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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1980년대와 90년대의 에릭 피슬 자화상에 나타나는 독특한 표현방식에 관심을 두고 시작되었다. ‘미술가의 초상’ 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된 3점의 자화상들은 피슬이 자신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자화상이 아니다. 시공간의 변화, 젠더의 도치, 광대분장 등을 시도한 다른 방식의 자화상으로서 이 자화상들은 피슬이 작품을 진행 할 당시 뉴욕 미술계의 구상미술에 대한 저평가에 대한 미술가로서의 반응이었다. 피슬이 활동하던 시기의 미술 비평 대부분은 미국 구상 회화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피슬의 자화상에 의도적인 변형과 암시들은 80년대의 구상 미술이 결코 미술의 흐름에 반하는 것이 아니며 추상미술보다 낮은 평가를 갖는 위치가 아님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80년대의 구상 미술을 모더니스트 전통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새로운 문제는 피슬의 작업 방식과 사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화상 들로 피슬은 천재적인 미술가에 대한 기존의 모더니스트 비평 이론에 따른 고정관념을 깨면서, 모더니스트 이론이 아닌 1980년대의 시대와 그 시기에 등장한 구상 미술, 그리고 미술가의 양식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미술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피슬은 미술가로서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양한 주변의 요소들과 접목시켜 ‘미술가의 초상’에 스스로의 발전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미술가로서의 생애와 자신의 태도, 그리고 사유 등을 각각의 ‘미술가’라는 이름이 붙은 초상화를 통해 새로운 미술가의 이미지와 역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피슬은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 구상회화는 단순히 읽기 쉬운 그림이 아니라 미술가의 의도와 사회적인 분위기 및 이슈 등 많은 암시와 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미술가의 사회적 위치와 개인의 주관을 모두 제거한 이 작품을 통해 피슬 자신이 구상미술가임을 당당이 선언한다.
        6,100원
        2.
        2019.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 January 2019, the Jeju District Court handed down a ruling to reject the indictment from all 18 survivors who were sentenced to prison terms in 1948 and 1949 at military court meetings in Jeju. For the past 71 years, Jeju Islanders have campaigned for transitional justice in that time to find the truth about the Jeju massacres(1947-1954). The most important and urgent task in solving the Jeju massacres issue is to set the right for truth and transitional justice before seeking reconciliation and co-prosperity each other. The ruling, which was made by the Jeju District Court in fact not guilty of surviving inmates of the military court in 1948 and 1949, carrie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returning to the pivot to human rights.
        4,000원
        3.
        2018.04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본 연구는 근대시기 명승에 관한 저술의 하나인 육당(六 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조선상식(朝鮮常識) 「지리편(地理篇)」의 구성과 체계, 명승지에 대한 저술동기, 저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명소에 대한 견해 등을 살펴보았 으며,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상식 의 구성은 풍속(風俗), 지리(地理), 제 도(制度) 총 3책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 중 「지리편」에는 한반도 국토경관에 관한 지리적 사상과 장소에 대한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지리편」의 세부구성은 다시 ① 지문류(地 文類), ② 산악류(山岳類), ③ 강해류(江海類), ④ 인문류 (人文類), ⑤ 국호류(國號類)로 5가지의 대주제로 분류되 어 있으며, 각 대주제에 대해 총143가지의 소주제를 다루고 있다. 지문류는 한반도의 면적 지형·지세 형태와 관련한 일 반적 지식의 소개가 주를 이룬다. 산악류는 한반도의 산맥 을 중심으로 대표 명산의 설명, 강해류는 대표적인 강과 바 다, 그리고 7대도서의 연혁을 소개하고 있으며, 인문류는 한반도 인류변천과정 및 팔도별 연혁, 국호류는 한반도 역 사와 관련한 지명에 대한 이해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둘째, 저서의 기술방식에 있어 대중성을 고려하여 되도록 쉽게 구성하였다. 조선상식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사용되 었던 구자체(旧字体) 형태를 따르지 않고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고 있으며, 128×182mm 크기의 지면에 1페이지가 넘지 않는 분량을 정하여 소주제별로 요약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대중들에게 조금이나마 쉽고 명료한 방법으로 전달 하고자 배려했던 고려들로 판단된다. 또한 책자의 구성은 소주제별 명사형 제목을 표기하고 있어 사전적 성격도 갖는 다고 하겠다. 