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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2013.08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필자는 삼척 관련 지리지와 고지도에 기록된 울릉도ㆍ우산도 관련 기록을 통해 삼척을 비롯한 삼척 주변 지역과 울릉도ㆍ독도와의 친연성과 그 관련 기록을 찾고 정리하여 분석한다면 일본의 주장에 더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울릉도ㆍ독도 지역이 진정 우리의 영토이고, 우리와 함께하는 터전임을 좀 더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삼척지역에서는 15세기 기록에 이미 울진현을 비롯한 삼척지역을 중심으로 울릉도ㆍ독도를 삼척 관할로 여겨 각종 地理誌의 古蹟條와 姓氏條ㆍ島嶼條ㆍ人物 條, 古地圖에 표기하고, 이를 언급하여 이 지역 주민들 삶의 터전이었음을 기록으로 남겼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와 같은 기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정책 변화와 관리 파견, 그리고 다양한 변동 사항을 그 이후에 만들어진 각종 지리지나 고지도에 반영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삼척지역에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하여 신라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를 복속한 이래 지금까지 큰 관심과 애착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신라 이래 울릉도와 독도가 삼척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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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2013.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축성된 월송포 진성은 1970년대까지도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었다고 전해지지만, 1970년대 이후 주변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흔적만 일부 남아있는 상태였다. 월송포 진성의 남쪽 일부가 울진군에서 추진하는 망양-직산간 도로 확장공사 부지에 포함됨으로 인하여 추진된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성벽과 문지, 우물 등이 잘 남아있음이 확인되었다. 진성은 해안에 접한 해안평탄면에 형성된 사구의 남쪽 말단부에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남쪽으로 수로가 연결되어있어 천연의 해자를 이루는 형태이다. 이는 인접한 울진포영 및 남해안 일대에 위치하는 영ㆍ진ㆍ보성의 입지와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성벽은 후대 교란으로 인하여 동쪽 일부가 유실되었으나 지적도상의 지번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지적도를 참고하여 성의 규모를 추정해 보면 둘레 328.8m 정도이다. 성벽의 둘레와 문헌기록을 통하여 확인되는 성벽의 높이는 3.1~4.7m 정도로 추정되며,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벽의 폭은 6m 내외이다. 성벽의 안쪽 에는 성벽과 동시에 축조된 우물이 잘 남아있었으며, 문지 안쪽으로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풍경화에서 보이는 문루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월송포 진성은 인접한 대풍헌의 현판과 『조선왕조실록』등을 통하여 삼척영과 함께 3년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울릉도 ․ 독도 수토를 담당하였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울릉도 수토는 1693년 안용복의 일본 도해 사건을 계기로 1694년 처음 시작되어 1895년까지 계속되었다. 수토사의 출발지는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번갈아 수토관으로 파견되는 관계로 초기에는 삼척부의 장오리진, 울진현의 죽변진, 평해 군의 구산포 등 수토관의 위치와 인접한 지역이었으나, 후기로 오면서 구산포로 고정되었다. 이는 동해의 항로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면서 울릉도과 가장 가깝고, 항해에 해류와 해풍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구산포임을 파악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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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2013.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994년 유엔해양법협약의 발효이후 국제법상 섬이 어떤 종류의 해양수역을 가질 수 있으며 해양경계선을 그을 때 섬에게 어느 정도의 효과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선결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에 독도의 법적 지위와 한국과 일 본간의 영유·영토권의 논의를 고찰하고, 국제법상 섬의 지위를 살펴보고, 독도가 실제로 어떻게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의 지위를 가지는가를 고찰한 후 독도에서의 실제 거주민의 어업활동과 실효지배에 관해 살펴본 뒤 결론에 이른다. 현재 도서로서 독도의 법적 지위는 한일 양국 모두 국제법상 섬이라는 데 이 견이 없다. 먼저 한국은 역사적으로 512년 이사부의 우산국 귀복이래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관리해 왔다. 