 검토되고 확 장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창의적 인성교육의 프로그램 개발과 실천을 위한 제반 노력들도 요구되고 있다. 예술교육은 창의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장점과 인성을 함양할 수 있는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많은 예술관련 과목 들이 개설되었다. 하지만 書藝의 경우는 미술과목 자체속의 일부분인 현실이다. 서예가 교육현장에서 저 평가받고 있는 현실은 書藝 자체 와 서예를 둘러싸고 있는 제반 관계들에서 기인한다. 그간의 서예는 시대를 달리하면서 발전하고 변화하는 제반의 조건들과 무관하게 과 거의 시점들에 갇혀 지내온 것이 사실이다. 외연과 내용의 변화에도 둔감하게 반응하며, 修養論적 측면에서 인 성의 涵養이라는 구시대적 프레임으로 일관해온 측면이 강하다. 이러 한 상황에서 서예를 통한 창조성이나 인성의 함양을 제기 할 수 없 다. 따라서 독창성이나 유창성, 공동체성, 그리고 도덕적 판단력 등의 창의적 인성을 함양할 수 있는 지표들을 높일 수 있는 서예의 대안적 프로그램들의 개발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6,700원
        26.
        2006.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18세기 서단의 대표적 인물인 坯窩金相肅(1717~1792)의 ꡔ坯窩遺稿ꡕ와 ꡔ百一集ꡕ의 「筆訣」을 중심으로 그의 서체와 서예론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김상숙의 書體成立배경에서 그는 다른 사람의 서첩을 모방하지 않고 고인의 筆意를 상상하여 붓끝에 옮겨 내는 방법으로 鍾繇의 「宣示表」, 「薦季直表」, 「力命帖」등의 法帖을 철저하게 意臨하였다. 그 결과 필획이 가늘면서도 굳센 心畫을 바탕으로 線條가 절제되고 字軀가 아담한 稷下體를 이루어 낸다. 이는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운 筆意를 內含하고있는 楷書가 주를 이루는 것으로 선비의 고고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는 書家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필획을 중시하여 筆才의 高下를 막론하고 작가의 마음에서 배태된 心畫이 있어야하며, 바람직한 심획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하며 정밀하고도 부단한 학습을 통하여 작가의 내면세계가 서론을 통해 온전히 전달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서법이 완성된다고 주장하여 심획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手隨心運論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김상숙의 개성화 된 서론과 서체의 창안으로 18세기 서단이 백화만발하게 된다. 이는 서예의 반성적 전형을 왕희지로 삼고, 주체적 창조정신과 생명정신을 예술창작의 기저로 삼아, 서예의 체질을 개선하는 법고주의 발현에 의한 서예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주체적 예술 활동은 서예의 외재적 객관규율을 중시하던 기존의 미학관에서 脫規範化․脫規定化․脫形式化를 선도하면서 순수한 자기 심정의 眞을 중시하는 미학관을 새롭게 제시했다.
        6,700원
        27.
        200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Chinese character carved on the monument at Moo Jang Temple(무장사, 藏寺) bear a striking resemblance to the calligraphic specimen of Wang Hee Ji(왕희지, 王羲之) the famous Chinese calligrapher. This has led many to believe that these characters on the monument are an assembly of Wang's calligraphic writings culled from one place to another. However, when considering how proportionally and harmoniously those characters are arrayed and how homogeneous they look in size and heavy stroke style, one may find it difficult to imagine that they are merely a collection of Wang's calligraphic works selected and pieced together carefully. According to my own inquiry, numerous experts of the field in the past, including Kim Jung Hee (김정희, 金正喜) and Hong Yang Ho(홍양호, 洪良浩), have recorded that those characters in question are the work of Kim Yook Jin(김육진, 金育珍), a calligrapher during the Silla Dynasty. I would also propose that what we see in the monument are not the work of Wang Hee Ji but the work of Kim Yook Jin who, with Wang Hee Ji as his primary model, had mastered the art of calligraphy to the highest possible level. If this is true, what we see in the monument is a great calligraphic work produced by an individual who had accomplished such an artistic achievement that is comparable with that of Wang Hee Ji. Kim Yook Jin's new dexterity was such that even the experts in the field could be mistaken his work for that of Wang's. If this claim here turns out to be valid, it is likely that we are witnessing a fresh new mane added to the list of the Korea's greatest calligraphers. Futhermore, the significance of this addition is that it will shed light on some unexplored chapter in the calligraphical history of Silla Dynasty which includes a handful of calligraphers only such as Kim Sang(김생, 金生).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