셋째, 1948년에 발행된 초판에서는 서문을 따로 작성하 지 않고 「조선십경가(朝鮮十景歌)」를 수록하여 한반도 내 대표경관을 소개를 대신하고 있다. 또 1953년 합본의 재판 에서 사용한 서문에서 조선상식은 1946년에 발간된 조 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의 전신임을 밝히고 있다. 조 선상식문답은 매일신보(每日新報) 연재물로 편찬되는 과정에서 주최측의 요청과 제한사항에 따라 체제가 빈약한 것을 문화사 자료를 정화(精華)하여 엮은 의도로 밝히고 있 다. 서문을 대신한 「조선십경가」는 최남선의 명승관을 대표 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 대상은 제1경 천지신광(백두산 천 지에서 바라본 경관), 제2경 경포월화(경포에 비치는 달), 제3경 장기일출(호미곶의 일출), 제4경 변산낙조(변산바다 의 낙조), 제5경 대동춘흥(대동강 주변 봄빛), 제6경 금강추 색(금강산 단풍), 제7경 압록기적(경적을 울리는 압록강의 증기선), 제8경 연평어화(연평도 어선의 불빛), 제9경 재령 관가(동선령에서 바라본 경관), 제10경 제주망해(제주도 망 망대해)으로 구성된다. 넷째, 조선상식 「지리편」에서 소개되는 국토경관은 비 경이 아름답고 우수한 승지(勝地)를 우선순위로 삼지 않고, 민족의 뿌리와 정신이 서려있는 역사적 장소를 기준으로 선정되는 특징을 갖는다. 선정된 장소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내용을 전달할 목적으로, 한반도의 인문·지리상 현상에 역 사적 검증을 거친 자료와 본인의 비판적 사고를 반영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다섯째, 한반도의 대표 장소를 소개하는 기술방식에서 일 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감행되었던 왜곡되었던 한 반도 국토경관의 인식을 바로 잡고자하는 기술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각 주제별 내용을 요약하는 순서로 서두에 과학 적 지식에 근거한 일반적인 내용을 서술하고, 설명의 중간 부나 결론부에는 민족성 고취를 위한 역사·문화적 설명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지리편」 “팔도경승”이라 는 소주제를 살펴보면 산수가 수려한 자연환경을 기본으로 장소에 의미가 부여된 다수의 명승지가 분포한 한반도를 외국보다 월등하다고 말하며, 명승지 사례를 설명하는 데 있어 서산대사의 「조선사산평어(朝鮮四山評語)」를 인용하 고 있다. 「조선사산평어」는 서산대사가 40여 년간 머무른 묘향산을 칭송하는 시구로 전국을 두루 답사한 경험에 의해 서산대사가 정의한 조선4대 명산을 비평하는 글을 제시하여 본인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것에서 민족자긍심 고취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의 추가하고자 한 견해가 기술되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 지리편을 통해 시대적 상황에서 파생된 잘못된 과거 국토경관의 인식을 바로잡고자, 과거문헌 자료를 검증하고 본인의 지식과 경험을 최대한 반영하여 민중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 조선상식 「지리편」은 일제강점기와 광복직후의 시대적 상황에서 인식되어지는 명승지에 대한 견해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근대 시기 한반도의 국토경관 인식과 특성을 해석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 손색이 없다.
        4.
        2017.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research analyzedconsumer culture and usage of sugar in modern times based on 12 modern popular Korean cooking books with sugar recipes. Procedures were formed via textual analysis. The outcomes of the study can be summarized in brief statements. According to「Banchandeungsok」,「Booinpilj」, and「Chosunmoossangsinsikyorijebeob」, sugar was utilized in 34 out of 663 or 5.1% of cooked foods during the 1910s to 1920s. According to books such as 「Ganpyounchosunyorijebeob」,「Ililhwalyongsinyoungyangyoribeob」,「Chosun’s cooking of the four seasons」,「Halpaengyoungoo」, 「Chosunyorijebeob」, and 「Required reading for housewife」, sugar was added to 165 out of 998 or 16.5% of cooked foods during the 1930s. According to the books like「Chosunyorihak」,「Chosunyoribeob」, and「Woorieumsik」, sugar was an ingredient in 241 out of 756 or 31.9% of cooked foods during the 1940s. Sugar depicted within the 12 modern popular Korean cooking books primarily functioned as an alternative sweetener, starch, sweet enhancer, preservative, and seasoning. Similar to illustrated sugar from modern popular Korean cooking books, sugar has continually been favored by Korean cooks starting from the 1910s with 5.1% usage, the 1930s with 16.5% usage, and the 1940s with 31.9% usage. Despite its short history, sugar’s culinary importance in Korea has been on the rise ever since the early 1900s. Although sugar is an exotic spice in Korea, it has gained social, cultural, and symbolic recognition as well as practicality within Korean food culture. Thus, it has become more internalized and familiarized as an inseparable sweetness that characterizes current Korean food.