이러한 근거로는 근접해 있는 가시거리내의 섬이라는 이유, 식수 등 인간의 장기거주 여건이 열악하다는 점에서 지리적 근접성과 일체성의 근거이외에서도 어업활동을 위한 실제 여건에 근거하여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한 섬이라는 것을 고찰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독도를 일본 역시도 명백히 독도를 섬이며, 대륙붕 결정 시 그 지위가 고려되어야 하는,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섬 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 한 1960년대 초부터 독도에 상시 거주하기 시작한 최종덕 및 그 일가, 해녀의 어 업활동 사실을 통해 독도는 결코 사람이 살 수 없는 무인도가 아니라는 것이며, 국제법상 영해는 물론 배타적 경제수역 등의 권원을 향유하기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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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2013.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일본에서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근거로,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한국이 옛날부터 다케시마(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없다는 것과 1403년 조선의 울릉도 주민쇄출은 조선에서 독도를 포기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주장대로 울릉도에서 주민을 쇄출하여 울릉도를 무인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인화의 이유는 울릉도가 동해안 왜구침탈의 중간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무인화이후 우산무릉등처안무사 와 순심경차관을 파 견했고, 조선후기에는 수토사를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관리했다. 최초의 수토사였던 장한상의 기록은 『울릉도』와 『울릉도사적』에 상세하다. 이 기록들을 통해 울릉도 수토계획 및 목적, 구체적인 수토내용, 수토당시의 독도확인과 왜에 대한 경계 등을 알 수 있다. 수토제의 시작은 안용복 피랍사건이후, 왜인의 울릉도 침탈을 막기 위해,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진을 설치할 계획을 가지고 실시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주민의 울릉도 이주가 어렵게 되자, 수토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울릉도』나 『울릉도사적』의 내용 중에 울릉도에서 대관령이 보이고, 동남쪽으로 섬이 보인다는 기록을 통해 그 섬이 독도임을 알 수 있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의 한국이 옛날부터 다케시마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없다는 기술의 허구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후기 울릉도 수토제가 조선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정기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실시했던 제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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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2012.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울릉도지역에서 이용되고 있는 민속식물을 파악하기 위하여 2009년 3월부터 2010년 9월까지 수행되었다. 울릉도의 20개리에서 주민 5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후 수집한 조사야장 553장의 설문을 분석한 결과, 51과 93속 98종 2아종 13변종 총 113분류군으로 정리되었다. 조사된 113분류군 중에는 한국특산식물 5분류군, 희귀식물 14분류군, 귀화식물 5분류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용도별 이용현황은 약용 72종류, 식용 65종류, 관상용 5종류 등으로, 약용의 이용 빈도가 가장 높았다. 이용 부위로는 잎, 열매, 뿌리의 순으로 나타났으며, 연령별 표준식물명과 지방명의 일치성 여부를 분석한 결과 40대에서 가장 높았으며, 70대에서 가장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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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2012.08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삼척의 이사부 축제는 지역적 연고가 있던 이사부라는 역사인물을 현대의 축제의 소재로 활용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임을 부각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독도를 비롯한 영토수호의 역사인물임을 드러냄으로써 범지역적 축제로 확산시키는 효과를 창출해 내었다. 이 연구의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우륵의 12기에 나타난 사자연행과 이사부의 목사자 전투는 진흥왕 이전 신라사회에 사자문화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라의 통용된 사자연행예술은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로 존재했다. 따라서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에서 사용한 목사자는 당대에 신라에 유통된 외래문화였으며, 이후 사자는 여러 연행예술로 발전된 것이다. 둘째,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에서는 사자탈과 같은 이동형 목각양식이 이용되었다. 