        5,400원
        5.
        2015.10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t has been firmly concluded that there isn’t any new evidence to negate already proven facts about the Jeju 4.3 Massacre. The contentions made by the Rightist group are very subjective and self-centered and distorted interpretation. This book is written by the ultra-right winged, perpetrators of Jeju 4.3 Massacre. Their contention is completely, and without exception, distorted. They are trying to state that the Jeju 4.3 never took place and that no new inquiry investigation needs to ensue. Their contentions are totally false and without merit. Social Healing begins with the exchange of truth and justice. The perpetrators need to acknowledge the crimes committed and seek forgiveness. The victims can then accept the remorseful apologies and then begin the social healing through the justice process. These processes then ultimately lead to social healing through justice for all parties involved.
        4,600원
        6.
        2006.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is about the cultural policy related to fine art under the U. 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 from September 8, 1945, to August 15, 1948. Drawing on the previous studies of Korean art history in the ‘Liberation Period’, this study especially concentrates on intention, attitude and activities of the USAMGIK. Particularly the historical documents, stored at the National Archives at the College Park, Maryland, U.S.A., were valuable to do research on the cultural policy of USAMGIK. The cultural policy was subordinated to the political objectives of occupation that can be summarized to building a stronghold of anti-communism in South Korea. Under the U.S. Military government control, cultural matters were assigned to the Cultural Section, the Bureau of Education, which later turns into the Bureau of Culutre, the Department of Education. The Bureau of Culture dealt with matters of the ancient Korean art treasures and of the Korean contemporary art. USAMGIK reopened the Korean National Museum which had been closed by the Japanese since the World War Ⅱ period. After that, U.S. Department of State sent arts & monuments specialists to South Korea for investigating ancient Korean art and culture. Although some of the destructed art treasures were restored during the occupation, there were many negative cases including intentional destruction of historic sites or loot of art treasures by U.S. army. In contrast to their interest in the Korean antiquities, USAMGIK payed little attention to promoting the Korean contemporary artists and their arts. USAMGIK distrusted and suppressed the artists of leftism, while they kept good relations with the pro-American artists and the right-wing artists. In conclusion, the visual-cultural policy of USAMGK was mainly planned and carried out in order to preserve the national interest of the United States. This period produced long-term effects on the fine art and visual culture of South Korea, in terms of institution, policy, and reorganization of art community based on anti-cummunism.
        6,400원
        7.