이것은 이사부의 해군부대가 우산국 전투에서 목사자의 전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하여야 했기 때문에, 고정형 목각양식으로는 우산국 사람들을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부의 목사자는 고정형 목각양식이 아니라, 탈과 같은 이동형 목각양식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사부는 삼척 강릉지방의 지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과거 강릉단오제에 모셔졌을 뿐만 아니라 현재 삼척 오분동 마을에서도 모셔지고 있다. 이렇듯 1500년 전 역사인물 이사부는 지금까지 삼척 지역에서 신격화 되어 숭앙받는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이사부 축제는 삼척 지역의 지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축제의 이념적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삼척시는 이사부 축제를 국가의 외교문제와 연관시킴으로써 국가와 연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하였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울릉도를 생활권으로 하고 있는 독도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2005년 일본의 다케시마(독도)의 날 재정으로 고조된 한일 외교문제와 연관된다. 따라서 삼척시는 축제에서 이사부의 소재를 독도 및 해양에 확장시킴으로써 축제향유 계층을 국민으로 확장시켰으며, 더불어 국가차원의 지원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축제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삼척시의 이사부 축제는 기존의 지역 역사인물을 발굴하여 연결시킨 결과물이다. 이 과정에서 투영된 자치단체의 축제화는 이사부를 포장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취지 아래 다양한 국가사업과 연계함으로써 지역의 문화기반을 마련하게 된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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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201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산마늘의 임간재배를 위한 기초 환경자료를 제공하고자 실시하였다. 울릉도 산마늘은 너도밤나무, 우산고로쇠나무, 섬잣나무, 솔송나무, 소나무, 곰솔, 섬피나무, 두메오리나무 군락에 자생하고 있으며, 입지환경은 평균 해발고도 563.4 m, 평균 경사는 27.8°이었다. 토성은 사토, 사질양토, 양질사토, 양토가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유기물층의 깊이는 평균 6 cm, 토양 pH는 5.40, 유효인산은 18.5 ppm, 양이온 치환용량은 18.6 cmolc/kg으로 나타났다. CCA분석에 의한 입지와 토양인자와의 상관관계를 보면 너도밤나무군락은 탄소, 질소, 모래함량, 양이온치환용량과 정의 상관관계를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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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2012.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연구의 목적은 현무암과 화성암과 같은 화성암을 관찰할 때 화성암 지역에 살고 있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 사이의 특징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다. 연구를 위해 제주도에 살고 있는 5학년 학생 68명, 울릉도에 살고 있는 5학년 학생 28명, 그리고 화산지역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지역의 5학년 학생 61명을 선정하였다.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현무암과 화성암을 관찰하게 한 후 학생들은 관찰한 사실을 모두 적었다. 그리고 관찰이 끝난 후 관찰이외에 현무암과 화성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 모두를 적도록 하였다. 연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화성암 관찰에 있어서 학생들은 지역적 특성 변인에 의한 유의미한 통계적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둘째, 화성암과 관련하여 학생들이 관찰 이외에 알고 있는 지식의 양 또한 지역적 특성과 관련되어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셋째, 화성암에 대해 관찰 사실 이외에 알고 있는 지식을 질적으로 분석한 결과, 많은 학생들은 화성암의 근원물질이나 생성과정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한 진술은 많이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통해 우리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수업이 현상을 탐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례들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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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2012.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에서는 울릉도 온실기체 관측장비(CRDS)에서 관측된 CO2와 CH4 농도를 정형화된 QA·QC 처리절차를 통해 온실기체 평균 배경대기 농도값으로 활용하기 위한 정확도를 향상시켰다. QA·QC 처리절차는 총 3단계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는 관측자료의 시간별 평균값을 구하기 위한 물리적 한계검사, 기후범위 검사 및 1시간 측정 자료수가 50% 이하인 자료는 제외시키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번째는 일평균자료 산출을 위한 단계검사, 앞뒤로 같은 값일 경우는 제외, 하루 중 관측횟수가 15회 이상 및 일관측 자료의 표준편차가 일표준편차 평균의 3배 이하인 자료만 허용하는 과정이다. 세 번째는 기후적 특성분석 활용을 위한 Curve-fitting methods를 이용한 FFT 적용단계이다. 이상의 QA·QC 절차에 의한 CO2 및 CH4의 월평균농도 값을 안면도 지구대기감시센터 자료와 일본 료리 관측자료와 비교 분석한 결과 CO2에 있어서는 울릉도 관측자료 누락에 의한 영향이 다소 크게 나타나 안면도 관측값이 배경대기 평균농도 값으로 유효하였고, CH4는 안면도 보다 오히려 울릉도 관측값이 한반도 배경대기 평균농도 값으로 더 적절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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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2012.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희귀식물로 지정되어 있는 울릉도 미역고사리의 자생지 환경을 조사하여 보전 및 복원 시 기초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조사결과 미역고사리의 자생지는 해발고도 410~748m 범위와 경사 12~80˚의 암석지에 주로 생육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식생분석결과 4개 지역의 10개 방형구내에서 조사된 관속식물은 총 66분류군이었다. 자생지 상층수목 중 교목층의 중요치는 고로쇠나무(49.52%)가 아교목층은 당마가목(28.99%)이 가장 높았으며, 관목층은 바위수국(51.99%), 섬쥐똥나무(8.82%), 너도밤나무(7.25%)가 높은 값을 보였다. 초본층은 미역고사리가 23.23%로 가장 높았으며, 다음으로는 큰두루미꽃(9.65%), 파리풀(9.23%), 관중(8.40%), 산꼬리사초(6.75%), 섬바디(5.42%) 등이 높은 값을 보여 이 종류들이 친화도가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종다양도는 1.18로 산출되었으며, 우점도와 균등도는 각각 0.11와 0.84로 확인되었다. 토양분석 결과 토성은 사양토로 나타났으며, 포장용수량은 30.42%, 유기물함량은 17.95%, pH는 4.70으로 측정되었다. 환경특성과 식생 및 토양분석 결과에 기초한 상관분석에서는 종다양도와 종풍부도는 정의 상관관계를 보였고, 종다양도와 우점도 그리고 미역고사리의 피도와 종풍부도는 부의상관관계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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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2011.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울릉도 나리분지의 군락구조와 환경요인의 상관관계를 파악하여 산림식생의 보전 및 관리 에 필요한 생태학적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수행되었다. 나리분지의 산림군락은 너도밤나무군락, 당 마가목군락, 소나무군락, 풍게나무군락, 두메오리나무군락으로 분류되었다. DCCA 분석 결과, 환경요인 중 해발이 군집의 분포에 영향을 미치는 인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너도밤나무군락과 당마가목군락은 방위, Na, C/N의 환경요인과 군락단위의 분포지가 높은 상관관계를 나타내었다. 풍게나무군락은 Ca, K 등과 상관관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두메오리나무군락은 CEC의 함량이 높은 입지에 분포하고 있었으 며, 해발고와 높은 상관관계가 있었다. 소나무군락은 Ca, CEC의 함량이 높은 입지에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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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201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울릉도 나리분지 주변의 지속가능한 관리를 위한 기초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입지유형별 (사면, 지 형, 임분) 토양특성을 분석하였다. 사면별 토양분석 결과, 토양 pH와 유효인산 함량은 북사면이 다른 조 사지에 비해 유의적으로 낮게 나타났으며 전질소 함량은 나리분지가 가장 낮았다. 지형별 분석 결과, 토 양 pH는 산정의 5.13에서 나리분지의 5.59, 전질소 함량은 평지인 나리분지의 0.63%에서 산복의 0.87% 의 범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분별 토양특성 중 토양 pH, 전질소 및 유효인산 함량은 전조사지에 서 유의적인 차이가 나타나 식생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유효인산 함 량은 사면별로는 2.79-8.46 ppm, 지형별로는 3.99-8.46 ppm, 임분별로는 5.03-11.59 ppm으로 나타 나 일반 산림토양과 비교하면 아주 낮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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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2010.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울릉도 자생 우산고로쇠나무군락의 합리적인 관리를 위한 기초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식생구조와 토 양환경을 분석하였다. 층위별 중요치는 상층에서는 우산고로쇠나무가 120.7, 중층과 하층에서는 동백나 무의 중요치가 각각 61.8, 15.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우산고로쇠나무의 중층과 하층에서의 중요치는 각각 37.5, 2.6이었다. 하층에서는 산림청 지정 취약종인 회솔나무가 출현하였다. 층위별 종다양도는 상 층 0.674, 중층 0.947, 하층 1.312, 균재도는 상층 0.706, 중층 0.805, 하층 0.938이었다. 우산고로쇠 나무 군락의 토양 pH는 5.79, 유기물함량은 7.2%, 전질소 함량은 0.33%, 유효인산 함량은 51.1ppm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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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2010.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000원