        1996.10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스웨덴 스톡홀름의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된 표본을 재점검하여 F. Bryk (1948)에 의해 한국에서 기록된 대부분 종들의 모식표본을 점겸한 결과를 보고한다. Bryk에 의해 제안된 각종, 아종, 개별형의 학명올 알파벳순으로 전체 목록화하고 그들의 분류학적 위치와 모식표본에 대한 제정보를 정리하였으며, 확인된 정확한 종명을 제시하였다. Bryk는 한국산 밤나방에 대해 5속,20종,75아종,5형(from) 등을 기재, 발표하였는데, 그중 9종만 현재 유효한 분류군으로 확인되었으며, 나머지 다른 대부분의 명칭은 분류학적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새로운 이명과 분류학적 변경은 아래와 같다. Euxoa intracta kurilintracta Bryk, 1948은 Euxoa sibirica (Boisduval, 1832)의 syn. n. Euxoa oberthuri nominata Bryk, 1948은 Euxoa subconspicua (Staudinger, 1881)의 syn. n. Diarsia exusta nolimetangere Bryk, 1948은 Sineugraphe bipartita Graeser, [1889] 1888의 syn. Gelastocera ochroleucana f. designata Bryk, 1948은 Gelastocera exusta Butler, 1877의 syn. n. Moma kolthoffi Bryk, 1948 stat. n., comb. n Moma fuluicollis (Lattin, 1949)은 Moma kolthoffi Bryk, 1948의 syn. n. Moma ludifera azugensis Bryk, 1948은 Trichosea ludifica (Unnaeus, 1758)의 syn. n. Acronicta alni korealni Bryk, 1948은 Acronicta alni (Unnaeus, 1758)의 syn. n. Hydrillodes obscurans Bryk, 1948은 Hydrillodes morosa (Butler, 1879)의 syn.n. Mythimna turca matsumuriana Bryk, 1948은 Mythimna turca (Unnaeus, 1758)의 syn. n. Mythimna monticola Sugi, 1981, stat. ress., bona species Cosmia fuluago korecosmia Bryk, 1948은 Xanthia icteritia (Hufnagel, 1766)의 syn. n. Euplexia koreaplexia Bryk, 1948, stat. ress., bona species Euplexia uinacea Sugi, 1982은 Euplexia koreaplexia Bryk, 1948의 syn. n. Oligia arcta tegulalis Bryk, 1948은 Eucarta fasciata (Butler, 1878)의 syn. n. D Dadaica differentiata Bryk, 1948은 Athetis albisignata (Oberthiir, 1879)의 syn. n. Virgo uernalis Bryk, 1948은 Virgo datanidia (Butler, 1885)의 syn. n. Zanelognatha triplex koreognatha Bryk, 1948은 Zanelognatha leechi (South, 1879)의 syn. n. 또한 Poole(1989)의 “Catalogue of the World Noctiuidae"에 대해 몇가지를 정정하였다.
        6,400원
        8.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48년 미군에 의한 독도폭격사건은 많은 인명과 재산손실을 초래한 사건으로 전 국민의 슬픔과 공분을 자아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 그 진상이 명백히 규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을 뿐 아니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1948년 독도폭격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중요한 연구 성과들이 있었다. 특히 최근의 몇몇 연구는 이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밝히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1948년 독도폭격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지금까지 1952년 2차 독도폭격사건이 발생한 배경에 대한 의혹은 상당히 밝혀졌지만, 1948년 1차 독도폭격사건의 발생 배경에 대한 의혹은 아직까지 충분히 규명되지 못했다. 이 연구는 기존의 독도폭격사건 관련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1948년 독도폭격사건의 경과를 재구성해보고, 1948년 독도폭격사건이 발생한 배경에 대한 의혹을 밝혀보고자 한다. 1차·2차 독도폭격은 울릉도·독도를 생업터전으로 삼고 있는 어민들에게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특히 1948년 1차 폭격사건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기에 범국민적 아픔과 공분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우리정부와 국민이 독도영유권 수호에 대한 의지를 더욱더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9.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아시아에 위치한 버마(1998년 미얀마로 개칭)의 소수종족인 까렌족이 서구 제국과의 만남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고 주권국가 건설을 시도하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버마는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불교 국가로 19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6년 1월 해방된 신생 독립국가(버마연방)이다. 버마 역사 상 정치적 주권을 전제한 민족주의운동은 영국이 버마를 식민지화하는 시기 소수종족 까렌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에 일어난 까렌 민족주의와 그 실천 과정은 당시 서구 기독교 선교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소수종족 까렌족은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구전된 까렌 신화에 나오는 ‘생명의 책’에 대한 예언(백인 형제가 생명의 책’을 가지고 귀환할 때 까렌족의 번영이 이루어진다)의 성취로 보고,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그 결과 (버마족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버마족으로 분리된 까렌 독립국 설립을 추구하였다. 언급한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본 논문은 먼저 식민지 전 구(舊)버마 전통사회의 구조를 개관하고 식민지 이후 변화된 사항들을 고찰한다. 다음으로 영국의 식민지 통치 시기 서구 기독교가 까렌족에게 소개되고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까렌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현실에서 까렌 독립국 설립을 추구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본 연구결과는 19-20세기 초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간 복음과 서구 문명이 버마의 소수종족 까렌족에 주어진 특수 환경, 즉 식민정부의 종족분할정책, 다수 버마족과의 공존, 낙후된 문명과 정령신앙 등의 영향으로 아시아 여타 지역과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실천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