        59.
        2010.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신라의 江原道 東海岸 및 鬱陵島 진출을 살펴보는데 있다. 이를 위하여 短脚高杯段階로부터 통일신라 초기까지의 유물.유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필자는 황남동 109호 3.4곽을 4세기 후반~말기, 황남대총 남분을 5세기 3/4분기 訥祗王의 무덤으로 보는 입장에서 고고학적 물질자료를 해석하였다. 그 결과 강원도 동해안의 강릉은 이미 황남동 109호 3.4곽 단계부터 신라의 문화가 나타나며 , 威勢品으로 보나 고분군의 규모로 보나 강릉이 최고의 거점지역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부산 복천동 집단을 강릉으로 徙民시켰고, 이들의 후예들을 異斯夫의 울릉도 정벌에 활용하였을 가능성도 제기해 보았다. 이후에도 강릉을 비롯한 강원도 동해안 지역은 지속적으로 경주와 連動하여 橫口式.橫穴式 무덤이 조성되며, 遺物相도 동일한 양상을 보여준다. 반면, 울릉도는 육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고분이 조성되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울릉도의 고분은 追加葬이라는 횡구식 아이디어를 받아들였으며, 처음에는 屍身을 안치하였지만, 점차 佛敎의 영향으로 火葬을 하고 藏骨容 器를 埋納하는 방식으로 추가장을 하면서 많은 고분이 조영될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울릉도식 고분은 6세기 중후반 이후에 갑자기 나타나고 있다. 발굴 자료가 거의 없어 단정할 수 없지만, 그 이전의 선행 묘제가 없는 까닭에 외부로부터의 徙民도 생각해 볼 수 있고, 울릉도 土着人들이 횡구식 묘제를 받아들여 변형시켰다고도 볼 수 있으나 자료의 증가와 검토가 필요하다. 울릉도는 이사부의 정벌 이후 銅冠으로 상징되듯 완전히 新羅化되었고, 원거리에 위치한 섬이라는 특성상 간접지배를 받았다고 보인다. 고고학적 자료로 보건대, 울릉도 고분이 외형상 독특하고, 동일한 고분형식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며, 횡혈식석실분으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예가 없는 점 등에서 알 수 있다. 한편 울릉도와 강원도 동해안에서 6세기 중.후반~7세기에 보이는 고고학적 물질자료들은 뚜렷한 차별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이 시기의 물질문화가 신라의 전체 영역에서 동시에 유행하는 齊一性의 결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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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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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한국학계에는 언제부터인지 소위 ‘공도정책’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조선정부가 섬을 포기하는 정책을 실시해왔던 것으로 이해되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결론을 유도해 갔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이 논리를 이용하여 독도의 선점논리를 정당화해가고 있다. 이 글은 ‘공도정책’의 허구성을 밝히려는 목적에서, 조선전기의 武陵等處安撫使와 茂陵島巡審敬差官의 파견을 검토한 후, 조선후기 안용복 도일사건 이후 정착된 搜討制의 실체를 규명하여, 조선왕조가 전기간에 걸쳐 울릉도와 독도를 어떻게 관리해 왔는가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조선초기 섬을 비워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왜구의 약탈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고, 그 방법으로 거주민을 육지로 불러들이는 刷出이었지만, 그 이후 섬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정책과 제도를 시행했다. 섬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416년부터 ‘武陵等處按撫使’를 파견했고, 1436년부터는 ‘巡審敬差官’을 파견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1694년에는 장한상으로 하여금 울릉도를 搜討하게 하고, 1697년부터는 3년에 1번, 삼척영장과 월송포만호가 번갈아 가며 수토를 정례화 했다. 이후 울릉도 수토는 흉년을 당해 정지하거나 연기하기도 했지만, 1700년대에는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그러나 1800년대에 들면서 三政紊亂으로 정치기강이 해이해졌다. 수토군의 규모나 편성은 대략 80명 정도로 구성했고, 반드시 倭學譯官을 대동했으며, 4척 정도의 배가 출항했고, 格軍과 什物 등은 삼척 인근의 강릉, 양양, 평해, 울진 등 5개 마을에서 나누어 부담했다. 또한 수토군의 임무는 왜인탐색과 울릉도 지세 조사가 임무였고, 토산물의 진상이나 인삼채취도 부과되었다. 울릉도 수토제는 1881년 울릉도 개척이 본격화되고 내륙인의 울릉도 거주가 정식으로 허용되면서, 1894년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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